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난하(灤河) 전투 (1)
극신은 겁에 질린 연나라 왕과 대신들을 안심시키고 궁궐을 나서면서 턱에 난 흰 수염이 흔들리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조나라와 연나라에서 40년 가까이 장수 노릇을 하면서 여러 왕을 모셨지만, 이토록 겁이 많은 왕은 처음 보는구나. 그럴 거면 성격이라도 유순하던가······.’
그는 훗날 희왕(喜王)이라고 불리게 될 지금의 연나라 왕이 유약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희왕이 고조선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벌벌 떠는 모습도 극신이 그런 생각을 품게 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지도 않은 강대한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어린 장남인 태자 단을 진나라 왕실에 볼모로 보내 타지살이를 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종종 연나라의 왕족과 대신들의 귀에도 들려 왔지만, 희왕은 진나라 왕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극신은 계의 병영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20여 년 전 자신을 등용했던 연나라의 야심만만하고 유능한 정복 군주 소양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소양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던 시절이 참 좋았지. 진개 장군은 조선의 땅 2천 리를 휘몰아쳐서 빼앗고 나도 악의 장군과 함께 제나라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었거늘. 그때는 늘 언젠가 중원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의 삼공(三公)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지금 이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게 내 말을 듣지 않고 과욕을 부려서는!’
원역사의 사료에는 남지 않은 사실이지만, 극신은 희왕에게 명장 염파가 아직 건재함을 이유로 들며 이번 조나라 원정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었다.
그러나 희왕은 연나라의 재상 율복은 염파가 이미 칠순을 훌쩍 넘겨 체력과 군략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에 넘어가서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는 바람에 결국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말았다.
극신은 입신양명이 인생의 목표인 자이기에 조국인 조나라를 버렸을 때처럼 연나라를 떠나고 싶었지만,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가 자신을 중하게 써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 나이가 벌써 일흔에 가까운데 연나라 밖에서의 명성은 백기나 염파는 커녕 진나라의 몽오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연나라 말고는 어느 나라가 이 늙은이를 써주겠는가? 연나라가 망하면 분명 장수로서의 내 삶도 끝장나겠지. 그럴 바엔 짐독을 마시고 죽는 게 낫다! 반드시 동이족
침략자들을 몰아내야 해!’
그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의 곁으로 돌아와 부장들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계의 수비병 중 보병 1만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동이족
야만인들이 계 주변의 농지와 마을을 약탈하면 군량이 부족해질게 뻔하다. 그러니 난하의 동쪽 강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을 막아내면서 근처에 있는 아군 요새에 전령을 보내 동이족
놈들의 후방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자 극신의 부장 중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
“상장군님. 남진하는 적군과 우리 군의 규모가 비슷하니 난하 서쪽에 방책을 세우고 강을 건너오려는 적을 막아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요동에서 마음대로 날뛰고 있는 조선군은 거의 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 계로 진격하고 있는 적군 4만 명과 합류하면 아무리 난하를 끼고 있어도 막기 어려워지겠지.”
“하지만 남진하는 조선군이 전면전을 피하고 요동에 있는 아군을 기다리면 배수진을 친 의미가 있겠습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남진하는 적군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젊은 조선의 태자라고 한더군. 젊은 혈기에 굳이 강을 넘어와 도발하는 적을 그냥 보고 넘어가기는 어려울 거다.”
“부디 그 애송이가 상장군의 책략에 넘어오길 빌겠습니다.”
* * *
기원전 249년 5월 말, 상장군 무명이 요동군 정벌을 거의 마무리 짓고 요서로 진격하고 계를 떠난 극신이 막 배수진을 완성했을 때, 한부가 이끄는 고조선군도 난하 근처에 도착했다.
한부는 말 위에서 폭이 넓고 중원 대륙의 강답지 않게 물이 맑은 난하를 바라보자 가슴이 뛰었다.
‘이제 이 강을 넘어서 한 80km 정도만 가면 계가 보일 거다! 현대에는 북경이 있는 연나라의 수도가 말이지!’
그는 연나라 영토 전역을 점령한 후 언젠가 수도를 계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중원대륙에 고조선의 영향력을 뻗쳐 나갈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 라면 자금성이 세워질 자리에 으리으리한 고조선의 궁궐을 세우고 천안문 자리에는 개선문을 세워버려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만!’
그런데 그때, 정찰을 나갔던 기병 수십 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고조선군 본대를 향해 달려오더니 태자의 근처에서 말을 세웠다.
기병들은 말에서 내린 다음 태자의 곁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보고했다.
“십인대장 용이 태자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명하신 대로 전군이 걸어서 도강할 수 있는 물이 얕고 유속이 느린 지점을 발견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약 4만 명 정도로 보이는 적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정말 적군 병사 수가 4만 명이나 돼 보였다는 말이냐?! 혹시 허수아비 따위를 세운 허허실실 계책은 아니었느냐?”
“소인도 그 점이 의심스러워서 적진에 최대한 접근해 봤습니다만, 전부 살아 움직이는 적군 병사였습니다.”
“그럼 다른 지역에 있는 연나라군 병력 중 일부가 계에 도착했다는 말이군. 수고했다. 돌아가서 쉬어라.”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기병대가 돌아가자 한부는 즉시 행군을 멈추고 간이 천막을 친 다음 기병대장 석과 군단장급 고조선군 장수들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군이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그쪽으로 진군한다. 우선 적진 근처에 숙영지를 세우고 주변 지역의 지형을 살피고 배수진을 친 적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먼저 이렇게 잽싸게 군대를 움직인 적장이 누구인지부터 확인해봐야겠지.”
태자의 말에 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전하. 우리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연나라군의 창칼과 화살은 강철로 만든 조선의 갑옷을 쉽게 뚫지 못합니다. 또 적이 배수진을 친 지점에는 엄폐물이 적어서 복병이 숨어있기 어려우니 전면전을 펼쳐도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적군이 언제 이상적인 도강지점을 차지했는지 알 수 없으니 무슨 함정을 깔아놨는지 어떻게 알겠느냐? 본인이 적장이라면 길게 자란 풀 아래에 이미 말뚝 함정 정도는 파 놨을 것 같구나.”
“풀 속에 숨겨둔 덫이라니······. 기병에게는 악몽 그 자체로군요..”
석이 진저리를 치면서 고개를 흔들자 다른 군단장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희생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난하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늘 말씀하시던 데로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군이 하북의 비옥한 농지를 전부 차지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전하.”
“그 점은 본인도 걱정되긴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를 거둬서 우리 병사가 많이 상하면 상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계를 포위망을 구축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소. 가장 급할 때가 가장 신중해야 할 때이니 이 일에 관해서는 이제 이견을 말하지 마시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태자가 이끄는 고조선군은 다시 남동쪽으로 행군을 시작했고 반나절 만에 극신이 이끄는 연나라군의 배수진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극신은 먼발치에서 고조선군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전군에 결전에 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마침내 동이족
침략자들이 도착했다! 여기서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난하 너머에 사는 너희의 가족은 야만인의 노예가 될 것이며 너희가 애써 기른 농경지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허리까지 차는 강물을 건너 도망치는 자는 어차피 동이족
궁수들의 좋은 과녁이 될 뿐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를 쟁취해라!”
고조선군의 위세에 겁을 먹었던 연나라군 병사들은 연나라에 망명한 뒤로는 무패를 자랑하는 노장이 결연한 목소리로 연설하자 무기를 높이 들고 함성을 질렀다.
“북방의 명장 극신 만세!”
“조선놈들을 쫓아내고 고향을 지키자!”
극신은 사기가 오른 병사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활과 화살통을 챙기고 말 위에 올라 북방에서 데려온 날쌘 궁기병 다섯 기를 이끌고 고조선군을 향해 달려갔다.
기병대장 석은 태자와 함께 고조선군 진영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걷다 그 모습을 보고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전방에서 연나라군 기병 여섯 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흠······. 저 정도 수의 기병으로 정면에서 덤빌 리는 없을 테니 협상을 하러 오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그때, 극신은 고조선군 진영에서 약 100m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을 때, 갑자기 검은색으로 칠한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몸에 걸친 태자의 미간을 향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 쐐액!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고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온 화살이 태자가 쓴 검은 투구의 꼭대기 부분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 카앙!
극신이 쏜 활의 장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무거운 강철 투구가 벗겨지면서 한부가 탄 말의 발굽 밑에 나뒹굴었고 연나라 상장군의 뒤를 따르던 궁기병 열 기도 태자를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 피융!
“저것들이 미쳤나!”
한부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경번갑을 두르고 있는 두 팔로 투구가 벗겨진 머리를 가렸고, 석은 한부가 탄 말 앞으로 나서서 묵직한 마상편곤을 수수깡처럼 휘두르며 태자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을 모두 쳐서 떨어트렸다.
극신은 기습이 실패한 것을 보고 혀를 한 번 찬 다음 우레같은 목소리로 고조선군 진영을 향해 외쳤다.
“나는 연나라의 상장군 극신이다! 내가 두 눈을 뜨고 살아있는 한 너희 동이족
야만인들은 한 놈도 난하를 건널 수 없다! 너희 조선놈들에게 목숨을 건질 기회를 줄 테니 조나라로 떠난 60만 대군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너희 땅으로 돌아가거라!”
고조선군의 통역사들은 즉시 그 말을 통역해 전군에 알렸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장수 중 몇 명은 태자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궁수 부대에 발사 명령을 내렸다.
“발사! 저 건방진 늙은이의 목구멍에 화살을 박아버려라!”
성난 고조선의 궁수 수백 명은 서둘러 시위에 화살을 걸고 적장을 향해 일제히 발사했다.
그러나 극신과 그를 따르는 정예 궁기병들은 고조선군 궁수들의 활에서 화살이 떠나기 전에 미리 말머리를 돌리고 본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고 수백 발의 화살은 연나라의 기병 여섯 기가 이미 지나간 초원에 차례로 박혔다.
극신이 도망치자 고조선군의 장수들은 투구에 화살을 맞은 태자의 근처로 모여서 한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전하! 무탈하시옵니까?!”
“어서 군의에게 옥체를 살피게 하옵소서 전하!”
한부는 그런 장수들을 침착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모두 안심해라. 석 기병대장 덕에 터럭 하나 다치지 않았다.”
석은 한부가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음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태자에게 대답했다.
“전하! 저 극신이라는 늙은이의 오만함이 도를 넘었습니다! 어서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려 연나라 놈들을 전부 난하에 처박아 버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한부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의 도발에 걸려들 필요는 없다. 연나라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한 나라의 상장군쯤 되는 자가 저런 도박을 하겠느냐? 극신이 나를 놀라게 했으니 이제 나도 황당한 계책으로 저 늙은이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게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