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계략으로 계를 공략하다. (3)
어명이 떨어지자마자 극신은 미늘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연나라 왕실 근위병들에게 체포되어 알현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와 함께 고조선군 주둔지에서 풀려난 연나라군 장수 세 명은 궁궐의 입구에서 극신을 기다리다가 병사 서른 명이 방금 입궐한 상장군을 밧줄로 묶어서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앞을 가로막으면서 소리쳤다.
“사······ 상장군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놈들아! 상장군님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다고 이러는 거냐!”
극신은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부하들을 볼 낯이 없어 고개를 숙인 노장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온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미안하다.”
“상장군님! 대체 궁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십시오!”
다섯 명의 장수가 계속 길을 막으면서 극신이 끌려가는 이유를 물어대자 병사 중 최선임자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대왕께서 적군을 눈앞의 적에게 겁을 먹고 싸우기는커녕 등을 보이고 도망친 죄를 물어 죄인 극신에게 참수형을 선고하셨다. 네 놈들보다 먼저 계에 도착한 수많은 패잔병이 같은 증언을 했지. 너희도 죄인 극신과 함께 머리 없는 귀신이 되고 싶지 않다면 썩 길을 비켜라!”
왕실 근위병들은 창날까지 들이대며 앞길을 막는 연나라 장수들을 몰아냈고 극신의 부하 장수들은 뒷걸음질로 물러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건 모함이다! 내가 상장군님을 모신지 벌써 10년 이 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하들과 적군에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 번 전투에서 패했다고 어찌 한 나라의 상장군을 이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이냐!”
“다 같이 폐하를 알현합시다! 대왕께 직접 상장군님께서 결백하시다는 걸 말씀드려야 하오!”
극신을 따르는 세 장수는 의기투합하여 궁궐을 향해 다가갔지만, 초병들이 창대로 입구를 막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만, 대왕께서 상장군과 친분이 있는 자는 입궐을 금한다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세 장수는 멍한 표정으로 초병의 얼굴과 끌려가는 극신의 뒷모습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은 궁궐에서 거리가 멀어지자 서로에게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천하에 적군이 도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상장군을 참수하겠다니! 천하의 모든 백성이 우리나라를 비웃겠구려!”
“답답합니다! 너무나 답답해요! 수백 년을 지켜온 종묘사직이 동이족들에게 넘어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극신을 따르는 장수들의 곁을 지나던 한 허름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그들의 말을 듣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상장군께서 참수당하시다니요!”
“어허! 너는 뭐 하는 놈이기에 천한 것이 감히 귀족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관님. 소인은 며칠 전 난하에서 우리 군이 참패한 후 간신히 적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계로 돌아온 병사 중 한 명입니다.”
“뭐라고?! 너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우리를 따라오너라!”
“네?!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십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너라!”
극신을 따르는 장수들은 평민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아 계로 도망친 병사 중에서 감히 왕을 알현하면서 상장군께서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며 모함한 자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혹시 너도 그중 한 명이냐? 솔직히 대답하지 않으면 이 골목에서 성한 다리로 걸어나가지 못할 거다!”
“아······ 아닙니다! 무관님! 소인을 절대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그런 발칙한 짓을 했단 말이냐?! 아는 것을 모두 말해봐라!”
“무관님! 소인이 알기로 계로 도망친 병사 중에서는 대왕 폐하 앞에서 상장군님의 험담을 입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왕께서 너희 패잔병 중 적지 않은 수가 상장군을 모함했다고 들었다!”
“그런다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희 같은 평민이 뭐하러 상장군을 모함하겠습니까? 오히려 북방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오신 상장군을 시기해온 귀족이나 벼슬아치의 끄나풀이 그런 일을 벌였다고 보는 게 더 그럴싸하지 않겠습니까?”
장수들은 그의 말을 듣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젊은 남자를 골목 밖으로 쫓아낸 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을까? 계의 궁궐에는 무관인 상장군님께서 언젠가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르실지도 모른다면서 경계하는 문관이 한두 명이 아니었어.”
“그럼 고작 권력다툼을 하느라 상장군님을 음해한 난신적자들이 궁궐에 득실거리고 있단 말이요?”
“아니······. 어쩌면 그 속 좁고 시기심 많은 왕이 민심을 얻은 상장군님을 이번 기회에 제거하려는 건지도 모르오.”
“설마!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치졸한 짓을 하겠소?!”
“조나라를 정벌하러 간 30만 대군만 돌아오면 10만 명도 안 되는 동이족의 군대 따위는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허······! 그 전에 계가 함락되기라도 하면 대체 어찌하려고!”
“여기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오. 무능하고 부패한 연나라 왕실 따위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극신 상장군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오.”
“계로 도망쳐온 패잔병 중에는 여전히 상장군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장수와 병사들이 많이 있소. 그들과 힘을 합쳐 처형이 시작되기 전에 상장군님을 구출합시다.”
“그 말은 지금 난을 일으키자는 말이오?!”
“우매한 왕이 옥좌를 차지하고 있으니 어차피 곧 망할 나라이지 않소? 게다가 상장군께서 돌아가시면 그분의 측근이 우리의 목도 무사하진 못할 거요.”
“후······ . 까짓 거 전광 공의 말대로 해봅시다! 가만히 있다 죽느니 살길을 찾아서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게 나을 거요!”
세 장수는 극신을 탈옥시키기로 의기투합하고 서둘러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허름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는 급하게 어디론가 걸어가는 세 장수의 뒷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의 발걸음이 다급한 걸 보니 미끼를 물은 모양이구나. 성벽 밖에 계신 태자께서 기뻐하겠구먼.”
계에 잠입한 고조선의 암부 요원들은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자 연나라군 병사들 몰래 반간계 진행 경과를 적은 작은 한지 조각을 화살 몇 개에 묶어서 활시위에 걸고 성벽 너머에 있는 고조선군 진영을 향해서 쏘았다.
태자의 명령에 따라 망루 위에서 횃불을 밝혀 성벽 주변을 주시하고 있던 고조선군 초병들은 성안에서 날아와 나무 울타리에 박힌 화살을 발견하고는 화살에 묶여있는 쪽지를 지휘관 막사에 있는 태자에게 가져다주었다.
고조선군 장수들과 대화를 나누던 한부는 막사에 찾아온 병사에게 종이쪽지를 받아서 읽어보고는 기쁜 목소리로 무명에게 말했다.
“상장군! 기뻐하시오. 성안의 요원들이 반간계에 성공했소!
“연나라 왕이 기어코 극신에게 엄벌을 내린 모양이군요.”
“엄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일 낮에 저잣거리에서 목을 벤다고 하오.”
“허허······.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장은 이번 작전이 성공하기 어려울 거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설마 연나라 왕이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군요. 전하께서는 연나라 왕의 성격에 관한 정보까지 이미 모아두셨던 모양입니다.”
“뭐······. 그렇소. 다 암부의 요원들이 활약해준 덕분이라오.”
무명에게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한부는 원역사의 사료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연나라 왕의 성격과 능력을 유추해냈다.
‘희왕은 끝까지 진나라의 진짜 목적이 중원통일이란 걸 눈치 못 채고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자기 장남 목을 잘라서 진나라에 바친 놈이잖아. 나이 먹고 정치 경험이 쌓였을 때도 그 정도로 멍청했는데 젊었을 때는 오죽했겠어? 이제 극신이 생각대로만 움직여주면 이번 원정도 무사히 끝나겠구나.’
* * *
기원전 249년 6월 15일 새벽, 극신은 목에 사형수용의 무거운 칼을 찬 채로 감옥의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서 허망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죽음을 겨우 몇 시간 앞둔 상황이니 지난 60여 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만도 하건만, 극신은 오직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일만을 떠올리면서 밤새도록 한탄했다.
“북방의 호랑이라 불리던 내 최후가 이토록 초라하단 말이냐······.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극신을 비겁자라고 기록할까 봐 편히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이럴 바에는 차라리 조선군에 투항하는 편이 나을 뻔 했어!”
극신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슴속을 가득 메운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을 때, 갑자기 옥 밖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반역이다! 반역자들이 감옥을 공격한다!”
“와아아아아! 극신 상장군을 구출하라!”
옥을 지키던 병사들은 새벽에 2백 명이 넘는 무장한 반란군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당황한 나머지 무기를 휘둘러보기도 전에 제압당하기 시작했다.
극신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면서 목에 쓴 무거운 칼을 들고 힘겹게 일어나서 옥의 입구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나를 구하겠다고 반역을 일으켰단 말인가? 휘하의 병사는 대부분 적의 포로가 됐는데?!”
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굵은 나무로 만든 창살 밖을 내다보자 때마침 구출 작전을 지휘하는 세 장수가 그곳에 도착해 반가운 목소리로 극신에게 말했다.
“상장군! 무사하셨군요!”
“망할 것들이 상장군께 이렇게 큰 칼을 씌워놓다니! 금방 풀어 드리겠습니다!”
“누가 여기 도끼를 가져와라! 옥문의 자물쇠를 부숴야 한다!”
극신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하 장수들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전광! 진사! 고무기! 자네들 미쳤나?! 그러다 자네들까지 목이 달아나면 이 늙은이가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잖은가!”
그러자 전광이라고 불린 장수가 결연한 목소리로 극신에게 대답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를 자식처럼 아껴주신 상장군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전광······. 자네가 다른 두 사람을 부추겨서 난을 일으킨 모양이구나. 자네의 절조와 의협심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군. 하지만 옥에서 나간다고 한들 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도망치실 필요 없습니다. 상장군님. 계의 성벽을 지키는 병사 열 명 중 한 명은 이미 이번 난에 가담하기로 하고 북문 쪽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재빨리 그곳을 점거하고 조선군을 시내로 끌어들이면 조선의 태자가 궁궐에 숨어있는 폭군을 처단해 줄 겁니다.”
“우리가 살자고 연나라를 멸망시키잔 말인가······ .”
“상장군님! 어차피 이 난세 연나라 역사상 가장 우매한 왕이 옥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조선의 태자는 군재가 출중한 데다 상장군을 대하는 태도로 보건대 신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공신을 역적으로 대하고 간신을 삼공의 자리에 앉히는 왕실은 없애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음······ . 다른 방도가 없구먼. 알겠네. 솔직히 나도 비겁자의 오명을 쓴 채로 죽고 싶지는 않았네. 그럼 왕실 근위병들이 우리가 내가 탈출한 걸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움직이세.”
그 후 극신은 세 장수와 함께 옥에서 빠져나와 계의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 근처의 골목과 민가에 숨어있던 반란군 1천여 명은 상장군이 무사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우렁찬 함성을 지르면서 그를 반겼다.
“상장군께서 돌아오셨다!”
“북방의 호랑이 극신 만세!”
극신은 처참한 패전 후에도 자신을 반기는 부하들을 보고 전율을 느끼면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북방의 용맹한 병사들이여! 너희는 이 극신과 함께 나라와 왕실을 위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목숨을 바쳐 흉노의 침략을 막아왔다! 하지만 우매한 왕은 우리의 헌신을 잊고 단 한 번의 패배를 빌미로 우리를 비겁자라며 모욕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전장에서 죽을 기회마저 박탈하려 했다! 우리가 아직도 이토록 배은망덕한 왕에게 목숨과 충성을 바치겠나?!”
“싫습니다! 우리는 극신 상장군님께 목숨과 충성을 바칠 겁니다!”
“좋다! 모두 무기를 들고 성문으로 돌진하라! 비겁자의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죽느니 차라리 반역자가 되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