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예상밖의 나비효과
계를 점령한 다음 날, 한부는 가장 먼저 포로로 잡은 연나라 왕족
전원을 궁궐의 정원에 집합시킨 다음 기병대장 석에게 지시했다.
“이 포로들을 왕검성으로 데려가라. 왕검께서 내가 쓴 서신을 읽으시면 아마 폐주 희를 벽지의 작은 마을을 관리하는 백호의 장으로 봉하실 거다. 그리고 연나라 왕족을 부임지로 데리고 가는 임무는 비왕에게 맡기고 너는 바로 다시 계로 돌아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계를 떠나기 전에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어서 말해보려므나.”
“전하께서 망한 연나라 왕족을 굳이 살려두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소장이 아는 전하는 그저 복수심 때문에 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실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석아! 너도 이제 눈치가 점점 늘어가는구나! 폐주에게 굴욕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 연나라 태자 희단을 붙잡지 못한 게 걱정돼서 연나라 왕족들을 볼모로 붙잡아 두려는 거다.”
“태자 단은 겨우 시종 몇 명만 데리고 진나라에 볼모로 붙잡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희단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아직 진나라가 연나라를 정복한 우리 조선을 이용하려 할지 제거하려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제거하려고 든다면 분명 희단을 충동질해서 대륙인이 많이 사는 하북이나 요서에서 연나라 부흥을 기치로 걸고 반란군을 모으도록 유도할 거다.”
“그렇군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연나라 왕족은 희단 한 명을 견제하기 위한 볼모인 셈이군요!”
“그렇지. 온 가족이 전부 반도로 이주했으니 희단도 혼자 대륙에 남아서 반란군을 모으기보단 조선반도에 와서 부모 품에 안기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열 살이 조금 넘었다고 하니 아마 그렇겠지요. 그런 어린아이까지 놓치지 않고 경계하시다니······. 전하의 주도면밀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당연한 조치를 했을 뿐이다. 희단은 아직은 어리지만 아비하고는 다르게 담대하고 결단력이 강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 이 정도 조치는 해 둬야 후환이 없을 테지.”
연나라 태자 단은 원역사에서 진나라에 볼모로 있다고 자력으로 함양을 탈출해서 연나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은밀하게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 형가를 고용해 볼모 생활 도중 자신을 홀대한 진시황 암살하려 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한부는 집념과 복수심이 남다른 희단이 모든 것을 다 잃고 한열 왕검이나 자기를 죽이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암부에 진나라 조정 몰래 희단을 왕검성으로 데려오라고 해야겠다. 아무리 독한 놈이라도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일 때는 엄마 만나게 해주겠다고 꼬시면 순순히 따라오겠지.’
그렇게 연나라 왕족의 반란을 예방할 대책을 세운 후 한부는 갑작스럽게 연나라가 망해서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고 주변국과 좋은 관계를 다질 방법을 찾기 위해서 무명과 극신을 계의 궁궐로 불렀다.
연나라 왕족이 기병대장 석과 함께 계를 떠난 다음 날 아침, 두 노장은 궁궐의 알현실로 들어와서 옥좌에 앉아있는 한부의 앞으로 다가와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상장군 무명이 전하를 뵙습니다.”
“장군 극신이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무명 상장군. 그리고 극신 장군. 경들에게 쉴 틈을 주지 못하고 동이 트자마자 불러서 미안하구려.”
그 말에 무명이 먼저 대답했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전하. 아직 만만치 곳곳에 만만치 않은 적군이 도사리고 있는데 장수 된 자로서 어찌 편히 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만찮은 적이라면 연나라의 상방이었던 율복과 경진이 데리고 간 30만 대군을 말하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런 무능한 자들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게다가 조나라 원정군은 이제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도 끊겼으니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겁니다. 하지만 그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염파가 하북의 여러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겠지요.”
“음······. 일리 있는 말이구려. 우리가 계를 점령했다고는 해도 아직 옛 연나라 영토 최남단은 전부 정복하지 못했으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연나라 왕실이 임명한 하북의 여러 성주는 이제 조선과 조나라 중 어느 나라에 고개를 숙일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겠지요. 기껏 연나라를 멸해놓고 비옥한 하북의 농경지를 조나라에 넘겨준다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에게 준 꼴이 될 겁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극신도 입을 열었다.
“흉노가 어떻게 움직일지도 걱정입니다. 전하. 소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 흉노의 기병대가 북서쪽의 국경을 넘고 남쪽에서는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군이 쳐들어오면 하북은 물론이고 요서마저 잃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구려. 저번 난하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병사를 전부 풀어주겠소. 극신 장군은 그 병사들을 데리고 옛 부임지로 돌아가서 흉노의 침략을 막아주시오. 다만 흉노와는 앞으로 동맹을 맺을 생각이니 이전보다는 회유책을 자주 사용하는 게 좋겠소.”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극신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다시 상장군 무명에게 말했다.
“그리고 상장군은 병사 6만 명을 이끌고 염파의 조나라군이 율복과 경진이 이끄는 군대에 발목이 잡혀있는 사이에 하북의 옛 연나라 영토를 점령해 주시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점령한 지역의 통치도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어제 왕검성에 서신을 보냈으니 곧 왕검께서 지방관과 치안유지군을 하북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보내서 다스리도록 하실 거요. 그리고 계와 하북은 한동안 남은 병사 2만 5천 명으로 치안을 유지하면서 본인이 직접 다스려야겠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그리고 엄정한 법령을 제정하고 반포하고 불경한 무리를 엄히 벌하면 옛 연나라의 백성들이 감히 조선 왕실에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음······. 법가의 나라에서 한평생을 보낸 장수다운 제안이구려. 물론 잘 정비된 법령도 필요하겠지만,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안심시켜야 점령지를 순탄하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오. 상장군, 극신 장군.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반나절 안에 계의 백성 중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17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병영에 모아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두 노장은 한부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후 궁궐 밖으로 나가서 계의 고조선군 병사들에게 태자의 명을 전했다.
“태자 전하의 명이다! 계의 백성 중 사지가 멀쩡한 성인 남자를 모두 병영의 연병장에 집합시켜라!”
“반나절 안에 작업을 마쳐라! 명령에 따르지 않으려는 자는 강제로 끌고 와라!”
두 장군이 엄명을 내리자 고조선군 병사들은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성인 남자들을 병영으로 데리고 갔다.
계의 백성들은 가족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줄 알고 병사들과 함께 병영으로 향하는 남편과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어제는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하더니 오늘은 온 나라의 장정이 전쟁터로 끌려가는구나!”
“옥황상제 시여! 제발 잔악한 동이족
야만인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소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병영에 끌려온 수만 명의 장정은 절망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형님. 이제 다 끝나버렸구먼요. 조선놈들이 이번엔 조나라나 제나라에 쳐들어가려고 온 나라의 장정을 전쟁터로 내몰 생각인가 봅니다······.”
“아우.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기회를 봐서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에 탈영하세.”
그때, 연병장의 단상 위에 검은 갑옷을 입은 한부가 마치 형장에 선 사형수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장정들을 바라보면서 고대 중국어로 외쳤다.
“조선의 태자 한부가 계의 백성에게 전한다! 우리 조선은 수십 년 전 연나라의 장수 진개에게 2천 리 땅을 빼앗기고 선대 왕검께서 전쟁통에 돌아가신 원한을 갚기 위해 연나라를 멸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주이신 왕검께서는 본인에게 옛 연나라의 왕족만을 벌하고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에게는 자비를 베풀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앞으로 두 해 동안 모든 세금을 면할 것이다! 그동안 전란에 황폐해진 밭을 다시 일구어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을 먹이도록 해라!”
태자가 연설을 마치자 사지로 끌려갈 줄로만 알고 있었던 장정들은 기뻐 날뛰면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살았다! 우리 전쟁터에 안 끌려간다!”
“내년까지 세금 걱정 안 해도 되는구나! 조선 만세! 왕검 폐하 만세!”
한부는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아······. 이게 바로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것이다.”
* * *
조선 태자가 파격적인 면세 정책을 시행한다는 소식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순식간에 옛 연나라 영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면세 정책이 좋은 반응을 보이자 한부는 연나라 조정이 조나라 원정군 30만 명을 몇 년 동안 먹이려고 모아둔 엄청난 양의 군량을 아낌없이 풀어서 추수철을 앞두고 먹을 것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싼 이자로 빌려주는 정책도 추가로 시행했다.
그러자 아직 고조선군이 점령하지 못한 옛 연나라 지역의 백성들이 농민봉기를 일으켜 성주를 쫓아내고 고조선군을 시내로 들이는 일이 자주 생겼다.
암군 희왕의 형편없는 정치에 지친 옛 연나라 백성들에게 한부가 시행한 복지정책이 큰 자극을 준 것이다.
덕분에 고조선은 기원전 249년 8월 중순에 옛 연나라 영토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조나라 원정군을 이끌고 있는 연나라의 상방이었던 율복에게도 전해졌다.
율복은 고조선군이 점령하기 전에 계 근처를 다스리는 마을의 지방관리가 보낸 서신을 읽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죽간을 손에서 떨어트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이냐······. 우리가 조나라 국경을 넘은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동이족
야만인들이 연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다니······. 그렇지 않아도 조나라군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로구나!”
그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염파가 이끄는 15만 대군과 한차례 전투를 벌여 이미 약 5만 명이나 되는 병사와 전차 2천 승을 잃고 경진의 10만 대군과 합류해 염파와 다시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진은 율복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조나라의 다른 장수가 이끄는 군대에 발목이 붙잡혀 버리는 바람에 조나라 원정군은 명장 염파의 거침없는 공세에 각개격파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본국이 멸망하고 후방에서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버리는 바람에 율복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말았다.
“군대를 돌려서 계를 탈환해야 하나? 아니지. 조나라군이 우리를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염파를 뒤에 남겨두고 군대를 물리는 건 굶주린 호랑이에게 등을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다른 장수들을 지휘관 막사로 불러서 한참 동안 회의한 끝에 염파에게 항복하기로 마음먹고 몇몇 호위병만 데리고 조나라군 진영에 찾아갔다.
조나라군의 초병들은 갑옷 대신 연나라의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말을 타고 주둔지로 다가오자 창을 들이밀면서 소리쳤다.
“멈춰라!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사살하겠다!”
“신평군께 연나라의 상방 율복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고 전해라.”
조나라군 병사들은 신평군이 염파의 봉호(封號)임을 알고 있었기에 율복의 말을 즉시 지휘관 막사에 있는 장군에게 알렸다.
잠시 후 염파의 명을 받은 병사가 율복에게 돌아와서 그를 지휘관 막사로 안내했다.
율복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염파가 그를 보고 귀청이 떨어질 듯한 고함을 질렀다.
“이웃의 불행을 기회 삼아 남의 집 담장을 넘은 도적놈이 무슨 낯으로 날 만나러 왔느냐!”
율복은 사자의 포효 같은 염파의 외침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면서 그를 바라보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자가 정말로 여든 살에 가까운 노장이란 말인가? 참으로 무시무시한 위압감이구나!’
그는 살기등등한 날카로운 눈매와 아직 환갑도 안돼 보이는 동안, 그리고 8척 장신에 갑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터질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77세의 노장과 눈이 마주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율복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염파가 다시 호통쳤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네 목을 쳐서 한단에 계신 왕께 바치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율복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항복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병사들과 함께 조나라에 망명하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경진 장군을 만나서 신평군께 항복하도록 설득하지요.”
“뭐라? 무슨 꿍꿍이로 그따위 허언을 본인 앞에서 지껄이는 거냐?”
“진심입니다. 신평군. 얼마 전에 조선의 동이족이 계를 점령하고 연나라 영토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여봐라! 당장 이자를 끌어내서 목을 쳐라!”
“정말입니다! 신평군! 정녕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북쪽으로 정찰병을 보내서 진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고도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기시면 그때 기꺼이 목을 바치겠습니다!”
염파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율복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연나라가 망했나 보군. 하긴, 날 속일 생각이면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준비해 왔겠지.하늘이 우리 조나라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노장은 뜻밖의 행운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나라는 11년 전 장평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군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장정을 잃어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나라의 병사 25만 명이 조나라에 귀순하고 몇 년 동안 국력을 기르면 조나라가 다시 예전의 위세를 되찾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염파는 조금 전의 고압적인 태도가 무색할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율복을 다독였다.
“한순간에 나라를 잃었으니 참으로 상심이 크겠구려. 경진 장군이 침략을 멈추고 조나라에 귀순하도록 설득해 주신다면 두 분의 사정을 대왕께 잘 설명해 드리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평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