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계략으로 계를 공략하다. (1)
정신을 잃은 극신이 석에게 붙잡혀 난하 반대편으로 끌려오자 한부는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제 연나라군은 머리가 잘린 뱀이나 마찬가지다! 모두 돌격하라! 투항하는 적은 포박하고 저항하는 자는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태자가 외치자 3만 명이 넘는 보병 부대가 손에 강철 환도와 극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강물 속의 적군을 향해 달려나갔다.
“와아아아아아!”
“연나라놈들을 물리쳐라! 선조의 원한을 풀자!”
연나라군 장수들은 총사령관이 적의 포로가 된 상황에 고조선군이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아군을 향해 밀물처럼 몰려오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북방의 호랑이 극신이 저렇게 허무하게 적장에게 잡히시다니······.”
“후······. 상장군도 없이 우리끼리 뭘 어쩌겠어. 여기서 개죽음당할 바에는 그냥 항복하자고.”
장수들이 하나둘 검을 검집에 꽂고 두 손을 높이 들면서 주변의 고조선군 병사들에게 투항하자 아직도 고조선군에게 저항하던 몇 안 되는 연나라군 병사들도 손에 든 창을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연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는 한부의 계책이 성공하면서 고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기병대장 석을 비롯한 고조선군 장수들은 연나라인 포로들을 계에서 가까운 난하 서쪽으로 끌어내서 강가에 모아 그 수를 헤아린 다음 이번 전투에 양군이 입은 피해 상황을 태자에게 보고했다.
“기병대장 석이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은 기병 열 기와 보병 103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장수 중에는 사상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연나라군은 적장 극신을 비롯한 장수 열다섯 명과 보병 약 2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약 4천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적 보병 1만 6천여 명과 기병대는 전장에서 도망친 듯합니다.”
“적 기병대는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미 텅텅 비어있는 우리 숙영지 쪽으로 정찰이라도 하러 간 모양이지? 패잔병은 수가 적고 지휘할 장수가 없으니 이젠 우리를 막지 못할 거다. 그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포로를 데리고 계로 행군할 준비를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적장 극신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면 좋겠습니까?”
“기병대장 석.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극신을 어떻게 써먹어야 이번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소장이 적장을 사로잡았을 때 적군이 줄줄이 투항했으니 아마 극신은 조나라 출신임에도 연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큰 존경과 신임을 얻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연나라를 흉노의 위협에서 지켜냈으니까.”
“그러니 극신을 여기서 바로 처단하는 것보다는 연나라의 도성까지 데리고 가서 높고 튼튼한 성벽 뒤에 숨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 써먹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네가 대체 무슨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엄청나게 커다란 발석차를 만들어서 적장을 계의 성벽 안으로 쏘아버리는 겁니다! 존경하는 상장군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리면 적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감히 전하를 능멸했던 적장이 통쾌하게 죽으면 우리 병사들이 아주 기뻐할 겁니다!”
태자와 그의 주변에 있던 고조선군 장수들은 석의 말을 듣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얘가 아직도 극신한테 악감정이 남아있었구나. 평소에는 성격이 화끈한데 뒤끝이 장난 아니네. 그래도 그렇지 무슨 판타지 게임에나 나올법한 연출을 생각 해내냐고.’
한부는 간신히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음······. 아주 신선한 발상이지만, 너무 극단적이구나. 계를 점령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서쪽 대륙의 다른 나라에 우리 조선인들이 잔인한 야만족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질 수 있으니 그 방법은 활용하기 어렵겠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럼 전하께서는 어떻게 적장을 쓰실 생각이신지요?”
“기왕이면 극신을 살려서 우리 병사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 계를 점령하는 데 써먹어 보려고 한다. 그러려면 우선 저 고집 세 보이는 노인을 잘 구슬려 봐야겠지.”
한부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온몸이 물에 젖은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적장 극신을 바라보았다.
* * *
태자가 이끄는 고조선군은 난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계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했다.
원래대로라면 행군에 익숙한 고조선의 병사들이 나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2만 명이 넘는 포로를 끌고 가야 했기에 거의 열흘이 걸리고 말았다.
기원전 249년 6월 중순, 겨우 고조선군의 4만 명이 넘는 병사들은 겨우 1만 명의 수비병력만 남은 계를 둘러싸고 나무 울타리와 망루를 세우기 시작했다.
계의 수비대장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왕궁으로 달려가서 젊은 왕에게 비보를 전했다.
“폐하! 수만 명의 적군이 계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설마 상방과 경진 장군이 데려간 30만 대군이 조나라군에게 패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폐하! 조나라 원정군의 소식은 아직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계를 포위한 적군의 차림새가 생소한 걸 보면 조선의 침략자들이 몰려온 듯합니다!”
연나라 왕은 그 말을 듣고 힘없이 옥자에 등을 기대면서 얼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상장군이 고작 동이족
야만인의 오합지졸에게 패했단 말인가······?!”
“폐하!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디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수비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궁궐의 알현실에 모인 연나라의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옥좌에 앉은 젊은 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현재 연나라에서 조금이라도 유능한 무관은 대부분 조나라 정벌에 동원됐기에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서도 왕에게 쓸만한 조언을 올릴 역량이 있는 신하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연나라 왕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엄지손톱을 깨물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수비대장에게 명령했다.
“하······. 우선 성벽 위에 돌과 화살을 날라서 농성을 벌일 준비를 해라. 성안에 양식은 충분하니 조나라로 떠난 30만 대군만 돌아오면 계를 포위한 동이족
침략자 무리를 쫓아낼 수 있을 거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계의 수비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에게 인사한 다음 힘없는 발걸음으로 알현실 밖으로 나갔고, 연나라의 대신들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의 시내에도 적군이 도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겁에 질린 백성들이 울부짖으면서 소란을 피워댔다.
“이게 무슨 꼴이냐고! 조나라를 쳐서 땅을 뺏는다면서 온 나라의 장정을 다 끌고 가더니!”
“여보! 지금 그런 소리 해봤자 조선놈들이 물러가진 않잖아요! 기회를 봐서 성 밖으로 도망치게 얼른 애들 챙기고 짐이 싸놓자고요!”
한편 흰 천에 떨어진 먹물이 번져나가듯 계의 시내에 공포와 혼란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 고조선군 진영의 지휘관 막사에서는 태자와 고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몇몇 장수들이 극신을 회유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말로 설득하거나 협박해도 극신은 한결같이 굳은 표정으로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긴말하지 말고 어서 내 목을 쳐라.”
한부는 극신의 입에서 벌써 열 번째로 그 말이 나오자 너무 답답한 나머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극신 공! 대체 왜 이리 귀중한 목숨을 쉽게 버리려고 하시오! 왕검께 충성을 맹세하면 조선의 장군으로 재기할 기회를 주고 북방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신변도 보호해줄 것이오! 조선의 태자인 본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네 말에 진심이 담겨있는지 거짓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조나라로 떠난 30만 대군이 돌아오기만 하면 전세는 금방 역전될 테니 말이다.”
“공은 이번 조나라 왕이 다시 명장 염파에게 병권을 맡겼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보군요. 율복이나 경진 따위가 염파 장군과 전장에서 마주치고도 무사할 것 같소?”
“나도 조나라 출신인데 어찌 염파 장군의 무서움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염파 장군의 나이가 이미 일흔여섯이라 실력이 예전만 못할 거고 조나라는 11년 전 장평에서 장정 45만 명이 죽어서 병사가 턱없이 부족하지. 율복과 경진이라도 그만큼의 병력이 있으면 늙은 범을 잡을 수도 있지 않겠나? 게다가 염파 장군이 연나라군을 이겼어도 네놈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잘 생각해봐라. 연나라 원정군을 물리치면 조나라 왕이 가장 먼저 뭘 하려고 하겠나? 당연히 연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하북의 비옥한 농지를 빼앗으려 하지 않겠지. 그럼 염파 장군은 당연히 같은 땅을 노리는 너희 동이족들부터 북쪽으로 쫓아내려고 할 거다.”
“음······.”
“이제 알겠나? 네놈이 교묘한 전술로 이 극신을 이겼다고 해서 고작 병사 4만으로 연나라의 30만 대군이나 염파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칠 수 있겠나? 이런 상황이니 뭐하러 내가 연나라를 배신하고 조선의 장수가 되겠나?! 연나라의 장수로 남든 조선에 귀화하든 목이 베일 운명이라면 최소한 구차하지 않게 죽겠다!”
고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고조선군 장수들은 극신의 대답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저런 고집스러운 늙은이를 봤나! 전하! 저 발칙한 늙은이의 소원대로 목을 쳐서 장대 위에 걸어서 계를 지키는 적군에게 보여주시지요!”
“전하. 며칠 전 기병대장 석이 제안했던 적군의 사기를 꺾는 작전을 다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한부는 격분하는 부하들과 달리 극신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선이 동이족
야만인이라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어서 뻗대는 건 아니라 이 말이지? 조선에 귀화해봐야 무관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지 못할 거 같으니까 그냥 죽이라는 거잖아. 그게 자꾸 튕기는 이유라면 설득하지 못할 것도 없지.’
한부는 부하 장수들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북쪽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군 부대의 상황을 물었다.
“지금쯤 무명 상장군의 부대는 어디쯤을 지나고 있지? 분명 이레 전에는 요서에 들어서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는데.”
태자의 질문에 고대 중국어를 할 줄 몰라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석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금 전에 상장군에게 보냈던 전령이 돌아와서 말하길 상장군의 부대는 사흘 전에 조양(潮陽)을 지나 순조롭게 계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거기까지 왔다고? 역시 대단하구나! 그럼 지금 상장군에게 전령을 보내서 부관에게 행군을 맡기고 빨리 말을 타고 계로 오라고 전해라. 극신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상장군밖에 없을 것 같다.”
“확실히 같은 서쪽 대륙 출신끼리라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석은 태자의 명을 받자마자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가서 무명에게 전령을 보냈고 상장군 무명은 연락을 받은 지 이틀 만에 계를 포위하고 있는 고조선군 진영에 도착해 태자에게 인사했다.
“상장군 무명이 전하를 뵙습니다.”
“상장군! 전령에게 경의 활약상을 들었소! 들불이 잡초를 집어삼키듯이 순식간에 요동과 요서를 정벌하셨구려! 과연 천하제일의 명장이라 할만한 군재요!”
“초나라군이나 전성기의 조나라군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연나라 상장군 극신의 군대를 물리치시고 무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고맙소. 상장군. 사실 다른 게 아니라 포로로 잡아둔 극신 때문에 경을 급히 이곳까지 불렀다오. 경이 극신을 설득해서 왕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조선의 장수가 되게 해주시겠소?”
무명은 그 말을 듣고 가면 속에 감춰진 눈썹을 사납게 꿈틀거리면서 한부에게 물었다.
“전하. 어찌 이 무명을 얻으시고도 극신 따위 졸장을 탐내시는 겁니까?”
“물론 극신은 경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장수지만, 그 나름의 쓸모가 있소. 극신의 힘을 빌려 계책을 세우면 계에 무혈입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불쾌하게 여기지 말고 본인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흠······.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극신을 한번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