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이이제이(以夷制夷) (1)
고조선군의 기병들이 어깨를 다친 경사를 포박해서 끌고 가자 무명은 적장이 낙마하면서 바닥에 떨어트린 투구를 주워 창대에 묶은 다음 소리쳤다.
“적장을 사로잡았다! 조나라군은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투항하라!”
창을 든 조나라군의 보병들은 양군 기병대 사이에 난전이 벌어진 전장을 향해 달려오다가 긴 창대에 걸린 장군 경사의 투구를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발을 멈추었다.
“경사 장군님이 벌써 당하셨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자 무명과 극신은 조나라군의 부장들이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수습할 틈을 주지 않고 적을 몰아쳤다.
“돌격하라! 미련하게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적들의 머리를 박살 내라!”
“상장군의 기병대가 다시 적진에 돌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활을 쏴서 적군의 혼을 빼놓아라!!”
극신이 이끄는 궁기병대는 장군의 명에 따라 무명의 중기병대가 공격하려는 조나라군 진영의 오른쪽 끝으로 달려가면서 허리를 틀어 창을 든 적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 피융!
각궁의 시위를 떠난 화살에 맞은 전우들이 바로 옆에서 쓰러지기 시작하자 조나라군 보병들이 전방을 향해 세웠던 창이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저놈들이 또 돌아왔잖아! 우리 궁수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그사이 무명이 이끄는 중기병대는 구멍이 뚫려버린 적의 진영으로 난입해 말을 달리면서 힘차게 편곤을 휘둘렀다.
- 퍼억!
말의 체중과 기수의 어깨 힘이 실린 자편(편곤의 추 부분)이 낯빛이 새하얘진 병사의 얼굴을 후려치자 붉은 선혈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절명한 병사 수백 명이 뒤로 넘어졌다.
그렇게 방어진형의 일각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져내리자 겁에 질린 조나라군 장수와 병사들은 창과 활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살려줘!”
“도망쳐! 경사 장군님도 붙잡히셨으니 이제 다 끝났다고!”
그러자 몇몇 고조선군 중기병이 언제나처럼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해 패잔병의 뒤통수를 편곤으로 후려치려고 했고 무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도끼눈을 뜨더니 주변의 부하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저놈들에게 살육을 멈추라고 전해라! 태자께서 조나라인을 너무 많이 죽이지 말라고 명하셨던 걸 잊었느냐?!”
“상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고조선군 장수들은 상장군의 호통을 듣자마자 뿔나팔을 불어 신호를 보내서 조나라군 패잔병을 죽이는 대신 사로잡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전투는 두 노장이 이끄는 고조선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싸움을 마친 기병들은 장수들의 명령에 따라 말에서 내려 아군과 적군이 입은 손실을 파악한 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명과 극신에게 보고했다.
“기사(騎士) 청이 상장군께 보고드립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 군은 우리 군은 적군의 기병 여든 기와 보병 약 1천 명을 사살하고 기병 197기와 보병 1,702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또한, 우리 군의 사상자 규모는 중기병 열두 기와 궁기병대 102기입니다.”
“알겠다. 수고했다.”
무명은 보고를 마친 병사에게 짧게 대답한 다음 다시 극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극신 장군. 경의 궁기병대가 적진을 교란해준 덕분에 태자 전하의 바람대로 이번 전투를 신속하게 끝낼 수 있었소. 북방의 호랑이라는 별칭이 허명은 아니었구려.”
“상장군이야말로 무안군이라 불리시던 시절의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은 모양입니다. 서융의 무기를 도입해 이토록 강한 기병을 길러내셨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투구 채로 박살 내는 무기를 흉노의 기병이 하나씩 들고 다니면 오금이 저리겠군요.”
“편곤을 쓰는 기병대는 본인이 왕검성의 성문을 처음 지날 때부터 이미 조선에 있었소.”
“그럼 저 갑옷을 입은 기병대도 태자 전하께서 길러내신 겁니까?”
“그렇소.”
“허허······. 그 시절이라면 벌써 8년 전이 아닙니까? 태자께서는 그렇게 젊으신 시절부터 많은 업적을 남기셨군요.”
“확실히 예사로운 분은 아니시지요. 그나저나 경이 애써 기른 궁기병이 적잖이 죽거나 다친 게 마음에 걸리는구려.”
“이 정도 손실은 금방 메꿀 수 있을 겁니다. 북부에선 말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등자라는 도구를 도입한 후로는 기수를 양성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럼 이제 본인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서 태자 전하께 돌아가겠소. 경은 도망친 조나라군 패잔병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영토 안에 숨어서 도적 떼로 변하기 전에 국경 밖으로 몰아내 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상장군.”
* * *
무명은 극신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인근 지역에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전사자의 시신을 매장하고 청야전술을 펼치지 않은 지역에서 인부를 징집해서 조나라군에게 빼앗은 군량을 챙겼다.
그런 다음 그는 염파가 하도를 급습하느라 놔두고 지나간 인근의 작은 요새에 군량과 포로를 옮겨놓고 그곳에서 태자와 미리 약속한 대로 봉화를 피워서 주변 지역에 승전보를 알리는 한편 하도 근처에 기병 다섯 기를 보내서 염파에게 경사의 투구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요새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확인한 하북 지역 각지의 요새에 퍼져있던 고조선군 병사들은 마찬가지로 봉화를 피워서 하도에 있는 태자에게 상장군 무명과 극신 장군의 기병대가 조나라의 보급부대를 격파한 사실을 알렸다.
한부는 하도의 성벽 위에서 먼발치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다.
“드디어 두 노장이 조나라군의 밥줄을 끊어버렸구나! 이제는 염파도 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거다!”
한편 한부가 기뻐하는 동안 상장군 무명의 명을 받은 기병들은 쉬지 않고 하도를 포위한 조나라군 주둔지의 입구로 말을 달렸다.
망루에 올라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조나라군 병사들은 남쪽의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민 기병 무리를 발견하고는 조나라 장군 경사가 보낸 전령인 줄 알고 기뻐하면서 즉시 염파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상방님! 남쪽에서 나타난 기병 다섯 기가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경사 장군의 보급부대가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구나!”
염파는 크게 기뻐하면서 지휘관 막사에서 뛰어나오더니 77세 노인의 몸놀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다리를 올라 망루 위에 서서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햇빛을 가리며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기병 다섯 기가 조나라군 주둔지에 가까이 다가오자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던 노장의 얼굴에 한순간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왜 경사 장군이 보낸 전령이 흉노식 호복이 아니라 동이족의 옷을 입고 있지?!”
그런 노장을 놀리기라도 하듯 무명이 보낸 기병 중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병사는 망루 위의 염파를 알아보고 서툰 고대 중국어로 소리치면서 손에 들고 있는 투구를 던졌다.
“안녕하시오! 신평군! 조선의 상장군께서 경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셨소!”
기병의 손을 떠난 투구는 나무 울타리를 넘어서 조나라군 주둔지 안쪽으로 떨어졌다.
염파는 투구를 던지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달려가는 기병들의 뒷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설마 본국에서 보낸 보급부대가 당한 건가?! 하도 이남에는 그리 많은 병사가 주둔할 만한 요새가 없었지 않은가!”
노장은 서둘러 망루 아래로 다시 내려와서 몇몇 호위병과 함께 직접 진영 밖으로 나와서 투구를 주워들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분명히 경사 장군의 투구로구나! 경사쯤 되는 무장이 보급부대를 지켜내지 못하다니! 정녕 하늘이 이 염파를 버리려 하신단 말인가!”
염파는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두 손으로 들고 있는 투구를 바라보다가 다시 조나라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휘하의 장수 전원을 지휘관 막사에 소집했다.
조나라군 부장들은 막사로 들어오자마자 염파의 굳은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면서 그에게 물었다.
“신평군. 늘 기운이 넘치는 분께서 무슨 연유로 그리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한단에 계신 왕께서 또 무리한 명을 보내오셨습니까?”
염파는 경사 장군의 투구를 앞에 있는 탁자에 내리꽂듯이 세게 내려놓았다.
- 타앙!
그러자 조나라군 장수들은 그 투구가 경사 장군의 투구임을 알아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럴 수가! 동이족들이 대체 무슨 수로!”
“신평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제 남은 군량을 아무리 아껴먹어도 겨우 이레나 여드레 정도밖에는 못 버틸 겁니다!”
염파는 허둥대는 부하 장수들의 면면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오. 주둔지 안의 연나라 출신 병사 중 유독 심하게 향수병에 시달리는 자들을 한곳에 모아 목을 쳐서 흐트러진 기강을 다잡고 군량이 떨어지기 전에 하도를 점령하는 수밖에 없소. 마음 아픈 일이긴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그것뿐이오.”
조나라군 장수들은 평소 병사들을 아끼던 염파의 입에서 장평대전의 학살자 백기나 꺼낼법한 말이 흘러나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노장의 결연한 표정과 목소리에 압도당해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 염파에게 읍한 다음을 보고했다.
“상방님. 조선의 태자가 보낸 사신이 주둔지 입구에 찾아와서 상방님을 뵙고 싶다고 청해왔습니다.”
“적장이 우리 군의 병참선을 끊었다면서 우릴 조롱할 생각인가? 그 동이족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일단 들어보고 목을 쳐도 늦지 않겠지. 그자를 이곳으로 데려와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상방님.”
염파가 지시하자 병사는 막사 밖으로 나가서 한부가 보낸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사신이 염파에게 허리를 숙이며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원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 높으신 신평군 염파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조선 왕실을 섬기는 박사 악간이라고 하옵니다.”
악간이 인사하자 염파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악간이라······. 혹시 그대는 연나라의 상방이자 상장군이셨던 악의의 자손이오?”
“그렇습니다. 신평군께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친을 여전히 기억해주시니 기쁩니다.”
“진나라 다음으로 강성했던 제나라를 거의 멸망시킬 뻔한 명장의 이름을 모르는 무인이 있을 리 없지 않소? 그런데 위대한 부친을 둔 그대가 어찌 연나라 왕실을 부흥시킬 생각은 않고 동이족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오?”
“부친께서는 제나라의 영토 거의 전역을 점령해 연나라 왕실에 바쳤지만 우매하고 속 좁은 혜왕은 태자 시절 현명하신 소양왕께 제 부친을 모함했다가 엉덩이를 얻어맞은 원한을 잊지 않고 옥좌에 앉자마자 부친을 해임하고 조나라로 쫓아냈습니다.”
“음······. 그 일화는 본인도 들어본 적 있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혜왕의 자손인 희왕은 제가 아무리 조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연나라에도 해가 미칠 거라며 만류해도 조나라 원정을 강행하다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계가 조선군에 점령된 날 이만하면 신하 된 도리를 다했다고 여기고 조나라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삿짐을 꾸리던 도중 조선의 태자 전하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휼하며 선정을 펼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조선 왕실을 섬기게 됐습니다.”
“흠······. 그대 정도의 인재가 따르는 걸 보면 조선의 태자는 단순한 야만족은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신평군. 우선 태자 전하를 뵙고 말씀을 나눠 보시지요. 전하께서는 조선과 조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성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보겠소,.. 대신 회담 장소와 시간은 본인이 정할 테니 조선의 태자에게 그리 알라고 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