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염파와의 전투 (3)
무명은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면서 부대의 속도를 줄여서 적군의 진영을 살피는 동시에 북방에서 오고 있을 지원군의 위치를 파악하러 떠난 기병 50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무명이 이끄는 고조선군 기병대와 조나라군 사이의 거리가 약 300m쯤으로 줄어들었을 때, 서쪽으로 정찰을 떠났던 기병대가 돌아와 상장군의 곁으로 말을 몰아가서 보고했다.
“상장군님! 예정대로 극신 장군이 직접 기병 2천 기를 이끌고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
“앞으로 약 1각(약 7~8분)입니다!”
“그동안 적의 발을 묶어 둔다! 모두 적군의 활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전에 말을 멈추고 지친 말을 쉬게 해라!”
무명이 명령하자 고조선군 기병 2천 기가 고삐를 당기면서 말을 멈추었다.
조나라군 병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적 기병대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수군거렸다.
“뭐지? 죽일 듯이 달려오더니 왜 저기서 멈추는 거야?”
“적장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지. 그나저나 동이족
야만인들을 기수한테 왜 저렇게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입힌 걸까?”
“그러게 말이야. 저래서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기 불편할 텐데.”
전국시대의 조나라는 전국칠웅에 속한 나라 중 가장 먼저 북방 기마민족의 기마전술을 받아들여서 기수들에게 호복(胡服)이라 불리던 가볍고 말을 타기 편한 흉노식 옷을 입히고 기마궁술을 가르쳐 궁기병대를 육성해왔다.
그런 고대 중국인들에게 중장갑을 두른 기병은 생소한 병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장군 경사는 생소한 차림새의 기병대를 보고도 적장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적 기병들은 하나같이 중무장을 했군.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가린 걸 보니 지친 말이 한숨 돌리고 나면 직접 우리 진영으로 돌진해올 생각인가?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전군 활의 사정거리까지 적 기병대에 접근하라!”
장군이 외치자 조나라군 병사 2만 명은 적과의 거리를 조나라 활의 유효 사거리인 약 100m까지 좁히기 위해 말에서 내려 쉬고 있는 고조선군 기병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무명은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면서 다시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적장이 내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구나.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주도권은 나한테 있지. 전군! 우리 부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군과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라!”
상장군이 명하자 말에서 내려서 흙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고조선군 기병들은 자기 말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경사는 먼발치에서 느린 썰물처럼 슬금슬금 물러나는 고조선군 기병대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큭! 데리고 있는 기병이 부족한 게 한이로구나! 북서쪽에서 오고 있는 적군이 저놈들하고 합류하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기병대와 일전을 치러야 한다면 지형이 유리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간혹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을 뿐인 하북의 황량한 겨울 평야뿐이었다.
장평대전의 주역인 무명은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가장 먼저 아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나라군이 기병에게 유리한 장애물이 없는 지역에 들어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렇게 경사가 이끄는 조나라군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의 의뭉스러운 대처에 끌려다니던 도중 북쪽에서 극신이 이끄는 기병대가 분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 뿌우우우우우!
경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 쪽에서 또 다른 기병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전군 우마차를 벽으로 삼아서 방어태세를 갖추어라!”
장군이 명하자 조나라군 병사들은 일렬로 늘어선 우마차를 등지고 다시 창날의 벽을 세우고 궁수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그리고 무명은 다시 말 등 위에 올라탄 다음 오른손에 든 긴 마상창을 높이 들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극신 장군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전군 말을 타고 적을 향해 구보로 전진하라!”
“알겠습니다! 상장군!”
상장군이 명하자 고조선군의 기수 2천 명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말 등위에 올라 적진을 향해 구보로 말을 몰아갔다.
중세배경의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것처럼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이 수백 미터 밖에서부터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돌진하면 그동안 말이 지쳐서 적군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없다.
특히 기원전 3세기의 고조선과 고대 중국의 여러 나라는 아직 북방 유목민들이 애용하는 한혈마를 수입하지 못해 조랑말 정도 크기의 과하마를 전투마로 썼기 때문에 적어도 약 50m까지는 적과의 거리를 좁힌 다음 전속력으로 돌진해야 유효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고조선 기병대가 천천히 적에게 전진하는 동안 모습을 드러낸 극신은 전장을 한번 훑어보고 등 뒤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장군의 중기병대가 적진에 접근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 모두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아!”
호복을 입은 북방의 궁기병 2천 기는 장군의 명령에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한 후 각궁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극신은 보급품이 담긴 수레를 지키기 위해 길게 늘어선 적진 주변을 어지럽게 맴돌면서 활시위를 당긴 다음 적의 궁수가 활을 쏘면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화살을 쏘는 식으로 조나라군을 괴롭혔다.
- 쐐액!
한부가 북방의 기병대에 지급한 튼튼한 각궁에서 화살이 발사될 때마다 변변한 갑옷을 입지 못한 조나라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져갔다.
“끄아아악!”
“크허어억!”
그러자 경사는 적 궁기병대의 현란한 회피기동에 정신을 못 차리는 조나라의 궁수들에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재빠른 적을 바로 노리고 쏘면 화살이 맞을 리가 있겠나?! 적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탄막을 펼쳐라!”
장군의 꾸짖음에 정신을 자친 조나라군 궁수부대의 지휘관들은 그제야 극신이 이끄는 궁기병대의 움직임에서 일정한 형식을 발견하고 적의 동선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발사!”
조나라군 장수가 철검을 휘두르며 발사 명령을 내리자 수천 발의 화살이 무지개 같은 큰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날아서 전장의 한쪽에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회피기동을 하던 극신의 기병 중 1백여 기는 미처 머리 위로 덮어오는 화살의 장막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과 사람이 함께 온몸에 화살을 맞으며 쓰러졌다.
- 히히히히히힝!
“크어어어억!”
그렇게 아군이 피를 흘리며 시간을 버는 동안 고조선군의 중기병대가 무사히 적진과의 거리를 좁히자 선두에 선 무명이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공격명령을 내렸다.
“전군 돌격!”
노장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흰 입김과 우렁찬 외침이 겨울 하늘에 번지자 온몸에 강철 경번갑을 두른 기병 2천 기가 편곤을 높이 들고 지축을 울리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조나라군의 보병들은 우마차를 등지고 길게 늘어선 진영의 측면으로 돌진해오는 적 기병대를 향해 창날을 돌렸지만, 겁을 먹은 몇몇 병사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경사는 그런 부하들의 모습을 보고 아군에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겁을 먹은 건가? 이 창병들로는 갑옷을 입은 적 기병대를 막기 어렵겠구나!’
창병이 방진을 짜서 중장갑을 두른 기병대의 돌격을 막으려면 덩치 큰 말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도망치지 않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중기병이 없는 기원전 3세기 고대 중국의 병사가 그런 상황을 상정한 훈련을 받았을 리 만무했다.
경사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휘하의 기병 1천 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고조선군 중기병대를 향해 말을 달려나갔다.
“전 기병은 나를 따르라!”
장군이 긴 창을 머리 위로 빙빙 돌리면서 달려나가자 기세가 오른 조나라군 기병들도 함성을 지르며 따라나섰다.
“장군의 뒤를 따르라!”
“조의 맹장 경사 만세!”
잠시 후 편곤을 든 고조선군 기병대와 창을 든 조나라군 기병대는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다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 콰앙!
무명 바로 뒤에서 말을 달리던 고조선군 기병이 힘껏 휘두른 편곤이 기병의 머리를 투구째로 부수면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몇몇 조나라군 기병도 긴 창으로 적의 어깨와 가슴을 후려쳤지만, 대부분 단단한 경번갑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면서 적군의 비명 대신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또한 등자를 사용하는 고조선군 중기병대는 하나같이 능숙한 마술(馬術)을 자랑했고 애초에 수도 조나라군 기병의 두 배가 넘었기에 순식간에 조나라군 기병들을 압도해 나갔다.
경사는 조나라군 기병대가 아군 창병이 적 기병에 접근할 시간도 벌지 못하고 볏짚처럼 쓰러져가자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역전시킬 생각으로 적장을 찾다가 철가면을 쓴 무명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창을 내질렀다.
“죽어라!”
무명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서 목을 노리고 질러온 창을 피하자 창날이 그가 쓰고 있는 철가면에 스치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두 사람의 귓가에 스쳤다.
- 카앙!
분노한 무명은 자신을 습격한 적장을 노려보면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새파랗게 어린 늑대 새끼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구나!”
그는 기습에 실패한 젊은 적장의 얼굴을 노리고 가로로 창을 휘둘렀고 경사는 급하게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그 공격을 피했다.
그 후 두 장수는 서로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면서 10여 합을 겨뤘지만, 적장의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살갗을 약간 벴을 뿐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러던 사이에 고조선군 중기병대는 드디어 조나라군의 기병 1천 기를 완전히 몰아냈고 경사는 본대의 보병이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수많은 적 기병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적장이 상장군님을 노린다!”
“적장을 막아라!”
몇몇 고조선군 기병이 두 장수의 싸움에 끼어들어 편곤을 휘두르자 그중 하나가 경사의 오른쪽 어깨에 명중했고 젊은 조나라의 맹장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낙마하고 말았다.
“크허억!”
무명은 바닥에 쓰러진 적장의 곁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더니 경사의 목을 창으로 겨누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결착이 나게 돼서 아쉽구나. 여기서 널 죽이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투항하거라.”
“허튼소리 말고 어서 죽여라! 신평군께 군량을 전달하지 못하면 25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적지에서 굶주리게 될 텐데 무슨 낯으로 나 혼자 살아서 돌아가겠느냐!”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어쩌면 조선의 태자께서는 이 군량을 염파 그 늙은이에게 전달할 생각이실지도 모르니 말이다.”
“뭐······? 적에게 일부러 군량을 넘겨주는 장수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이냐?”
“그분의 심중이 궁금하면 순순히 나를 따라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되도록 조나라의 장수와 병사를 많이 상하게 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참이니 말이다.”
경사는 무명의 말을 듣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조선의 태자는 대체 무슨 계획을 짜고 있단 말인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