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염파와의 전투 (2)
“도대체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왜 병사들이 성벽 위의 적을 공격하지 않는 게야!”
염파는 기세 좋게 토산을 오른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고 고함을 지르더니 전장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는 토산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전장의 지휘를 맡은 악승 장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토산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노성을 질렀다.
“악승 장군!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요! 병사들이 귀신이라고 본 것처럼 허둥대고 있는 게 보이지 않소?!”
“신평군! 귀신이 아니라 망한 연나라의 백성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장이 우리 병사들의 가족을 찾아내서 성벽 위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병사들이 제 부모 형제가 다칠까 봐 활시위를 당기길 꺼리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허허허! 동이족
야만인의 잔악함이 인간 백정 백기를 넘어섰구나! 죄 없는 백성을 방패막이로 쓰려고 전장에 데려왔단 말인가!”
그러나 염파의 예상과는 달리 한부는 연나라 출신 백성을 희생양으로 쓰고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책이 먹힌 걸 보고 기뻐하면서 바로 다음 작전을 시작했다.
“충직한 조선의 백성들이여! 저 토산 위에 너희의 남편과 아들이 있다! 어서 반가운 가족에게 고향의 노래를 불러서 환영해주어라!”
태자가 말하자 성벽 위를 가득 메운 연나라 출신 백성들은 입을 모아 성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연나라의 민요를 불렀다.
“난하를 건너 남쪽으로 떠나는 님이시어! 부디 고향 땅을 잊지 마오!”
그러자 토산 위의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손에 떨어트리고 눈물을 글썽이거나 성벽 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목놓아 불렀다.
“꺼흐흑!”
“여보! 혹시 거기 있소?! 내 목소리가 들리면 손 좀 흔들어봐요!”
그렇게 한부의 계책으로 피가 강처럼 흐르고 함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어야 할 전장은 순식간에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현장이 되어버렸다.
악승은 토산 밑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저 성벽을 넘을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적장은 우리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야만인 따위가 어떻게 저런 간교한 꾀를 어떻게 생각해냈단 말이냐!”
한부가 생각해낸 계책은 초한 쟁패기에 한고조 유방이 해하에서 포위한 초패왕 항우의 군대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사면초가 계책을 응용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우의 초나라 출신 병사들이 사면이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격렬하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자 초나라 노래를 잘 부르는 병사들을 뽑아서 항우의 진영 근처에서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러자 고향 생각이 절실해진 초나라 병사들은 탈영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한나라군은 일부러 길을 조금 터서 초나라군을 그냥 보내주자 결국 항우의 곁에는 겨우 8백 명의 병사만이 남게 되었다.
한부는 성벽 위에서 동요하는 적군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이 작전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다음 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단 한숨 돌렸지만, 사면초가 때처럼 일이 쉽게 풀릴 리는 없겠지. 조나라군은 포위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적장이 항우가 아니라 염파니까.’
아니나 다를까 염파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악승을 제쳐놓고 홀로 토산을 올라가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병사들을 꾸짖었다.
“이놈들!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 거냐!”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찾던 병사들은 갑자기 등 뒤에서 총사령관의 호통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사······ 상방님!”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이놈들아! 네놈들이 그토록 한심한 모습을 보이니까 노구를 이끌고 토산을 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겨우 몇 달 전에 조나라의 왕께 충성을 맹세한 놈들이 오늘은 하늘 꼴을 보니까 가만히 놔두면 조선의 동이족
적장에게 머리를 숙이겠구나!”
“상방님! 하지만 저 성벽 위에서 가족들이 저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 노나라의 장군 오기는 자신을 등용해준 왕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적군인 제나라 출신 아내의 목을 스스로 베었다. 너희가 그런 식으로 충성심을 보일 거라고는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만, 사내대장부로서 적어도 조국을 멸한 동이족
야만인에게 귀순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너희를 믿어준 대왕과 나 신평군 염파를 배신할 거냐?!”
염파가 호통치자 연나라 출신 병사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고 성벽 위의 백성들도 노장의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우렁차게 울려 퍼지던 노래가 차차 사그라졌다.
한부는 여든에 가까운 노장 염파가 당장에라도 투항할 것 같았던 병사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돌리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저 사람이 정말로 내일모레면 여든이 되는 노인이란 말이야?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네. 역시 염파를 설득하려면 패가 몇 개 더 필요하겠구나.’
그는 이번 전쟁을 더는 손해를 보지 않고 끝내면서도 조나라 왕이 염파를 또 해임하거나 조나라에서 염파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현재 조나라는 조선에게 있어 강대한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줄 방파제와 같은 나라이고 염파는 그 조나라의 대들보와 같은 장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간신히 상황을 정리한 염파는 병사들을 데리고 토산을 내려와 조나라군 진영으로 돌아와 지휘관 막사에 군사회의를 열어 장수들에게 말했다.
“교활한 적장이 우리가 하도에 도착하기 전에 연나라 출신 병사들의 친족을 성 안에 불러 모았소. 이대로는 병사들이 자기 가족이 다칠 것을 걱정하여 성안으로 화살 한 발을 쏘는 것조차 꺼릴 테니 이대로 무리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병사를 물려 조나라로 돌아가서 둔전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이오.”
노장이 말하자 악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이 많은 병사를 움직이고 그냥 귀국하면 대왕께서 크게 노하실 겁니다. 저희야 약간의 문책만 받고 넘어가겠지만, 신평군께서는 병부를 받으셨으니 무거운 책임을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본인의 명예와 직위를 지키고자 병사들이 친족에게 창을 들이대고 화살을 쏘게 할 수는 없소.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명령을 내렸다가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조선인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가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오.”
그 대답을 듣고 악승은 입을 다물었지만, 다른 부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염파에게 말했다.
“소장도 신평군의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이제 군량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하도를 등지고 퇴각하려면 조선군이 별동대를 보내서 행군을 방해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라 보면 행군속도가 느려져서 조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군량이 바닥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내 그런 일이 있을까 봐 대왕께 최소한의 보급품을 반드시 보내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해두었다. 병참 부대의 호위는 경사 장군이 맡기로 했으니 중간에 적군이 도적이 털어갈 일도 없을 테지.”
경사는 조나라의 장군으로 이미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적군을 격파하여 실력을 입증한 장수였다.
총사령관의 호언장담에 연나라 항장 출신인 조나라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경사 장군의 명성은 연나라에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진나라군을 여러 번 물리쳤다지요?”
“그럼 경사 장군이 이곳에 도착하면 바로 행군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염파는 현재 다른 전장에 나가 있지 않은 장수 중에서 가장 유능한 경사에게 보급선을 맡겼지만, 한부도 염파의 군대가 하도를 포위하기 전에 자기 손에 있는 패 중 가장 막강한 장수에게 조선 원정군의 생명줄을 끊으라는 명을 미리 전달해 두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장군이 조나라군 보급부대를 제대로 털어줘야 하는데. 그래야 염파가 내 제안을 귓등으로 듣지 않을 거 아냐.”
* * *
한부와 염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번 전쟁을 피해 없이 끝낼 생각을 하며 대치하고 있을 때, 조나라의 장군 경사는 군량과 보급품이 가득 담긴 우마차 수천 대와 조나라 출신 병사로 구성된 호위 부대 1만 5천 명을 이끌고 하도를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경사는 무명의 별동대가 청야 전술을 펼치면서 불타버린 도시와 마을의 곡식 창고 옆을 지날 때마다 병사들을 재촉했다.
“봐라! 하도를 공격하고 계신 신평군께서는 적지에서 밀 한 톨 보리 한 톨도 얻지 못하고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곡식 포대를 보면서 한숨을 쉬고 계실 거다! 조선의 동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아군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걸어라!”
그런데 그때, 정찰을 나갔던 조나라군 병사 수십 명이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도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경사의 곁으로 다가와서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
“경사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경사 장군님!”
“무슨 일이기에 그리 소란을 피우느냐?”
“동쪽에서 적군으로 추정되는 기병 약 2천 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우리 부대 근처에 도착할 겁니다!”
“창병과 궁수를 선두와 후방에 배치하고 우마차는 행렬의 중간으로 보내라! 이쪽의 수가 열 배나 많으니 겁먹을 것 없다!”
잠시 후 조나라군 병사들이 장군의 명에 따라 적 기병대의 습격에 대비해 무기를 움켜쥐고 이동하려는 찰나 조금 전 본대로 귀환한 정찰병과는 다른 방향에서 조나라군 정찰병 한 명이 팔과 등에 피가 묻은 채로 달려와 경사 장군에게 보고했다.
“장군님! 경사 장군님! 북서쪽에서 적 기병대 약 2천 기가 우리 부대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병사 서른 명은 적 기병대와 마주치는 바람에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고 소인만 혼자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경사는 정찰병들의 보고를 듣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선인들이 그렇게 많은 기병 전력을 숨겨놓고 우리 부대가 국경을 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기병대를 지휘하는 적장이 형편없는 자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구나!”
전성기의 조나라는 보병은 한 번에 수십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전차는 1천 승, 그리고 기병 1만 기만을 운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강한 진나라를 제외한 전국칠웅의 나라는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백성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말을 많이 기를 수 없고 등자가 없는 시대이다 보니 기수를 양성하는데도 큰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평대전 이후에 국력이 쇠한 조나라는 전성기의 절반도 안 되는 기병을 운영하고 있었고 현재 조나라의 기병 대부분은 염파의 부대에 속해있었다.
한부는 그 점을 노리고 무명이 지휘하는 고조선에서 데려온 기병 2천 기와 극신 휘하의 연나라 출신 기병 2천 기를 동원해 조나라군의 보급선을 끊을 생각이었다.
적장이 당대 최고의 장수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사는 전의를 불태우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겁먹을 것 없다! 동이족의 기병 따위 우리가 상대해왔던 사나운 흉노의 기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창병 부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궁수는 시위에 화살을 걸어라!”
행군을 멈춘 경사는 창으로 벽을 세운 보병 뒤에 궁수를 배치하여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조선의 상장군 무명은 말을 달리면서 적군이 방어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제법 단단한 진형이로구나. 저 정도는 돼야 부술 맛이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