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계략으로 계를 공략하다. (4)
“전군 북문을 공격하라! 성문을 열어젖히고 조선군에 합류하자!”
극신의 외침이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 번져나가자 1천 명이 넘는 병사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계의 북문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집에서 잠을 자던 계의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는 고조선군이 이미 성문을 돌파한 것으로 착각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으아아악! 여보! 여보! 야만인 도적 떼가 거리에서 날뛰고 있어요!”
“이게 무슨 일이! 얼른 애들 챙겨서 도시 밖으로 도망칩시다!”
겁먹은 백성들은 손에 집히는 귀중품만 급하게 챙겨서 거리로 쏟아져나와 반란군이 몰려가는 북문을 제외한 성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 혼란을 틈타 고조선 암부의 요원 열 명은 극신의 반란군보다 조금 먼저 계의 북문 근처에 도착해 성벽 너머로 명적을 달아놓은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열 개의 화살이 힘차게 공중을 솟구치자 짐승의 뼈나 나무로 만든 명적의 구멍 속에 공기가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피리와 비슷한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펴졌다.
- 삐리리리리리리리!
한부는 기다리던 신호음 귓가를 스치자마자 곁에 있는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각 군단에 궁수와 노궁수, 그리고 돌팔매꾼 부대에 북문의 성벽 위에 화살과 납탄을 퍼부으라고 전해라. 보병 부대는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하는 시늉만 하다가 성문이 열리면 그때 한꺼번에 시내로 돌격한다. 그리고 극신을 만나면 해치지 말고 내게 데려오도록.”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태자의 명이 각 군단에 전해 전해지자 고조선군 장수들과 8만 명이 조금 넘는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납탄을 던지면서 북문을 지키는 적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공격! 동이 트기 전에 북문을 돌파한다!”
“가장 먼저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사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계의 수비병들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포막 뒤에 숨어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고 성벽에 설치한 커다란 쇠뇌에 화살을 장전하면서 전우들에게 소리쳤다.
“적군의 야습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겁먹지 마라! 조나라 원정군이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우리의 승리다!”
그렇게 북문을 지키는 연나라군 병사들이 대부분 성벽 위에 올라가 고조선군 진영을 주시하고 있는 사이에 극신과 그가 이끄는 반란군들은 성문을 관리하는 수비병들을 습격했다.
“마침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별로 없다! 한꺼번에 몰아쳐라!”
그곳의 연나라군 병사들은 충차의 공격에 대비해 성문 뒤에 통나무 따위로 지지대를 세우다가 극신의 외침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비명과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악! 적군이 벌써 시내에 들어왔잖아!”
“얼른 성벽 위에 있는 아군을 불러와! 성문이 열리면 끝장이다!”
계의 북문을 지키던 몇몇 연나라군 병사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가서 지원군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극신의 반란군 1천여 명은 순식간에 성문을 장악하고 빗장을 푼 다음 힘껏 밀었다.
마침내 거대한 성문이 열렸고 상장군 무명은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 시내의 적군을 섬멸하고 연나라 왕을 포획하라!”
상장군의 명이 떨어지자 고조선군 병사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서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활짝 열린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선조의 원한을 갚아주자!”
성벽 위를 지키던 계의 수비대장은 갑자기 성문이 열린 것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치면서 북문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적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다시 성문을 닫아야 한다! 모두 성벽 아래로 내려와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던 연나라군 병사들은 수비대장의 말을 듣고 활을 내려놓고 대신 검과 창을 손에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극신은 성벽 위에서 연나라군 병사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좁은 계단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외쳤다.
“저놈들이 성문을 닫지 못하게 막아라! 조선군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으니 이제 1촌각(약 1분 30초)만 버티면 우리의 승리다!”
“알겠습니다! 상장군님!”
반란군 병사들은 극신의 명에 따라 성벽의 계단 쪽으로 달려가서 쇠스랑이나 성문을 지키던 적군에게서 빼앗은 창을 꼬나 들고 연나라군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계의 수비병들은 제때 성벽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고 물밀 듯이 성안으로 밀고 들어온 고조선군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진압되고 말았다.
극신은 북문 쪽의 상황이 종료되자 손에서 무기를 놓고 고조선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당찬 목소리로 외쳤다.
“난 며칠 전 조선의 태자께서 풀어주셨던 극신이다!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 태자 전하를 뵙게 해다오!”
고조선군의 장수들은 어젯밤 한부에게 극신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즉시 그를 태자에게 안내했다.
극신은 한부가 다른 고조선군 장수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그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전하. 일전에 소장에게 하셨던 제안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기꺼이 전하와 함께 전장에 서겠나이다!”
한부는 극신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일부러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란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
“극신 공.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소? 겨우 며칠 전에는 연나라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본인의 곁은 떠나지 않았소?”
“역사에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 피치 못할 선택을 했습니다. 연나라 왕은 오랜 세월 동안 연나라 왕실에 충성을 바쳐온 소장을 비겁자 취급하며 무인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소장의 능력이 부족해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투에서 패한 벌이라면 목숨이 아깝지 않으나, 온 힘을 다해 전장에서 싸운 무장에게 어떻게 그런 대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흠······. 그대 정도의 장수를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헌신짝처럼 버리려 하다니. 연나라 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만하구려. 좋소. 왕검 폐하께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면 기꺼이 그대를 조선의 장수로 임명하겠소.”
“참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와 조선 왕실의 번영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오. 극신 장군. 경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선은 연나라 왕과 왕족들을 먼저 포획해야 할 것이오. 연나라 왕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성으로 도망가서 훗날을 도모하면서 주변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요.”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과거 연나라도 성 두 개만 남기고 제나라의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았지만, 적장 전단의 전략에 넘어가면서 한순간에 모든 점령지를 잃었지요. 연나라 왕은 반드시 이곳 계에서 처단하셔야 합니다.”
“그자는 인질로서 가치가 있으니 되도록 죽이지 말고 생포할 생각이오. 경에게 말 한 필을 내줄 테니 어서 기병대를 궁궐로 안내해 주시오. 조선의 장수들은 계의 지리를 잘 모르니 시내를 마구잡이로 수색하다가는 연나라 왕이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오.”
“조선의 장군 극신!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극신의 대답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가 타고 있는 덩치 큰 인도산 갈색 명마와 마상창 한 자루를 내주었다.
극신은 태자가 애마를 넘겨주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 등위 오른 다음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석에게 말했다.
“자네가 기병대장인가? 어서 본인을 따라오너라! 궁궐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겠다!”
석은 통역사에게 극신의 말을 듣고 노장과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극신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면서 대로를 말을 달렸고 그 뒤를 고조선군의 기병 1천 기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따라 달렸다.
한편 극신과 고조선군 기병대가 막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궁궐에 있던 연나라 왕은 그제야 성문이 뚫렸다는 사실을 알고 소식을 전한 내관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어떻게 동이족
야만인들은 등에 날개라도 달려 있단 말이야?! 그 높은 성벽을 며칠 만에 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폐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우선 계를 버리고 조나라의 국경에서 가까운 성으로 도망치시지요! 그곳에서 상방의 군대가 돌아오길 기다리시면서 훗날을 도모하셔야 연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습니다!”
“후······. 네 말이 맞다. 계는 거리가 미로처럼 복잡하니 바로 남문 쪽으로 가면 야만인들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기 전에 탈출할 수 있을 거다. 지금 당장 궁궐을 나설 테니 근위병을 불러와라!”
“그전에 왕후와 왕자들에게도 피난을 떠나라고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놈! 부인은 또 얻으면 되고 자식도 또 낳으면 되지 않느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식인 태자는 진나라에 가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게냐? 잔말 말고 짐을 호위할 근위병이나 불러와라!”
“아······ 알겠습니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연나라 왕은 원역사에서 태자 단의 목을 베어서 진시황에게 바치며 목숨을 구걸했듯이 1초라도 빨리 계를 탈출하려고 가족을 버리고 왕실 근위병 수십 명과 함께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연나라 왕이 막 궁궐의 대문을 나서는 순간, 기병대와 함께 근처에 도착한 극신이 그를 알아보고서는 고막을 찢을 듯한 노성을 질렀다.
“폭군 희가 제 한 목숨을 지키려고 쥐새끼처럼 홀로 도망치는구나! 목숨이 아까우면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연나라 왕은 극신이 거대한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기세등등하게 달려오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면서 근위병들에게 소리쳤다.
“흐어어어!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늙은 역적을 처치해라!”
그러나 근위병들은 극신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고조선군 기병 1천 기를 보고 겁을 먹고 왕을 버리고 대로변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연나라 왕은 도망치는 호위병들을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구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 불경한 놈들! 천하에 왕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실 근위병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극신은 그런 연나라 왕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의 목에 창날을 가져다 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처자식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아비가 피도 안 섞인 병사들에게 뭘 바라는 거냐? 추태는 그만 부리고 마지막에라도 제왕다운 모습을 보여봐라.”
“흐윽! 크흐윽! 8백 년을 이어온 연나라의 종묘사직을 이렇게 허망하게 동이족
야만인에게 빼앗기다니!”
연나라 왕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울부짖다가 품속에 감춰둔 비수를 꺼내서 목을 찔러 자결하려다가 달빛에 반짝이는 칼날을 보고 겁을 먹고는 칼자루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 챙강!
젊은 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아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극신은 그 모습을 한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동안 이런 놈을 위해서 사나운 흉노족과 부대끼면서 몇 년을 보냈단 말인가······. 연나라에 충성을 바쳤던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지는 구나.”
그렇게 태자가 이끄는 고조선군은 인구가 20만 명에 가까운 연나라의 수도 계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했고 시내에 있던 거의 모든 왕족과 대신들을 사로잡았다.
날이 밝자 한부는 계의 궁궐 옥좌에 앉아서 장수들과 함께 밧줄에 묶인 채로 알현실 바닥에 꿇어앉아 이는 연나라 왕과 왕족들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했다.
제일 먼저 철가면을 쓴 상장군 무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정복한 나라의 왕족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으면 반란의 씨앗이 되기 마련이니 인정을 두지 마십시오. 부디 연나라의 왕족
전원에게 사약을 내리시옵소서.”
반면 극신은 섬기던 왕족이 전부 죽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무명의 의견에 반대했다.
“연나라 왕족을 전부 죽이면 앞으로 조선이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 그 나라의 왕은 항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죽기 살기로 항전할 겁니다. 부디 폐주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왕족은 벽지로 귀양을 보내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심이 어떨는지요?”
한부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폐주에게 자기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주는 게 좋겠소. 희는 고개를 들고 내 물음에 답하라.”
한부가 묻자 옥좌에서 쫓겨난 희가 힘없이 고개를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전하.”
“과거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했을 때 오왕 부차에게 백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했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본인도 너에게 같은 제안을 하지. 조선 반도의 남쪽에는 본인이 ‘해남’이라고 이름 붙인 땅끝마을이 있다. 네 가솔을 전부 데리고 그 마을에 가서 백호의 장이 된다면 죽지 않아도 될 것이야. 자 골라봐라. 왕으로서 죽겠느냐? 아니면 백호의 장으로서 여생을 보내겠느냐?”
백호의 장은 문자 그대로 1백 가구를 관리하는 최하급 지방관리로 현대로 치면 동네 이장쯤 되는 관직이다.
과거의 오왕 부차는 이 굴욕적인 제안을 받고 자결하여 명예를 지켰지만, 연나라의 마지막 왕 희왕의 결정은 달랐다.
“전하의 자비로운 처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