[102화] 이이제이(以夷制夷) (4)
염파가 이끄는 25만 대군이 계를 떠난 바로 그 날, 진나라의 도시 장안에 들어선 병영에 조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전국에서 소집된 병사들이 모였다.
장안은 원역사의 기원전 2세기에는 한고조 유방이 수도로 삼은 대도시이지만, 기원전 3세기는 그저 중원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진나라의 수도 함양의 외곽에 있는 일개 향리일 뿐이었기에 21만 명이 넘는 병사가 모이자 고을 전체가 들썩였다.
진나라의 올해 열일곱 살이 된 젊은 장수 몽무는 작은 마을의 병영 연병장을 가득 메운 병사들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곁에 있는 중년의 장수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진나라의 용사들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소자도 전장에 나가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립니다!”
“몽무 아장(牙將)! 공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건만 그새 잊어버렸구나!”
“아······. 죄송합니다. 장군.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소자가 그만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소자가 아니라 소장이다! 아장!”
“죄······ 죄송합니다! 장군님!”
두 부자의 주변에 있던 진나라 장수들은 8척 장신인 몽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숨죽이며 웃었고 몽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는 녀석이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속이 타는구나. 저 녀석이 정신만 차리면 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장이 될 터인데. 이번 원정에서 우리 무가 보고 배우는 게 있었으면 좋겠구나.’
현재 몽오는 진나라 왕과 승상 여불위의 인정을 받고 진나라를 대표하는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한참 많은 무공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 공적을 세우면 세울수록 오래전에 진나라를 떠난 무안군 백기의 빈자리를 메꿀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한을 아들인 몽무가 풀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몽무는 힘이나 무기를 다루는 솜씨는 이제 진나라에서 따라올 자가 별로 없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없었고 병법과 부하의 마음을 휘어잡고 통솔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몽오는 올해 막 열일곱 살이 되어 간신히 종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아들을 무리하게 아장(원수의 직할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으로 임명해 자신의 곁에 두고 전장을 경험하게 할 생각이었다.
몽무도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이번 조나라 원정에서 활약해 진나라 왕에게 더 높은 작위를 받겠노라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아버지께선 이번 전투에서는 몸을 사리면서 전장의 흐름을 익히는 데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역시 대장부가 전장에 적장 한두 놈쯤은 처치해야 면이 서지 않겠어?’
몽오와 몽무 두 부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진나라의 21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km쯤 떨어져 있는 조나라의 서북부 국경을 향해 강행군을 시작했다.
진나라군 병사들은 계절이 한겨울에 접어든 탓에 그 어느 때보다 힘에 부치는 행군을 해야 했지만, 하나같이 밝은 표정으로 전우를 독려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추운 게 대수냐! 이번에는 염파 그 늙은 귀신이 없다잖아! 전공을 세우고 대왕께 큰 상을 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나 이번 전투에서 조나라놈 목을 하나만 베어 가면 나도 공승(公乗) 작위를 받는다!”
“어? 그럼 평민 중에선 자네가 제일 높은 사람이잖아! 이거 미리 잘 보여 놔야겠구먼!”
그렇게 병사들의 사기가 드높았던 덕에 몽오가 이끄는 진나라군은 겨우 20여 일 만에 조나라의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지키던 조나라군의 수비대가 급히 수도 한단으로 전령을 보내 진나라의 대군이 침략한 사실을 알리자, 조나라 왕은 안색이 새하얘지면서 대신과 외국에서 온 귀빈들을 궁궐로 불러서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며칠 전 진나라의 장군 몽오가 보병 20만 명에 전차 1천 승, 그리고 기병 1만 기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주변의 마을과 도시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면서 진양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하오! 이토록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신평군과 25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옛 연나라 땅에 발이 묶여있으니 그야말로 눈뜨고 강도가 재물을 훔쳐 가는 걸 구경해야 하는 꼴이 되고 말았구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늙은 왕이 울먹이면서 조언을 구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조나라의 신하 중에서는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자가 없었고 대신 위나라의 한 왕족만이 왕의 앞에 나서서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위나라로 돌아가서 반드시 형님이신 왕을 설득하여 조나라를 구할 원군을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신릉군! 공이 다시 한번 진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조나라를 구해주시겠단 말이오?!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신릉군은 위나라 왕의 동생이자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문 대귀족
가문의 종주이자 선비와 학자를 우대하고 많은 인재를 모은 것으로 유명한 전국 사군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조나라가 진나라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 조나라에 원군을 보내지 않으려는 위나라 왕에게 병부를 훔치고 병권을 잡고 있던 위나라 장군 진비를 철퇴로 때려죽인 다음 위나라군에 거짓 어명을 전해서 직접 정예병 8만 명을 이끌고 진나라군을 쳐부숴 조나라를 구했다.
이 모든 행동은 조나라가 망하면 위나라도 진나라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위나라 왕은 동생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노발대발했기에 신릉군은 벌써 8년째 조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나라 왕은 명장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신릉군의 말에 희망을 얻었다가 갑자기 다시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조나라에는 위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은 병사로 진나라의 21만 대군을 막아낼 장수가 없으니 참으로 난감하구려. 조선 정벌을 나선 신평군과 경사 장군은 감감무소식이고 이목 장군은 북쪽의 흉노를 막기에 급급하니 이거 원······.”
“지금 한단에 있는 조나라의 신하 중에선 오직 방난만이 진나라군의 공격에서 진양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방난? 방난은 나이가 예순이 넘은 노학자인데다 전장에 나선 경험이 없는데 몽오가 지휘하는 대군을 막아낼 수 있겠소?”
“방난은 무공을 세우기보다는 병법연구에 관심이 많아 아직 전장에 선 적이 없지만, 수십 년 동안 병법을 꾸준히 연구해온 데다 무예도 열심히 수련해 장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이옵니다.”
“흠······. 천하에 신릉군보다 인재를 보는 눈이 정확한 사람은 없겠지요. 좋소. 공의 말대로 방난에게 병사를 줘서 진양으로 보내 진나라군을 막도록 하겠소. 공에게는 호위병 2백 명을 붙여줄 터이니 하루빨리 위나라 왕께 원군을 요청해주면 고맙겠소.”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방난은 원역사에서 기원전 242년 일흔을 넘긴 나이에 장군으로 임명되어 연나라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며 극신을 죽이는 공을 세우고 다음 해에 초, 위, 조, 한 네 나라가 합종군을 꾸려서 진나라를 공격할 때 참여했던 조나라의 장수이다.
한부의 계책이 일으킨 나비효과는 다시 한번 그의 예측을 뛰어넘어 무공을 세우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조나라의 유능한 장수가 7년 일찍 전장에 나서는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후 신릉군이 위나라로 떠나자 조나라 왕은 방난을 장군으로 임명해서 병사 3만을 이끌고 진양으로 보냈다.
그 사이 진나라 장군 몽오는 추가 군량과 본국에 이어진 병참선을 확보할 생각으로 조나라 국경과 진양 사이의 영토를 착실하게 점령해 나갔기 때문에 방난은 진나라군이 성을 포위하기 전에 진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8년 2월 말, 진나라의 21만 대군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진양을 완전히 포위했다.
몽오는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진양의 높고 튼튼한 성벽을 올려다보면서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쯧! 겨울철이라 병참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한단에서 보낸 원군이 성안에 들어가는 걸 간발의 차이로 못 막았구나! 아쉽구먼! 아쉬워!”
그러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몽무가 몽오에게 말했다.
“아버······ 아니, 장군님. 우리 진나라의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염파도 병참선을 확실히 다지지 않고 무리하게 조선을 공격했다가 지금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성을 지키는 적군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병사들은 적군보다 네 배나 더 많으니 충분히 진양을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몽 악장. 진양을 둘러싼 지형을 잘 살펴보면서 본인의 말을 경청해보아라. 진양은 동쪽과 서쪽, 북쪽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직 남쪽만 평지와 이어져 있어서 지키기는 쉽고 빼앗기는 어려운 곳이다.”
“어······. 다시 보니 정말 그렇군요.”
“물론 조나라의 쓸만한 장수가 전부 다른 전장에 가 있으니 지금은 진양을 몰아쳐서 빼앗는 게 불가능하지 않지만, 보통 이런 때에는 도시로 이어진 보급로를 차단해 적군을 말려 죽이거나 수공으로 성안을 물바다로 만들어서 적의 사기를 꺾는 게 정석임을 잊지 마라.”
“장군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몽오는 자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본 다음 주변의 부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기를 놓치긴 했지만, 이번 원정의 최종 목표는 변함없이 진양 함락이다! 먼저 해자에 가교차를 놓고 분온차와 충차, 그리고 정란을 준비하라!”
장군이 명하자 진나라군 병사들은 길이 6m가 넘는 긴 널빤지 한가운데에 바퀴 두 개가 달린 이동식 다리인 가교차를 앞으로 밀면서 성벽과 진나라군의 포위진 사이에 놓인 해자를 향해 전진했다.
조나라의 장군 방난은 성벽 위에서 희고 긴 턱수염을 휘날리면서 적군이 수십 개나 되는 가교차를 몰고 오는 모습을 보고 주변의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저 많은 가교차를 전부 막을 수 없다! 궁수 부대와 노궁수 부대에 성문에서 가까운 가교차부터 노리고 화살을 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방 장군님!”
장군의 명은 곧 진양의 모든 조나라군 병사들에게 전해졌고 잠시 후 고대의 고정 포대인 거대한 쇠뇌 상자노가 성문 근처의 해자로 다가오는 적군의 가교차에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 퉁! 퉁! 투둥!
상자노의 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말뚝과 비슷한 굵기의 큰 화살 수십 개가 하늘을 날아 가교차를 미는 병사들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막이인 널찍한 나무판자를 두들겼다.
- 쾅! 콰앙! 콰앙!
그렇게 몇 번 상자노의 사격을 받은 가교차의 나무판자는 곧 박살 나버렸고 갑옷도 입지 않은 진나라군 병사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방난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궁수 부대에 사격 명령을 내렸다.
“판자가 부서진 가교차에 일제히 화살을 퍼부어라!”
노장의 외침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스며들자 성벽과 망루 위의 조나라군 궁수 수천 명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몸을 가려주던 나무판자가 부서져서 당황하고 있던 진나라군 병사 수백 명은 성벽 위에서 수천 발의 화살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면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지만, 장대비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 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이걸 어떻게 피하란 말이야! 커억!”
몽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분통을 터뜨리면서 소리쳤다.
“조나라에는 좋은 장수가 흔하다더니 이름 없는 적장조차도 만만치가 않구나! 가교를 놓기 전에 발석차를 가져와서 적군의 상자노와 망루부터 부숴라!”
그런데 그때, 진양 주변 지역을 정찰하러 나갔던 진나라군 기병 한 기가 온몸에 피가 묻은 채로 몽오의 곁으로 말을 달려오더니 힘겹게 말에서 내리고 한쪽 무릎을 꿇든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보고했다.
“기사 장연이 장군께 보고드립니다! 현재 적군 약 25만 명이 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을 향해 행군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조나라는 그 정도 대군을 동원할 여력이 없었을 터인데?!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이리 늦게 보고한 거냐!”
“적 기병대의 추격이 집요해서 정찰을 나갔던 기병 50기 중 저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거 정말 난감하게 됐구나! 그래서 적장이 누구인지는 확인했느냐?”
“놀라지 마십시오! 장군! 적장은 바로 늙은 호랑이 신평군 염파입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