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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01화 (101/195)

[101화] 이이제이(以夷制夷) (3)

한부는 염파의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자마자 남쪽의 요새에 머무르는 중인 무명과 계에 있는 암부의 연락책에게 전령을 보내 그 소식을 알렸다.

무명은 태자가 보낸 서신을 읽은 후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소리쳤다.

“그 자존심 강한 늙은이의 군대로 진나라군을 치시겠단 말인가! 조나라 왕조차 염파를 다루는 데는 애를 먹는다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내셨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하도로 군량과 포로를 운송할 준비를 해라! 조나라의 병사들이 우리 대신 진나라군과 싸워주겠다는데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상장군의 명이 떨어지자 고조선의 병사와 인부들은 밀과 보리가 가득 들어있는 포대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조나라 장군 경사를 비롯한 포로들을 마차에 태운 다음 요새에서 나와 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계에 대기하고 있던 암부의 요원들은 태자의 명이 적힌 서신의 내용을 즉시 암기한 후 밤낮으로 말을 달려 계에서 진나라의 수도 함양과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도착했다.

함양과 한단에 잠입해 있던 고조선의 첩자들은 사실을 일부 섞은 그럴싸한 거짓 정보를 진나라와 조나라 백성들에게 퍼뜨리고 다녔다.

함양의 백성들은 장을 보러 시장에 나왔다가 수많은 진나라 병사를 죽여온 염파가 이끄는 군대가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얼마 전에 한나라에서 온 상인한테 들었는데 염파에게 군량을 전달하러 가던 조나라의 보급부대가 동이족의 매복에 걸려서 완전히 박살 났다더군!”

“뭐라고?! 혹시 염파가 어떻게 됐는지도 들었는가?!”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됐겠나?! 계를 공격하러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돼서 쫄쫄 굶고 있겠지! 25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하고 같이 같이 말일세!”

“아주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소식이구먼! 우리 아버지도 옛날에 조나라 원정에 끌려가셔서 염파가 지휘하는 군대와 싸우시다 돌아가셨거든!”

그 소식은 순식간에 진나라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여불위의 심복이자 원역사에선 훗날 진시황이 가장 총애하는 재상이 되는 이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사는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을 듣자마자 여불위의 저택으로 달려가서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낭관(郎官: 각 관청에서 문서 일을 보는 관직) 이사가 여 승상을 뵈러 왔다!”

여불위가 부리는 하인들은 주인이 평소 이사를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대문을 열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낭관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인 일로 승상을 찾으십니까?”

“나랏일로 승상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다. 승상께서는 안에 계신가?!”

“지금 승상께서는 서재에서 왕궁에서 들여온 문서를 읽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낭관님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서둘러 다오!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다!”

하인은 이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급히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의 허락을 받은 다음 그를 여불위에게 안내했다.

이사는 궁궐이나 다를 바 없는 거대한 저택의 서재 안에 들어가서 그가 다가갈 때까지 손에 든 죽간에서 눈을 떼지 않는 여불위에게 인사했다.

“낭관 이사가 여 승상님을 뵙습니다.”

여불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이사를 바라보면서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서 오게. 이 낭관.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소신을 기다리셨단 말씀입니까? 하오나 소신의 집에는 여 승상께서 보내신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큰일이 생겼는데도 불러야 찾아오고 시켜야 일하는 둔재를 이 여불위가 곁에 둘 것 같은가? 난 자네의 현명함과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낭관 자리에 앉힌 걸세. 저잣거리에 귀가 솔깃해지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자네라면 부르지 않아도 날 찾아오리라 여겼지.”

“역시 승상께선 이미 염파의 소문을 들으셨군요.”

“며칠 전에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들었다네. 염파가 이끄는 25만 대군이 동이족이 차지한 옛 연나라 땅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진퇴양난에 빠졌다지? 자네는 이 소문을 듣고 나서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던가?”

“함양에 조나라에서 보낸 간자가 많이 숨어있으니 하루빨리 찾아내서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처음으로 떠올랐습니다.”

“조나라의 간자라? 그 이유를 말해보게.”

“첫 번째 이유는 무안군 백기에 비견되던 명장 염파가 고작 동이족과의 전쟁에서 그런 곤욕을 치를 리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조나라 왕과 염파가 승상을 속여 조나라를 공격하게 한 다음 우리 병사들을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근거가 빈약한 추측이군. 두 번째 이유는 더 설득력 있길 바라네.”

“두 번째 이유는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시내의 백성들이 승상이나 소신보다 먼저 알고 떠들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어찌 저잣거리의 시정잡배가 중원 전체에 눈과 귀를 심어두신 승상보다 먼저 타국의 군사기밀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 역시 자네를 등용한 보람이 있구먼! 그럴싸한 대답이야!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네의 예측이 빗나갔네.”

“승상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나도 자네가 말한 점을 이상하게 여겨서 한단에 심어둔 간자들에게 혹시 염파 그 늙은 호랑이가 이 여불위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했네. 그런데 염파에게 군량을 전하러 갔던 조나라 병사 수천 명이 동이족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수척한 몰골로 한단에 돌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오더군.”

“어리석은 조나라 왕이 또 조괄 같은 졸장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모양입니다.”

“아닐세. 이번에 병참부대의 호위를 맡았던 장수는 염파가 직접 지목한 경사라고 하네.”

“경사쯤 되는 장수가 동이족

야만인들과 싸워서 졌단 말씀입니까?!”

“그냥 진 정도가 아니라 적장과 싸우다 잡혀서 포로가 됐다고 하더군,”

“허······. 맹장 경사가 포로 신세가 되다니. 승상께서 시행하신 반간계가 그토록 큰 성과를 거둘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저 갑자기 불어난 조나라군의 머릿수나 좀 줄일 생각이었는데 경사가 사라지고 어쩌면 눈엣가시 같은 염파까지 황량한 겨울 벌판에서 아사할 지경이라니 도저히 믿기질 않는다네!”

“소신도 승상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누구보다 바라옵니다만, 신평군 염파가 고작 동이족들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건 여우를 잡으려고 놓은 작은 덫에 범이 걸려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염파라면 분명 언젠가 조선군의 방해를 뚫고 조나라로 돌아갈 거로 생각해두는 편이 좋을듯 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게 되려나? 그렇다면 자네는 이 기회를 어떻게 써먹어야 큰 이윤을 남길 것 같은가?”

“조선이 군대가 예상외로 선전하면서 염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여우 덫에 꼬리가 걸려서 잡혀 있는 틈에 호랑이굴을 털면 어떻겠습니까? 염파는 지금 동쪽 끝에 발이 묶여있으니 조나라의 서쪽 끝인 진양을 공격하면 쉽게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조나라의 옛 수도인 진양말인가? 그거 괜찮은 생각이구먼!”

“다만 올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도 염파가 조선군의 압박을 뿌리치지 못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니 신중하게 더 정보를 수집하고 군대를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지금 당장 군대를 일으키면 우리 병사들이 진양 땅에서 염파를 만날 일이 없을 거 아닌가?”

“승상! 설마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실 생각이십니까?! 겨울에는 적지에서 군량을 약탈하기 어렵고 행군속도가 느려서 자칫 잘못하면 많은 병사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낭관. 작은 손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매사에 투자를 꺼리는 상인은 대상이 될 수 없다네. 지금 조선을 치러 떠난 염파의 원정군을 빼면 조나라가 진양 땅을 지키려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10만 명도 안 될 걸세. 올해 겨울에 졸장이 이끄는 병사 10만 명과 싸우는 게 쉽겠나? 아니면 내년 봄에 염파가 지휘하는 30만 대군과 싸우는 게 쉽겠나?”

“음······. 승상.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소신이 직접 각 관청에 서둘러 조나라 원정에 쓸 병사와 물자를 준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한 달 안에 원정 준비를 마치라고 전하게. 염파도 없으니 보병 20만 명에 전차 1천 승, 기병 1만 기 정도면 충분할걸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승상.”

* * *

기원전 248년 1월 중순, 승상 여불위의 명으로 진나라가 조나라 침략 준비 작업을 거의 마쳐갈 때, 염파는 한부와 함께 무명이 데려온 경사와 만나 회포를 풀고 있었다.

노장은 평소 아끼온 젊은 장군이 조나라군 주둔지의 지휘관 막사 안에 들어오자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기뻐했다.

“경사! 이게 얼마 만인가! 자네가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부인과 사별한 후 처음으로 눈물이 날 것 같구먼!”

“크헉! 신평군! 제발 그 솥뚜껑 같은 손바닥 좀 멈춰 주십시오! 거긴 동이족

기병에게 쇠몽둥이로 얻어맞은 상처가 남아있는 자리란 말입니다!”

“대장부가 뭘 이런 걸 가지고 엄살을 피우고 그러나?! 내가 자네 나이 때는 말이야! 전장에 나가서 등짝에 화살 한두 발을 맞고 돌아와도 신음 한번 안 내고 한 말 밥에 열 근 고기를 먹고 자고 그랬어!”

“신평군.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신평군께서는 지금도 앉으신 자리에서 밥 한 말에 고기 열 근을 드시잖습니까. 온 나라의 장수가 다 신평군 같았으면 조나라는 소장이 태어나기도 전에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겁니다.”

“허! 이 사람! 나이를 먹을수록 말대꾸가 느는구먼!”

한부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염파에게 말했다.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같이 다정해 보이는군요. 두 분을 보니 갑자기 왕검성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 말에 경사가 한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말했다

“전하께서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신 덕에 저와 포로로 잡혔던 제 부하들도 다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머리를 드시오. 경사 장군. 본인은 조선의 안위를 위해 염파 장군과 거래를 하고 경을 석방했을 뿐이니 감사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소. 신평군. 그렇지 않습니까?”

“본인과 거래를 하는데 굳이 몸값을 받지 않고 이 친구를 풀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며칠 전 전하에게 당한 치욕을 잊은 건 아니나, 그 일과는 별개로 경사를 풀어주신 건에 대하여는 본인도 감사드립니다.”

한부는 솔직하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 염파를 보자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능력도 대단하지만, 백기처럼 꼬인 구석 없이 성격도 화통하구나! 염파를 데려올 수만 있으면 중원 통일을 막기가 훨씬 쉬워질 텐데.’

원 역사의 염파는 80세가 넘은 나이까지 전장에서 활약하면서 오직 조나라의 군대만 지휘했다.

그는 워낙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 덕에 어리석고 무능한 조나라의 왕들과 계속 반목하다 말년에 조나라에서 도망쳐 위나라와 초나라에서 망명하여 여생을 보내던 시절에도 늘 조나라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90대 중후반에 늙어 죽으면서도 [조나라 군사를 부리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니까 아직 염파의 마음을 돌리는 건 무리겠지. 언젠가 기회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한부는 노장의 인사를 받아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군량 운송작업은 이미 끝났으니 이제 서둘러 귀국하신 게 좋겠습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진나라는 이미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병사와 물자를 모으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본인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조나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신평군.”

한부는 노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조나라군의 막사 밖으로 나와 하도로 돌아갔다.

잠시 후 염파는 25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검으로 남서쪽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행군을 시작하라! 진나라군보다 먼저 서쪽 국경지대에 도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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