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진나라의 농간
고조선이 겨우 넉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연나라를 정복하고 새로운 강대국을 급부상하고 조나라가 연나라 출신 유민 25만여 명을 받아들여 국력을 회복했다는 소식은 중원 대륙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기원전 3세기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를 크게 뒤흔들었고 덕분에 이제 고대 중국 여섯 나라의 수많은 위정자와 책사는 고조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이득인지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고대 중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유학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동이족이 전국칠웅의 일각을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초나라의 유력자인 춘신군의 추천으로 난릉이라는 지역의 수령으로 일하고 있던 순자는 진나라가 힘겹게 명맥을 이어오던 주나라 왕실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남서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포악한 진나라가 7년 전에는 서주(西周)를 멸하고 천자의 상징인 구정을 빼앗아 가다 강물에 빠트려서 잃어버리더니 올해에는 기어코 동주(東周)마저 멸망시켰구나. 어차피 이름뿐인 주 왕실이었지만, 왕도를 추구하던 주 무왕의 옛 영광을 생각하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건국되어 고대 중국의 하늘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과 봉건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나라로 유학자들은 전성기의 주 왕실을 왕도 정치의 이상향으로 여겼지만, 기원전 3세기에는 영향력이 거의 없어지고 일찍이 동주와 서주로 분단된 두 주나라 왕실이 서로 전쟁까지 벌이며 품위를 잃자 상징적인 권위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주나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멸망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진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자 킹메이커인 여불위이다.
기원전 249년 10월 초, 동주 정복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불위는 원정군과 전리품이 가득 담긴 수레 행렬을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을 타고 성문을 지나자 승상이 곧 함양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인 수백 명의 식객과 추종자가 대로 양옆에 늘어서서 두 손을 모아 읍했다.
“여 승상! 동주 원정의 성공을 감축드립니다!”
여불위는 승전을 축하하는 추종자들의 면면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말없이 오른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풍채 좋은 중년의 승상이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탄 채로 수많은 병사를 거느린 채 시내를 활보하는 그의 당당한 모습을 구경하면서 몇몇 백성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여 승상님께서 장년보다 더 위풍당당해지셨구먼. 저 정도면 범수가 상방 자리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권세가 대단해 보이지 않나? 분명 상방이 승상보다 높은 관직인데도 말이지.”
“그야 그럴 수밖에.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방계 왕족을 천금을 써서 왕위에 앉힌 게 바로 여 승상 아닌가? 그것도 볼모로 보내서 조나라 조정을 안심시킨 다음 바로 장평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떨거지 중의 떨거지 왕족을 말일세. 여 승상은 원래 한나라 출신의 대상(大商)이었다고 하니 상인이 권력을 돈으로 산 격이지.”
“쉿! 자네 미쳤나?! 그 말이 여 승상이나 왕의 귀에 들어가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여불위는 추종자들의 열화와 같은 축하를 받으며 함양의 궁궐에 도착하자마자 승전을 보고하기 위해 진나라 왕을 찾아갔다.
그는 내관과 함께 알현실에 들어서면서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의 앞으로 걸어가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승상 여불위, 어명에 따라 낙양을 점령해 동주를 멸하고 돌아왔나이다. 폐하.”
“참으로 큰 공을 세웠구려. 여 승상. 경의 활약으로 이제 천자의 영지를 차지했으니 머지않아 천하의 모든 백성이 우리 진나라의 신민이 될 날이 머지않았소.”
진나라 왕은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승상을 극찬했지만,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눈치 빠른 여불위는 금방 그 사실을 알아채고 왕에게 물었다.
“폐하. 이제 소신이 천자의 땅을 정복해 폐하께 바쳤고 몽오 장군 또한 얼마 전 한나라의 여러 성을 큰 피해 없이 점령했습니다. 이토록 경사스러운 날에 용안에 수심이 서려 있으니 마음속에 걱정을 품고 계신 듯합니다.”
“안색을 살핀 것만으로 짐의 심중을 읽다니. 역시 여 승상이구려. 사실 경이 함양을 떠나 있는 동안 연나라와 조나라에 큰일이 벌어졌소.”
“조선의 동이족이 연나라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유민 수십만 명이 조나라에 유입된 걸 걱정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허······. 낙양을 공략하는 와중에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오? 짐도 어제저녁에야 들은 소식이거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늘 귀 기울이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진나라는 지금의 진나라 왕인 장양왕의 할아버지 소양왕 시절부터 전국칠웅에 속한 모든 나라에 수많은 간첩을 심어 각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심지어 암암리에 적국의 내정에 간섭해왔다.
그 덕에 진라는 11년 전 장평대전이 벌어질 당시에도 재상 범수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장평을 굳게 지키고 있던 명장 염파를 모함하는 소문을 퍼트려 조나라 왕이 염파를 해임하고 졸장 조괄을 상장군으로 임명시키는 성과를 거두는 등 많은 이득을 보아왔다.
그리고 사실상 여불위가 최고 권력자 노릇을 하는 지금의 진나라에선 중원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진의 첩자들은 수집한 정보를 왕보다 먼저 승상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여불위는 낙양을 함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미 고조선과 조나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이제 조선의 동이족은 연나라의 옛 영토를 집어삼킨 데다 동쪽의 반도까지 전부 차지하고 있다 하니 북쪽의 흉노를 능가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중원 통일 최대의 걸림돌인 조나라도 장평대전 이후 급격히 약해진 국력을 적잖이 회복하게 되었으니 몇 년만 내버려 두어도 두 나라는 전성기의 제나라에 맞먹는 강적으로 성장하겠지요.”
“전성기의 제나라라니! 과거의 제나라는 소양왕께서도 진나라의 힘만으로 정벌하기 어렵다 여기시고 연, 한, 위, 조 네 나라와 동맹을 맺고 공격하셨을 만큼 강국이었지 않소? 그런 적이 둘이나 더 생긴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구려!”
“그뿐이 아닙니다. 폐하.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의 심어둔 간자의 말에 따르면 조선의 왕은 흉노나 조나라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만약 조나라가 조선의 뜻대로 동이족과 흉노를 끌어들여서 흉노의 수만 기병대가 북쪽의 국경을 어지럽힐 때 조나라와 동이족의 연합군이 함곡관을 넘으려 든다면 중원 통일은커녕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승상의 말을 듣고 보니 짐의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구려! 여 승상!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바로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가 조선과 동맹을 맺기 전에 공격하는 게 좋지 않겠소?”
“폐하. 올해는 계절이 곧 겨울에 접어드는 데다 조나라 왕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염파에게 병부와 봉토를 하사하고 신평군이라 부르며 중히 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진나라 제일의 명장인 몽오는 분명 유능하지만 염파를 당해 내기는 어렵고 병사들도 동주와 한나라를 정벌하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지금은 힘이 아닌 계책으로 두 강적의 세력을 약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계책이라······. 승상. 이미 대책을 생각해둔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폐하. 조나라와 조선의 사이를 이간질해 서로 싸우며 국력을 허비하게 하면 어떠실는지요?”
“이간계라······. 조선에도 이미 동이족의 말을 할 줄 아는 간자가 암약하고 있소?”
“안타깝게도 아직 조선의 말을 할 줄 아는 인물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1년 전 장평대전 때처럼 우매한 조나라 왕을 현혹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조나라에 동이족이 흉노와 손을 잡고 조나라 땅을 침범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면 조나라 왕은 분명 겁을 집어먹고 먼저 조선을 공격하려 들 테니 말입니다.”
조나라와 연나라는 전국칠웅 중 흉노의 침략에 가장 많이 시달린 나라이다.
그 둘 중 연나라는 특히 고조선 정벌에 성공하기 전까지 고조선과 흉노가 연합하여 중원 대륙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늘 두려워했는데 이제 조나라도 그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불위는 그런 조나라의 사정을 이용해 고조선과 조나라 두 마리의 맹수에게 싸움을 붙일 계략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진나라 왕은 체통도 잊고 두 손으로 무릎을 치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옳거니! 역시 여 승상은 짐의 꾀주머니요! 그런 소문이라면 짐이 조나라 왕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겠구려! 재물은 얼마가 들어도 관계없으니 서둘러 그 이간계를 시작하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알현을 마친 후 여불위는 궁궐 밖으로 나와서 수많은 시종과 함께 어지간한 왕궁보다 으리으리한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가 저택의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허름한 옷을 입고 턱에 흰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여불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바가지 하나를 내밀면서 말을 걸었다.
“나리. 이 불쌍한 늙은이를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누가 이 거지에게 잡곡 한 바가지를 내줘라.”
“잡곡보다는 금붙이가 좋습니다.”
한낱 거지가 진나라의 승상을 상대로 무례한 장난을 쳤지만, 여불위는 노인에게 화를 내는 대신 담담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들어와라.”
여불위는 노인과 함께 단둘이 저택 안에 있는 창문이 없는 밀실에 들어갔다.
시종이 밖에서 방문을 닫자마자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여불위에게 보고했다.
“승상. 분부하신 대로 한단의 간자 203명이 보름 전부터 동이족이 흉노와 손을 잡고 한단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여불위는 그 말을 듣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쯤 조나라의 머저리 왕이 조선을 정벌하자면서 부화뇌동하고 있겠군. 염파 그 늙은이가 연나라군을 무찌른 공으로 상방이 돼서 한동안 기분이 좋았을 텐데. 지금쯤은 속이 타들어 가겠구먼.”
* * *
여불위가 자기 집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예측대로 조나라 왕은 염파를 궁궐로 불러서 조선 정벌을 명했다.
“신평군. 요즘 온 나라에 연나라를 멸한 조선이 이제 흉노와 손을 잡고 우리 조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마침 연나라에서 많은 장수와 병사가 망명해 왔으니 당장 이들을 이끌고 출진해 계를 함락시키시오.”
“폐하! 아직 조선의 군대가 북쪽의 국경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조선의 왕은 사신과 선물을 한단으로 보내며 우리 조나라와 화친을 맺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무슨 연유로 적국을 늘리려 하십니까?”
“경은 지난날의 교훈을 잊었소? 진나라 소양왕은 태자의 아들을 한단에 볼모로 보내 짐을 안심시켜놓고서는 백기에게 대군을 맡겨서 장평을 공격하지 않았소? 조선의 왕도 그와 같은 책략을 부리는 건지도 모를 일이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폐하의 말씀이 맞는다고 해도 조선의 왕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점령지를 다스리는 데 힘 쏟느라 전쟁을 벌이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야만인들이 충분한 방비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말자는 뜻이오.”
“우리 조나라도 지난날 수십만 장정이 죽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해서 황폐해진 농지가 적지 않습니다. 폐하 지금은 연나라의 망명자들에게 빈 땅을 줘서 일구게 하여 국력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시끄럽소! 신평군! 아무래도 나이를 먹더니 겁이 많아진 모양이구려! 동이족들이 하북의 방어를 굳히기 전에 하루라도 먼저 비옥한 농경지를 빼앗으면 그만큼 국력을 빨리 기를 수 있을 것 아니오! 경이 끝까지 원정에 반대하면 이번에 연나라에서 망명한 악승을 장군으로 삼아서 조선을 치겠소!”
염파는 조나라 왕의 말을 듣자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명장 악의의 혈족이라서 실력도 모르는 장수에게 병부를 주겠다는 건가? 폐하께서는 아직도 장평대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셨구나! 그때도 나를 해임하고 명장 조사의 아들 조괄을 상장군으로 삼았다가 그 사달을 내놓고선! 실력을 모르는 장수에게 병부를 넘겨야 기껏 얻은 병사를 잃지 않겠다.’
염파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조나라 왕에게 읍하면서 대답했다.
“상방 염파. 어명을 받들어 조선을 정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