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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00화 (100/195)

[100화] 이이제이(以夷制夷) (2)

염파가 마지못하다는 듯한 태도로 태자의 회담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듯이 대답하자 악간이 입가에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조선의 태자는 배포가 크신 분이니 분명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실 겁니다. 아, 물론 신평군께서 양측이 자객이나 복병을 숨길 수 없는 장소를 회담장으로 고르신다면 말입니다.”

“자객이라니! 본인이 그런 추잡한 계략이나 꾸미는 소인배로 보이시오? 조선의 태자에게 부지불식간에 목이 달아날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오. 회담 장소는 내일 중에 하도로 사람을 보내서 다시 통보하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평군.”

악간은 염파와의 대화를 마친 후 하도의 관청으로 돌아와서 한부에게 보고했다.

“기뻐하십시오. 전하. 신평군이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회담 장소와 시간은 그쪽에서 정한 다음 내일 중으로 알려준다고 합니다.”

“훌륭하오! 악 박사! 신평군 염파는 고집이 대단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용케 설득했구려!”

“신평군이 세간에 고집이 세다고 알려진 건 지금 조나라의 옥좌에 앉아있는 우매한 왕이 자주 나라를 망칠 어명을 내리고 신평군이 그때마다 반발해와서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번 회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소신의 혀가 미끄러워서가 아니라 전하께서 조선과 조나라 모두에게 득이 될만한 제안을 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폐주 희왕이 왜 이토록 지혜롭고 겸허한 선비를 중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그럼 내일이나 모레쯤에 열릴 염파와의 회담도 함께 준비해봅시다.”

“신평군이 아직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회담 일자를 알고 계시는지요?”“그야 뻔한 거 아니겠소? 조나라군의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테니 염파는 하루빨리 본인과의 협상을 마치고 조나라로 돌아갈지 하도에 총공격을 가할지를 결정하고 싶을 테니 말이오.”

“과연······. 전하의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염파는 한부의 예상대로 사신을 보내 그날 저녁에 바로 하도와 조나라군 준둔지 사이에 있는 강변에서 회담을 열자고 전해왔다.

한부는 조나라군 사신의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저녁이라?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나? 신평군께서 어지간히 본인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하시는 모양이군. 좋소. 가서 신평군께 그리하겠다고 전하시오.”

염파가 보낸 사신이 읍을 한 후 관청 밖으로 나가자 한부는 곧바로 연나라 왕족

호송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기병대장 석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내일 염파가 지정한 회담 장소로 떠날 때 너는 나를 호위하는 척하다가 기병대와 함께 한발 앞질러 가서 복병이 숨어있는지 꼼꼼히 살펴봐라.”

“전하. 그 자존심 강한 염파가 추잡스럽게 회담 장소에 자객을 심어두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맹수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나도 염파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후 고조선군 병사들은 회담 장소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고 염파는 조선의 태자가가 안심하고 성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포위진을 조금 뒤로 물렸다.

태자 일행이 하도를 나서 하북의 얼어붙은 평원에 발을 디디자 석이 기병 50기를 이끌고 먼저 회담 장소를 둘러본 후 돌아와서 한부에게 보고했다.

“전하. 회담 장소인 조나라군이 설치한 천막 주변에 있는 갈대밭과 숲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고했다. 다행히 염파가 다른 마음을 품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과연 그 자존심 강한 노장이 과연 전하의 제안을 승낙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전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랐었으니 말입니다.”

“승낙할 수밖에 없도록 잘 설득해야지. 그나저나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어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전하.”

몇 분 후 말을 탄 태자와 호위병 1백여 명은 하도의 남문 앞을 흐르는 폭이 좁은 강 근처에 세워진 천막 앞에 도착했다.

염파와 함께 온 조나라군 호위병들은 천막 앞에 서서 조선의 태자 일행을 기다리다가 온몸에 검은 칠을 한 경번갑을 걸친 한부가 다가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조선의 태자께서 직접 신평군을 만나신다고 들었는데 어찌 호위 무장들끼리만 이곳에 오셨소?”

그러자 한부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려 질문을 던진 조나라군 무장에게 다가가면서 유창한 고대 중국어로 대답했다.

“본인이 바로 조선의 태자 한부요. 신평군은 안에 계시오?”

“아······.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신평군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어서 안내해주시오. 언제까지 손님을 세워둘 생각이오?”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바람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조나라군 장수가 천막 입구에 설치된 나무문을 열자 한부는 석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던 염파는 앞장서서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한부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공이 조선의 태자 전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가슴까지 자란 아름다운 흰 수염을 보니 공이 바로 그 유명한 신평군 염파시군요.”

“동이족에게도 본인의 이름이 알려졌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용모도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라서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어떤 모습을 상상하고 계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성벽 위에 우리 병사들의 친족을 늘어놓는 전술을 보고 적장은 분명 낯빛이 새하얗고 팔이 가는 책사의 모습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한 무장으로 보이시니 본인도 아직 인생 경험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

한부는 노장의 가시 돋친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긴 거랑 다르게 얍삽한 책사 타입이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거 맞지?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한부는 염파가 회담의 흐름을 자기가 주도하기 위해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더욱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라면 때로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간교한 계책을 쓸 수밖에 없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백성을 지키려고 병사가 아닌 백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우신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무안군 백기 같은 비정한 적장이 25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면 본인은 일찌감치 하도의 백성들을 모두 계로 옮기고 계로 퇴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상대할 적장은 무명과 함께 인망이 높기로 유명한 염파였지요. 적장의 성향을 고려해서 알맞은 전술을 고르는 건 병법의 기본이지 않습니까?”

염파는 한부의 대답을 듣고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소리쳤다.

“하하하하하하! 이토록 젊은 적장이 이 염파를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려 했단 말인가! 무모해 보일 정도로 담대하신 분이시군요! 허나 그렇게 많은 민간인을 성 안에 들인 걸 보니 분명 하도에는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많지 않겠지요 전하. 만약 본인이 하도를 몰아쳐서 함락시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자기 부모 형제를 해치라고 명하면 병사들은 연나라 출신 병사들은 창과 활을 신평군에게 겨누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염파에게 휘하의 병사가 전장의 악귀로 변하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능한 군주가 간교한 계책을 써서 나라를 다스릴 수밖에 없을 때도 있듯이 전장에 선 장수도 때로는 인간의 마음을 버릴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염파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호탕하게 대답하자 한부는 가슴이 철렁했다.

노장의 말대로 고조선군은 계와 하도에 수비 병력을 나눠서 배치했기에 명장 염파가 병사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25만 대군으로 거칠게 몰아치면 며칠 만에 함락될 수도 있다는 나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다시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악간과 전날 늦은밤까지 대화를 나무며 미리 준비해뒀던 미끼를 염파에게 던졌다.

“말씀대로 명장으로 유명하신 신평군께서 25만 대군으로 일제히 몰아치면 조나라군의 군량이 떨어지기 전에 하도를 지켜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도는 주변의 지형이 험하고 성벽이 높아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요새라 조나라도 기껏 얻은 장정을 많이 잃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되면 중원 땅에서 가장 기뻐 날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음······.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분명히 진나라의 왕과 승상 여불위겠지요. 본인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25만 대군을 움직여놓고 아무 소득도 없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만이 아니라 이번 원정의 실패를 빌미로 조나라의 왕께서 본인을 해임하시면 조나라의 장래가 어두워집니다.”

“본인도 신평군과 동감입니다. 어제 악간 박사가 이미 신평군께 한 이야기지만, 조선과 조나라는 순망치한의 관계입니다. 조나라가 무너지면 조선은 탐욕스러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될 거고 조선이 하북과 요서를 잃고 요동으로 물러나면 조나라는 사나운 흉노와 더 넓은 국경선을 맞대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두 나라가 손해를 보지 않고 이 상황을 넘길 방법이 없잖습니까? 설마 본인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하시려고 전하께서 하북 땅을 조나라에 넘겨주실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조선의 땅은 한 뼘도 다른 나라에 내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평군께서 조선 원정 성공을 넘어서는 공적을 올릴 전장을 마련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인이 알아본 사실이 정확하면 이번 전쟁은 진나라가 한단에 심어둔 간자 무리가 조선이 조나라 땅을 탐낸다는 헛소문으로 조나라 조정을 움직여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 두 사람이 뜻을 모아 진나라에게 피의 보복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흠······. 어떤 계책을 준비해 두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조나라군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해 곤경에 처했다는 소문을 내는 겁니다. 진나라는 신평군께서 25만 대군과 함께 하북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발이 묶여있고 진나라군을 여러 번 격파한 경사 장군까지 전사했다고 잘못 알게 되면 아무리 계절이 겨울에 접어들었더라도 대군을 일으켜서 조나라를 침략하겠지요.”

“그럼 그 진나라의 침략군을 본인이 나서서 무찌르라 이 말씀이군요! 그런데 경사 그 친구는 아직 살아있습니까?!”

“전투 중에 둔기로 어깨를 얻어맞아 다치긴 했지만, 갑옷 위를 맞은 덕분인지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아마 며칠만 치료를 받으면 신평군과 함께 진나라군을 물리치러 전장에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진나라와 조나라와 양쪽의 조정을 모두 속여야 하니 그동안 필요한 군량과 보급품은 지원해 드리지요.”

“선심을 쓰듯이 말씀하셨지만, 어차피 그 군량과 보급품이란 건 모두 경사 장군이 호위하던 보급부대를 쳐서 빼앗은 것 아닙니까?! 적에게 빼앗은 물자를 미끼로 자국에 쳐들어온 25만 적군을 이용해 잠재적인 적국을 치겠다. 이 말씀이로군요!”

“신평군. 지금은 그저 조나라의 안녕만을 생각하십시오. 공이 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조만간 이미 밀명을 받은 조선의 간자들이 이곳의 상황을 부풀린 소문을 함양에 퍼트릴 겁니다. 지금 진나라의 권력을 휘어잡은 승상 여불위는 한나라의 대상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상인이 눈앞의 큰 이득을 취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크윽······!”

“잘 생각해보십시오, 신평군. 천혜의 요새를 무리하게 공격하느라 상할 대로 상할 병사들을 데리고 진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물리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염파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크하하하하하하! 이거 완전히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좋습니다! 전하! 이번만은 이 염파가 전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 드리지요! 오늘의 치욕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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