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난하(灤河) 전투 (2)
한부는 시중을 드는 병사가 건네준 투구를 다시 머리에 쓰면서 고조선군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연나라군 진영에서 북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짓는다. 석 기병대장은 본대가 이동할 때 후방에 정찰대를 풀어서 적군이 추격대를 보내는지 잘 감시하도록.”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고조선의 4만 대군은 곧 강변에서 2km쯤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나무 울타리를 치고 망루를 세우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식 숙영지를 짓는 작업은 전장에 나선 고조선군 병사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연나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적군이 임시 요새를 짓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극신은 먼발치에서 나무 널빤지를 나르고 망치질을 하는 수만 명의 적군 병사들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 몸이 직접 도발했는데도 오히려 5리나 물러나다니? 그리고 거기에 요새를 짓는다고?! 적장은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에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분하지도 않단 말이냐?!”
상장군의 푸념을 들은 한 연나라군 부장이 애써 기운찬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어쩌면 조선의 태자가 상장군님의 범과 같은 기세에 겁을 먹고 물러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겁이 많은 자가 후방에 우리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 요새를 남겨두고 계를 치려고 할 리 없다. 설령 네 말이 맞는다 쳐도 조선 태자가 요새 안에서 웅크리고 요동의 조선군을 기다리면 우리에게 좋을 게 없지 않겠나?”
“예정대로 근처에 있는 요새에 지원군을 요청하셔서 나무 울타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조선군을 수로 밀어붙이면 어떻겠습니까?”
“그 요새는 규모가 작은 곳이라 장수도 최소한의 수비병력은 남겨 놓아야 할 테니 기껏해야 1천 명 정도만 보낼 수 있을 거다. 그 정도 병력이라도 한창 회전을 벌일 때 적 진영의 후방을 기습하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요새 안에 틀어박힌 적군을 끌어내는 데는 큰 역할을 하긴 어렵겠지. 후······. 이것 참 난감하게 됐구먼.”
두 사람이 말하는 요새는 현대의 청더(承德)시, 한국식 발음으로는 승덕시가 세워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승덕시는 원역사의 청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여름을 나는 궁전이 있는 번화한 도시이지만, 전국시대인 기원전 3세기에는 그저 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작은 요새 도시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극신은 불안한 눈빛으로 고조선군의 숙영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지금은 적장을 계속 도발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겠구나. 내일 날이 밝으면 이번에는 전군을 이끌고 적진에 다가가 회전을 걸어볼 생각이니 출진 준비를 해두어라.”
“상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편 극신이 이끄는 연나라군이 한참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부는 난하 강변에 석양이 깔리자마자 기병대장 석과 군단장 네 명, 그리고 조선 연합 소속 부족의 병사들을 이끄는 한족
출신 장수 네 명을 불러 지휘관 막사로 호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조선군의 모든 군단장급 장수 아홉 명이 모두 자리에 앉자 태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쯤 적장 극신은 우리가 숙영지 안에 틀어박혀서 그저 요동에 있는 상장군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만 여기고 있을 거다. 그러니 오늘 밤에 연나라놈들을 좀 놀라게 해 주려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태자의 말을 마치자마자 기병대장 석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습을 감행하시려는 모양이군요! 소장이 반드시 오만방자한 적장의 수급을 취하겠습니다!”
그러나 석을 제외한 다른 고조선군 장수들은 태자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하. 적장 극신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나운 흉노의 부족들과 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어 연나라 제일의 명장이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이니 분명 우리 군의 야습을 해올 때를 대비해 주둔지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소장도 전 군단장과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 적진 주변을 정찰하고 온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연나라군 병사들은 주둔지 주변의 망루에 횃불을 밝히고 있었다 합니다.”
한부는 장수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자 그들을 안심시켰다.
“적장이 그리 호락호락한 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진짜 적진에 쳐들어가는 대신 매일 밤 적진 근처에서 소란을 피우면 야습을 감행하는 척만 해서 연나라군 병사들을 지치게 할 생각이니 말이다.”
“과연! 그 방법이라면 극신의 발을 묶고 상장군의 군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겠습니다!”
“상장군의 힘만으로 연나라를 정벌하면 무인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니겠나? 기병대장 석과 군단장 전이 기병과 경보병대를 이끌고 거짓 야습 작전으로 적의 발을 묶어두는 동안 다른 부대는 주변에 정찰병을 풀어서 목재로 쓸만한 나무가 많은 숲이 가까운 강변을 찾아라.”
그 말을 듣고 기병대장 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전하께서는 벌써 계를 공격할 때 쓸 공성 무기를 더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아니라 적이 지쳤을 때 몰래 어둠을 틈타 뗏목을 만들어서 강을 건널 생각이다. 우리 병사들이 강을 건너 추수를 앞둔 남쪽의 농경지로 진격하는 척하면 극신도 급히 난하를 건널 수밖에 없겠지. 그때 걸어서 강을 건너느라 무방비한 적을 한 번에 섬멸한다.”
“아! 참으로 교묘한 계략······이 아니라 계책이군요! 전하! 벌써 그렇지 않아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적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부는 석의 칭찬을 듣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몇십 년 뒤에 이베리아반도의 켈트족
연합군을 박살 낼 때 쓰는 전술인데. 그나저나 이 작전이 잘 먹혔으면 좋겠구만.’
그는 고조선군 병사들이 연나라군보다 질 좋은 병장기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당장 눈앞의 적과 전면전을 펼치면 큰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할 거로 생각했다.
한부는 아직 직접 전장에 나선 경험이 적었고 고조선군 병사 중에도 실전을 경험한 자가 많지 않았지만, 극신은 경력 40년 차 장수이고 그가 데려온 병사들도 흉노와의 전투에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그는 부족한 실전경험을 인류 역사 5천 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명장들이 쌓아 올린 전략과 전술을 이용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기회에 원하는 전장에서 원하는 때에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적을 유인하는 방법을 확실히 익혀놔야지. 다행히 극신은 지금 마음이 조급해 보이니까 좋은 연습 상대가 돼줄 것 같구만.’
* * *
기원전 249년 5월의 마지막 날 밤, 태자가 군사회의를 끝내자마자 기병대장 석과 제1 군단의 군단장 전은 각각 중무장한 기병 5백 기와 경번갑 대신 지갑을 입은 팽배수 1천 명과 편전을 다룰 줄 아는 궁수 1백 명을 이끌고 연나라군 진영으로 다가갔다.
보병대가 강가에 자란 갈대밭에 몸을 숨기자 석이 이끄는 기병 5백 기는 횃불을 들고 연나라군 진영으로 돌진하면서 요란스럽게 괴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연나라 놈들아! 내가 왔다! 얼른 일어나라고!”
갑작스럽게 적 기병대가 다가와 소란을 피우자 망루 위를 지키고 있던 연나라군 초병들은 막사와 천막 속에서 쉬고 있는 전우들에게 적습을 알렸다.
“적군이 나타났다! 적군의 야습이다!”
그러자 이미 갑옷을 입고 있던 극신이 지휘관 막사에서 나오면서 활짝 웃으면서 소리쳤다.
“다행히 조선인들이 제 발로 죽을 자리에 찾아와 줬구나! 매복한 병사들은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일어나지 말고 대기하라!”
상장군의 명이 연나라군 진영에 전해지자 주둔지 주변에 판 참호 속에 웅크려 참호 속에 숨어있는 연나라군 병사들이 숨소리를 줄이면서 손에 쥔 창대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고조선군의 팽배수들은 적진으로 돌격하는 대신 갈대밭 바로 앞으로 나서더니 연나라군의 활 사정거리 밖에서 횃불을 흔들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동안 태자의 부대에 종군한 궁수 4천 명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1백 명의 궁수는 짧은 화살을 넣은 통아를 활시위에 건 다음 횃불을 밝힌 망루 위를 지키는 적군을 향해 일제히 편전을 발사했다.
- 쐐액!
1백 발의 편전이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약 240m를 날아가서 연나라군 병사들의 가슴과 목을 꿰뚫자 고요하던 난하 강변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연나라군의 장수들은 편전에 맞은 초병들이 비틀거리다가 망루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초병들이 왜 죽어 나가는 거냐?!”
“모르겠습니다! 장군님!”
“적이 활을 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망루 위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편전은 화살의 길이가 약 45cm로 짧고 속도가 일반 화살보다 훨씬 빨라서 대낮에도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맨눈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편전을 보고 피하거나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나라군 장수들은 화살을 맞고 죽은 초병들의 시체의 몸통에 애기살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적의 궁수가 활을 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극신에게 보고했다.
“상장군님! 조선군이 2백 보나 떨어진 곳에서 기묘하게 생긴 짧은 화살을 날려대고 있습니다! 기병대를 보내서 적의 궁수 부대를 섬멸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극신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으면서 부하 장수들을 말렸다.
“동이족은 활을 잘 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나도 분통이 터진다만, 지금 기병대를 내보낼 수는 없다!”
“상장군! 그럼 적의 화살 공격에 당하고만 있자는 말씀입니까?”
“잘 봐라. 적군은 우리 군의 주둔지에 더는 다가오지 않으면서 무성한 갈대밭 주변에서만 소란을 피우고 있다. 저 속에 복병이 몇 명이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느냐?”
“아······.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상장군님.”
“본인의 말을 알아들었으면 망루 위의 초병들에게 화살을 막을 포막과 방패를 가져다주어라. 적이 활을 쏜다고 해서 적군의 움직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상장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극신이 명하자 연나라군 병사들은 망루 위에서 바짝 엎드려있는 동료들에게 두꺼운 삼베로 만든 커다란 화살막이용 방패 포막과 작은 원형 방패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천과 나무로 만든 방패가 철편을 엮어서 만든 두정갑도 관통하는 편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콰각!
두꺼운 포막을 뚫은 편전이 한 연나라군 초병의 어깨에 박히자 그 병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한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으아아아아악!”
극신은 그 모습을 이를 갈면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지난 40년 동안 여러 전장을 전전했지만, 이토록 화가 치밀어오르는 적은 처음이구나! 그러나 이 정도 도발에 걸려들 극신이 아니다!”
한편 연나라군 병사들이 어둠 속을 날아오는 보이지 않는 화살에 고통받는 동안 고조선군의 정찰병들은 어두운 강변을 거닐다 해가 뜨기 전에 태자가 말한 숲과 가깝고 적진에서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강변을 찾아냈다.
한반도만큼은 아니지만, 중원 대륙도 토지개발이 덜 된 시대였기에 곳곳에 원시림이 많아서 빨리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부는 다음 날 아침에 숙영지로 귀환한 정찰병들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곁에 있는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벌써 적당한 도강 지점을 찾아냈단 말이지! 부처님과 천신께서 우리 조선을 도우시는구나! 손재주가 좋고 행동이 잽싼 병사 3천 명을 선발한 다음 오늘 밤에 그 숲으로 보내서 미리 뗏목을 만들게 해라! 앞으로 사흘 동안 적군을 더 괴롭힌 다음 미끼 부대만 남기고 강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