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염파와의 전투 (1)
염파는 마지못해 조나라 왕이 하사한 병부를 받아들고 궁궐을 나서면서 한탄했다.
“곧 겨울이 시작될 테니 조선을 공격하려면 속전속결을 내야겠구나. 동이족
장수가 그랬듯이 계를 바로 치는 수밖에 없겠어.”
조나라군이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면 앞으로 두 달 안에는 하북 지역을 평정해야 하는데 조나라의 수도 한단과 연나라의 옛 수도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400km,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최소한 20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염파는 성벽 높고 단단하기로 유명한 계를 한 달 만에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흰 턱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 동이족들이 계를 점령할 때 성벽이 많이 부서졌기만을 기대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올해는 하북 일대의 마을과 도시 몇 개만 점령하고 생색을 내는 수밖에.”
한편 한부는 한창 점령지에서 고조선에 우호적인 현지인을 관리로 등용하며 민심을 추스르고 바다를 건너온 왕검성에서 보낸 물자로 전화를 복구하던 도중 암부의 요원에게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염파도 지금 우리를 치면 조나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어서 상장군을 궁궐로 불러와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상장군 무명은 직접 병사들이 사용할 병장기와 보급품의 상태를 점검하다가 태자의 부름을 받고 급히 계의 궁궐로 향했다.
무명은 알현실에 들어서자마자 옥좌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대는 태자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전하. 소장을 급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불온한 무리가 반란이라도 일으켰습니까?”
“그보다 심각한 상황이오. 상장군. 조나라의 25만 대군이 계를 향해 북진하고 있다고 하오. 아마 앞으로 열흘 정도 뒷면 적군이 국경을 넘을 것이오.”
“첫눈이 내릴 날이 머지않았는데 전쟁을 시작하다니······. 적장은 손자병법의 첫 장도 읽어보지 않은 무지렁이인 모양입니다.”
“그럼 본인이 이렇게 걱정할 일도 없겠지요. 간자의 보고에 따르면 적군의 총대장은 그 유명한 염파라고 하오.”
“염파! 설마 그 신평군 염파 말입니까!”
“그렇소. 상장군. 자칫하면 기껏 점령한 하북 일대를 전부 조나라에게 빼앗기게 생겼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무명은 태자의 걱정스러운 질문을 듣고도 호승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염파! 드디어 소장이 염파와 자웅을 겨뤄볼 수 있게 됐단 말입니까!”
“상장군. 강력한 적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어찌 그리 기뻐한단 말이오? 지금 계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는 9만이 조금 안되오. 북방의 극신 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해도 과연 조나라군을 쫓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번 전쟁에서만큼은 소장은 염파에게 질 수 없습니다.”
“음······. 조선인 중에 상장군이 명장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 염파를 상대로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말은 쉽게 믿기 어렵구려.”
“전하. 혹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손자병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지 않소?”
“소장은 적장이 신평군 염파임을 알고 있지만, 염파는 소장이 과거 진나라의 상장군 무안군 백기였음을 모릅니다. 적장은 분명 소장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겠지요.”
“혹시 염파쯤 되는 인물이 허점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전하. 염파쯤 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지금 조나라는 병사에게 창과 검 대신 낫과 쟁기를 들고 밭을 갈게 해야 할 시기임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본인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도 조나라가 군대를 움직였다면 또 무능한 왕의 명을 따른 것일 테지요. 분명 염파는 최대한 빨리 이번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원정을 서두를 겁니다. 아무리 신중한 장수도 그런 상황에서는 완벽한 전략을 짜기 어렵습니다.”
“흠······. 부처님과 천신께 부디 상장군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빌겠소. 그럼 조나라군을 어디서 막아야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겠소?”
“계에서 남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곳에 하도(下都)라는 이름의 거대한 요새 도시가 있는데 아무리 염파가 계를 직접 공격하고 싶어도 하도를 뒤에 남겨두고 계로 진격하긴 어려울 겁니다.”
“극신 장군에게 들은 적이 있소. 연나라는 하도를 계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라 여기고 별도(別都)로 썼다지요? 확실히 우리 조선군처럼 북에서 진격해오면 모를까 남쪽에서 온 군대는 하도를 무시하고 계로 진격하다간 대열의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크겠소.”
“그렇습니다. 폐하. 소장이 별동대를 지휘하여 청야 전술로 조나라군의 발목을 잡는 동안 계에서 병사를 징집해 훈련하고 북방의 지원군을 하도로 불러 굳게 지키면 염파도 올해는 소득 없이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방법밖에는 조나라군을 물리칠 방법이 없겠구려. 잠깐 그러고 보니 조나라가 25만 명이나 대군을 동원했다면 그건 율복과 경진이 데리고 있던 연나라군 병사가 아니겠소?”
“분명히 그럴 겁니다. 지금의 조나라는 그 많은 병력을 한쪽 전선에 동원할 역량이 없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연나라 출신 병사라면 동이족에게 빼앗긴 고향을 되찾는다는 동기가 있어 사기가 높을 테니 저라도 염파의 입장이면 연나라 출신 항장과 병사를 적극 활용했을 겁니다.”
“역시! 좋은 계책이 떠올랐소! 어쩌면 우리 병사들이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도 염파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 * *
기원전 249년 11월 말, 계절이 초겨울에 들어설 무렵 염파는 연나라 출신 항장 악승을 비롯한 부장 수십 명과 2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의 국경을 넘었다.
염파는 적지에 들어서자마자 다리 힘이 좋은 병사 1만 명을 선별해 척후 부대를 여러 개 만든 다음 지시를 내렸다.
“본대의 행군 경로 주변을 철저하게 수색하여 적군의 복병이나 군량을 취할 마을과 도시를 찾아내라!”
상방 염파의 명을 받은 척후 부대는 조선군의 매복이 의심되는 산과 숲을 뒤지고 25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먹일 군량을 약탈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조나라의 정찰부대가 하북 일대를 휘젓고 다닐 때는 이미 무명의 별동대가 조나라군의 예상 행군 경로에 사는 백성들을 하도와 계로 피난 보내고 그 지역의 도시와 마을에 저장되어 있던 곡식을 두 도시로 옮기고 민가를 태워버린 후였다.
그렇기에 조나라군은 조선의 땅을 밟은 지 사흘 동안 보리 한 톨도 찾아내지 못했다.
염파는 행군 도중 마주치는 마을마다 잿더미로 변해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 조선의 장수들도 병법의 기본은 알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곳은 본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도 청야 전술을 쓰다니. 적장은 조나라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조나라는 수십 년 동안이나 진나라와 흉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장정이 많이 죽어서 농지가 황폐해지는 바람에 재정이 풍족하지 못했기에 염파는 이번 원정에서 필요한 군량을 상당 부분 현지 약탈에 의존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군략에 있어서는 한없이 완벽주의자인 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잿더미를 차지해놓고 조나라로 돌아가면 왕께서 노발대발하실 게 아닌가? 결국 큰 도시를 공격할 수밖에는 없단 말이군.”
염파는 내키지 않았지만, 군대를 북쪽으로 전진시켜 기원전 249년 12월 초에 하도 근처에 도착했다.
노장은 전군에 하도를 포위하도록 명령한 후 요새 도시의 빈틈을 찾기 위해 연나라 출신 장수인 악승을 지휘관 막사로 불렀다.
악승은 막사 안으로 들어서면서 염파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신평군.”
“어서 오시오. 악승 장군. 그대는 연나라가 망하기 전에 하도에 가본 적이 있소?”
“그렇습니다. 신평군. 보시다시피 하도는 주변의 지형이 험하고 계 못지않게 높고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어서 공략하기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래 보이는구려. 도시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으니 땅굴을 파서 침입하기도 어렵고. 성벽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도 한정적이니 이른 시일 내에 공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오. 하지만 세상에 난공불락의 요새란 없는 법. 하도의 성벽에도 약점이 있을 것 같소만.”
“언덕의 북쪽 절벽에 접한 성벽은 그나마 낮고 상자노나 낭아박(못이 박혀있는 판을 적군의 머리 위로 떨어트리는 수성 병기)같은 수성 병기가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병사들에게 절벽을 기어오르라고 명하지 않으실 거라면 큰 의미는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그거요! 저 요새가 세워진 언덕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그다지 높지는 않소! 절벽 쪽에 토산을 쌓고 성벽에 가교를 놓으면 올해가 가기 전에 하도를 점령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군요! 확실히 25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으니 열흘 정도면 토산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소장이 토산 건설을 지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평군.”
“부탁하오. 악승 장군. 땅이 더 단단하게 얼기 전에 서둘러 작업을 시작하는 게 좋겠소.”
상방 염파의 명령이 전군에 전달되자 25만 명의 병사가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흰개미가 탑을 쌓듯 높은 토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연나라 출신 병사들은 추운 날씨와 고된 작업에도 동이족
야만인들에게 빼앗긴 고향을 되찾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언 땅을 모닥불로 녹여가면서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고 흙이 가득 담긴 포대 자루를 날랐다.
“후······. 하도 삽질을 했더니 삭신이 다 쑤시는구먼.”
“이 친구야!! 멈추지 말라고! 지금 자네 부모님께서 동이족의 노비 노릇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는데 쉴 생각이 들어?!”
“자네 말이 맞아. 팔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이놈의 토산은 다 쌓고 쉬어야지.”
연나라 출신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작업에 임한 덕에 조나라군은 겨우 일주일 만에 하도의 성벽보다 높은 거대한 토산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염파는 예정보다 사흘이나 빨리 토산이 완성되자 크게 기뻐하면서 그날 밤 그동안 고생한 병사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군량과 술을 넉넉히 배급하면서 다독였다.
“모두 수고 많았다! 내일은 드디어 전투가 시작될 테니 모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푹 쉬어라! 하도 탈환을 시작으로 감히 중원에 발을 들인 조선의 동이족들을 쫓아내고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너희의 가족을 구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상방님!”
그리고 다음 날의 해가 밝자 염파가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토산에 올라 화살을 퍼붓고 성벽을 넘어라! 하도를 되찾고 야만인들에게 억압당한 백성들을 해방하는 거다!”
그러자 연나라군 출신 병사 25만 명은 무기를 높이 들고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며 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조선놈들을 몰아내자! 가족을 구출하자!”
그러나 기세 좋게 토산 꼭대기에 도착한 염파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뭐야 저거? 왜 성벽 위에 병사가 아니라 민간인이 올라와 있는 거야?”
“조선인들이 어째서 우리 연나라인의 옷을 입고 있는 거지?”
한부는 성벽 위에서 적군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구나!”
그는 조나라가 연나라 출신 병사들을 이용해 하북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조나라 원정을 떠났던 병사의 가족들에게 남편이나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득해 하도로 데리고 와 25만 대군의 사기를 꺾을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그 작전은 제대로 적중해 하늘을 찌를 듯하던 조나라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성벽 위의 민간인들은 토산 위의 병사 중 가족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현아! 우리 장남! 혹시 우리 하현이 거기 있니?!”
“장섭아! 장섭아! 거기 있으면 대답 좀 해봐라!”
그러자 성벽 위를 활로 겨누던 몇몇 조나라군 병사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무기를 손에서 놓고 중얼거렸다.
“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