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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91화 (91/195)

[91화] 계략으로 계를 공략하다. (2)

한부는 무명에게 극신을 이용해 계를 점령할 계책과 그를 설득할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그와 함께 고집 센 적장에게 찾아갔다.

두 사람이 막사에 들어오자 극신은 철가면을 쓴 무명을 곁눈질로 흘끗 바라보더니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태자에게 말했다.

“동이족에는 망나니가 흉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전통이 있는 모양이군. 이제야 내 목을 칠 마음이 든 거냐?”

그 말에 무명이 가면 너머로도 살기가 전해질만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극신을 노려보면서 야수가 으르렁거리는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감히 너 따위 졸장이 본인을 망나니 취급하다니! 맹수가 없는 산에서 대장 노릇 하던 늙은 여우가 범을 못 알아보고 함부로 짖어대는구나!”

한부는 극신의 한마디 말을 듣고 격분하는 무명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겨우 이 정도 비아냥도 웃어넘기지 못한단 말이야?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건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는데. 분명 극신도 열 받아서 고함을 질러대겠지.’

극신은 한부의 예상대로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너는 뭐 하는 자이기에 연나라의 상장군 극신을 모욕하느냐! 다른 동이족

장수들은 모두 제나라의 억양으로 말을 했는데 너만 진나라 억양이 짙은 걸 보니 너야말로 진나라에서 출세하지 못해서 동이족의 땅까지 벼슬을 얻으러 간 졸장이렸다?”

무명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막사 안의 태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내보낸 후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극신이 귀신이라도 본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진나라식 억양에 기묘하게 생긴 작고 뾰족한 머리?! 이······ 이럴 수가! 설마 너는 예두장군(銳頭將軍) 백기? 백기는 몇 년 전에 진나라 왕의 역린을 건드려서 귀양가던 도중 왕의 사자를 죽이고 자결했다고 들었거늘!”

“감히 본인을 눈앞에 두고 그따위 멸칭으로 부른단 말이냐? 변방에서 흉노족과 부대끼며 반평생을 보내더니 예의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지금은 사정이 있어 무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니 옛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천하에 위명을 떨치던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무례를 범했구려. 그런데 어떻게 공은 진나라 왕의 분노를 얻고도 여전히 무사하신 거요? 아니, 그보다 왜 동이족인 조선의 왕에게 병부를 받으신 거요?”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무패의 장군이라는 명성을 얻은 무인이 30년 넘게 충성을 바친 왕에게 토사구팽당했다. 그런 자가 다른 나라에 망명한 이유가 달리 있겠나? 당연히 눈을 감기 전에 진나라에 복수하고 다시 천하에 명성을 날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동쪽 변방에 박혀있는 나라에 그럴만한 국력이 있단 말이오?”

“태자 전하께서 지휘하신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도 배운 게 없는 모양이군. 그대의 눈에는 조선의 병사들이 나약하고 미개해 보이던가?”

“음······. 솔직히 잔악한 흉노족보다도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었소.”

극신은 며칠 전 난하에서 고조선군에게 당했던 일방적인 패배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몸서리쳤다.

‘가장 큰 패인은 조선 태자의 교묘한 작전이긴 하지만, 조선군 병사들의 강함도 예사롭지 않았지. 몸놀림이 날쌔고 군율이 확실히 잡혀있는 데다 들고 있는 무기도 하나같이 듣도 보도 못한 훌륭한 것이었어. 특히 그 짧은 화살은 위력이 대단했지. 거기에 무안군 백기를 등용하다니······. 조선의 국력이 연나라에 알려진 것보다 대단한 모양이구나.’

한부는 두 노장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극신에게 말했다.

“극신 공. 우리 조선은 연나라 정벌을 시작하기 전에 전국칠웅이 서로 다투는 동안 가만히 내정을 다지고 이미 동쪽 반도 전체를 차지하여 조나라나 위나라를 뛰어넘는 국력을 갖추었소. 그리고 이제 연나라에게 요동과 요서를 빼앗았고 무명 장군이 10만 대군으로 계를 몰아쳐 함락시키면 하북에도 세력을 뻗치면 진나라와 초나라와도 대적할 만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오.”

“어느새 조선이 반도 전체를······.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조선이 보내오는 조공을 받아왔구먼. 전부 연나라 조정을 방심하게 하려는 작전이었거늘.”

“조선 왕실이 거짓으로 연나라 왕에게 조공을 바쳐온 것이 비난하는 것이오? 중원 대륙 출신 사람 중에서 오왕 합려에게 복수하려고 거짓 충성을 바쳐온 월왕 구천의 의지를 높이 사는 사람은 봤어도 비열하다며 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조선이 비겁하다 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연나라의 장수로서 현명하신 소양왕께서 장수하셔서 계속 옥좌를 지켜주셨다면 조선의 속내를 간파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극신은 포로 신세가 된 후 처음으로 고조선의 태자에게 존댓말을 했다.

한부는 고집 센 노장이 명장 백기를 등용한 조선에 조금씩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판단하고 다시 한번 그를 설득했다.

“극신 공. 연나라는 이제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아가는 배나 다를 바 없소. 공은 조나라 태생이고 연나라에는 입신양명을 위해 망명했을 뿐이니 연나라 왕실과 운명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왕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조선의 장수가 되면 북방의 흉노족을 떨게 한 공의 위명을 중원 대륙 전체에 알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요.”

무명은 한부의 말을 듣고 가면 속에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비웃었지만, 극신과 만나기 전에 태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극신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한부에게 대답했다.

“전하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소장은 20여 년 전 소양왕께 부름을 받은 후로 벌써 네 분의 왕을 모셔오면서 상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왕께서 먼저 내치신 것도 아닌데 소장이 먼저 연나라 왕실을 배신하면 세상 사람들이 저를 은혜도 모르는 자라면서 욕하고 손가락질하겠지요. 그러니 소장은 연나라의 장수로서 죽겠습니다.”

“허······. 선대 왕검께서 연나라 소양왕보다 먼저 공을 만나시지 못해서 아쉽구려. 알겠소. 그럼 더는 공에게 왕검께 충성을 바치라고 강요하지 않겠소.”

“소장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부디 망나니에게 목이 잘리는 대신 잘 드는 비수로 자결하여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공처럼 능력과 충절을 겸비한 인물을 어찌 함부로 죽일 수 있겠소? 공을 석방할 테니 그대가 섬기는 왕에게 돌아가시오.”

“네?! 그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가 가볍게 허언을 입에 담을 리 있겠소? 다만 공을 중히 쓰고 싶은 본인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 계로 돌아가고 나서도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오.”

“허허······. 주 왕실의 권위가 살아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미담을 동이족이신 전하께서 재현하시는군요.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한부는 극신과의 대화를 마치고 고조선군의 장수들을 모두 그 자리에 부른 다음 엄명을 내렸다.

“극신 공의 올곧은 성품에 큰 감명을 받아서 조건 없이 풀어주기로 했다. 주둔지를 떠나는 극신 공을 해치려는 자가 있거든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뜬금없는 선포를 듣고 고조선군 장수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입을 모아 태자를 말렸다.

“전하!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적국의 상장군을 조건 없이 풀어주면 계를 공략하기가 훨씬 어려워지고 말 겁니다!”

“전하!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옵소서!”

지금껏 태자의 말에 반대해본 적이 없던 석도 이번에는 언성을 높여가면서 극렬히 반대했다.

“전 군단장의 말이 옳습니다! 전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나라군이 극신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몇 년이 더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고조선군 장수들이 실패를 모르는 태자의 결정에 반발한 이유는 연나라의 수도 계의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수비병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해도 쉽게 공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역사에서 진시황이 중원 대륙통일을 거의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계는 전국시대 4대 명장 중 한 명인 진나라의 왕전이 이끄는 대군의 공격에도 약 10개월을 버텨냈다.

지금의 고조선군은 왕전이 지휘했던 진나라군보다 더 우수한 공성 병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병사의 수는 훨씬 적기 때문에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 생각이 있어서 결정한 일이니 더는 극신 공을 풀어주는 일로 왈가왈부하지 마라.”

“하지만······!”

“그만! 이 문제로 본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는 항명죄로 다스리겠다!”

태자가 소리치자 고조선군의 장수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날 밤 극신은 그를 따르는 몇몇 연나라군 장수와 함께 풀려나서 계의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무명은 태자와 함께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전하의 계책이 적중하길 빌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황이 꽤 불리해질 테니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상장군. 그저 모든 걸 운에 맡기고 적장을 풀어준 건 아니니 말이오.”

* * *

계로 돌아온 극신은 성문을 지나자마자 연나라 왕이 기다리고 있는 궁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궁궐에서 한 발짝씩 가까워질 때마다 무거워지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왕께 대체 뭐라고 말씀드린다는 말인가. 내가 이번 전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적군의 수를 줄이기는커녕 계에 남아있던 수비병력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극신은 분노한 연나라 왕에게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하면서 궁궐의 알현실에 들어섰다.

역시 연나라 왕은 그를 보자마자 크게 화를 냈지만, 화를 낸 이유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극신 이 비겁한 늙은이! 무슨 낯으로 살아 돌아와서 짐의 앞에 나타난 거냐!”

“폐하! 소장이 무능하여 적장의 계책에 속아서 전투에서 진 건 사실이오나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상장군이란 자가 끝까지 구차스럽기 짝이 없구나! 계로 도망쳐온 패잔병들이 이미 네놈의 추태를 낱낱이 짐에게 보고했는데도 발뺌하는 게냐?! 새파랗게 어린 적장이 두려워서 며칠이나 주둔지에 틀어박혀 있다가 결국 동이족

야만인들이 난하를 건너는 걸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지?! 그러다 뒤늦게 적을 쫓다가 북방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아깝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입니다! 폐하!”

“시끄럽다! 같은 증언을 하는 병사가 1백 명을 넘는데 그자들이 모두 널 음해하려고 짐에게 거짓말을 했단 말이냐!”

극신은 자신을 비겁자로 몰아가는 젊은 왕의 추궁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극신을 모함한 병사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연나라에 잠입해있던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이다.

한부는 난하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을 사로잡은 다음 그를 회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연나라 왕과 극신의 사이가 멀어지게 하려고 계 인근 지역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암부의 요원들에게 밀명을 내려 이간계를 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극신은 연나라 왕을 깊이 원망하기 시작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을 질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어찌 이 극신을 비겁자로 몰아간단 말인가! 한평생 전장을 떠돌면서 한 번도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거늘!’

연나라 왕은 그런 노장의 얼굴을 보고 조롱하면서 근위병들에게 지시했다.

“얼굴이 시뻘게지는 걸 보니 제 놈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여봐라! 저 비겁한 늙은이를 당장 옥에 가둬라! 내일 해가 뜨면 저잣거리에서 극신의 목을 베겠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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