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겁에 질린 연나라 조정
고조선군 팽배수 1만 명이 부서진 새문도차를 뛰어넘으면서 밀물처럼 몰려 들어오자 수천 명의 연나라군 병사들이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쳐 버렸다.
이미 연나라군의 패색이 짙었지만, 양평성주는 통제를 잃지 않은 병사 약 3천 명을 수습해 시가지로 후퇴한 다음 최후의 결전을 지시했다.
“자랑스러운 연나라의 용사들이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버텨라! 한 시진이라도 더 버텨서 계에 계신 대왕께서 동이족
침략자들을 물리칠 토벌군을 꾸릴 시간을 벌어야 한다!”
성주가 결연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직접 나무 방책을 끌어다가 골목을 막자 그 주변에 있던 연나라군 장수와 병사들도 시내 곳곳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긴 창을 들며 각오 적의 돌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연나라군이 결사항전을 각오하며 시내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상장군 무명은 모든 고조선군 부대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군 성내로 돌입하라! 해가 지기 전에 양평성의 관청을 점령한다!”
상장군의 명령은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한방울처럼 순식간에 고조선군 진영에 번져나갔고 곧 성밖에 남아있던 4만 5천 명의 병사들도 양평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먼저 돌입한 고조선군의 팽배수 부대는 이미 대로변과 골목 곳곳을 막아둔 장애물을 향해 무턱대고 돌격하지 않고 다른 병종의 아군이 도착하자 함께 시가지로 돌입했다.
고조선군의 중대장들은 연나라군이 대로변을 나무 방책으로 막은 다음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주변의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아직 돌격하지 마라! 먼저 노궁수 부대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잠시 후 3인 1조로 움직이는 고조선군의 노궁수 부대가 전장에 도착하자, 나무 방책 뒤의 연나라군 병사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노궁이다! 조선놈들이 노궁을 가져왔다!”
“방패! 방패를 가져와!”
연나라 병사 중 방패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급히 앞으로 나오면서 전우들을 지키려고 원형 나무 방패를 들어 올렸고 고조선군 노궁수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일렬로 앉으면서 그런 적군을 향해 일제히 쇠뇌틀을 당겼다.
- 퉁! 퉁! 투둥!
길이가 약 60cm나 되는 질긴 현이 굵은 화살을 앞으로 밀어내자 양평성 시내 곳곳에서 수천 발의 화살이 겁에 질린 병사들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변변한 갑옷도 입지 못한 연나라군 병사들은 겨우 열 보 정도 앞에서 발사된 쇠뇌의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볏짚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크어어어어억!”
“저 쇠뇌는 방패도 부순다! 다들 건물 뒤로 숨어!”
쇠뇌에 겁을 먹은 연나라군의 진형이 흐트러지자, 고조선군 장수들은 보병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팽배수와 극병은 돌격하라!”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조선군의 팽배수가 나무 방책을 손도끼로 부숴버리고 시가지 안으로 달려갔고 극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아아!”
“연나라놈들을 처치해라!”
곧 양평성의 거리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시내에 남은 연나라군 병사들은 긴 창을 들고 고조선군에게 저항했지만,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고 좁은 공간에서 방패를 든 팽배수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짧은 환도를 휘두르고 그 뒤를 극병들이 받치며 밀어붙이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연나라군 잔당은 모두 전사하거나 고조선군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상장군 무명은 곳곳이 피로 물든 양평성 시내를 둘러보면서 사마근에게 말했다.
“제법 튼튼한 성에 틀어박히고도 한 달도 못 버티다니. 사마근. 연나라군이 이렇게까지 형편없었나? 그래도 한때는 강대했던 제나라의 영토 거의 전역을 정복했던 나라가 아닌가?”
“아무래도 연나라는 조선군이 엄리대수를 넘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나 봅니다. 상장군. 수비병력도 적었지만 성벽 위에 상자노 조차도 배치해두지 않을 걸 보면 말입니다.”
“이 사람! 빈말로도 내 군략이 뛰어나서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먼!”
“토끼를 잡고 자랑스러워 하는 범은 없습니다. 상장군.”
“허허허허! 내가 자네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어서 아끼는 거라네! 그나저나 이번 전투에서 우리 군과 적군이 입은 손실은 어느 정도인가?”“우리 병사 중 약 3백 명이 난전 중에 전사하거나 다쳤고 장수 중에는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적군은 양평성주를 포함한 적장 열 명이 난전 중에 사망했고 약 4천 명이 사망했으며 3천 명은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시가지가 포위되기 전에 성을 버리고 도망친 자는 1천 명 정도인 듯합니다.”
“아군 사상자는 별로 없군. 봄이 끝나기 전에 요동 전체를 접수한다. 양평성을 수비할 병력 1만 명을 선별하고 사흘 뒤에는 다시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라.”
“상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마근은 상장군에게 대답한 후 전후처리를 하기 위해 휘하의 병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무명은 연나라의 수도 계가 있는 남서쪽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쯤 연나라 도성은 곰이 건드린 벌집처럼 난리가 났겠군. 멍청한 연나라 왕이 지레 겁을 먹고 염파에게 성문을 열어주기 전에 빨리 태자의 군대와 합류해야겠어.”
* * *
고조선의 5만 5천 대군이 양평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불처럼 빠르게 중원 대륙 전체로 번져나가자 전국칠웅 각국의 군주와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고조선의 약진을 두고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조나라 왕은 궁궐에 여러 대신과 외국에서 망명 온 유명인사를 부른 다음 의견을 물었다.
“적군 연나라의 후방이 어지러워진 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동이족
야만인들이 감히 중원 대륙에 발을 들인 점은 영 마음에 걸리는구려. 연나라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 전쟁을 끝내자는 뜻을 전해왔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왕의 말에 몇몇 조나라의 대신이 입을 모아 고조선을 경계하는 진언을 올렸다.
“우리 조나라는 조선과 교류한 적이 없지만, 연나라인들이 예로부터 흉노와 조선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오는 것을 두려워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소신도 태위(太尉)와 생각이 같습니다. 폐하. 오랫동안 우리 조나라를 괴롭혀온 흉노와 마찬가지로 동이족
또한 그저 야만인일 뿐입니다. 연나라 왕의 뻔뻔스러운 태도가 불쾌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쟁을 멈추고 연나라군을 이용해 중원 대륙을 넘보는 야만족을 물리치셔야 할 때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을 경계하는 대신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조나라 대신도 적지 않았다.
“폐하. 소신의 생각은 좀 다르옵니다. 연나라는 국경을 접한 모든 나라와 부족을 틈만 나면 침략해 왔으며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법을 모르는 나라이옵니다. 하지만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수학(修學) 중인 소신의 아들이 말하길 조선은 제나라와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해왔으며 다양한 잡학이 발달해 오히려 제나라 학자들이 수학 따위의 잡학을 배우려고 조선으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천하에서 학문으로는 제일이라는 제나라인들이 조선 땅에서 수학한다는 말이오? 참으로 놀랍구려.”
“연나라인들은 성정이 거칠어 야만족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니 오히려 조선과 화친을 맺는 게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선군이 요동과 요서를 휘젓고 다녀서 연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졌을 때 연나라의 도성을 취하심이 게 어떨는지요?”
“신평군(염파)이라면 능히 혼란에 빠진 연나라군을 무찌르고 계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오. 경의 말대로 이번 기회에 화북지역의 비옥한 농지를 얻어 장평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는 게 현명할 듯하오.”
반면 조나라와 마찬가지로 연나라와 원수지간인 제나라는 고조선과의 오랫동안 교류해온 덕에 요동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기뻐했고 초나라는 요동을 점령한 고조선이 육로를 통해 제나라와 초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 교역하면서 해상 중계무역의 수익이 떨어질까 봐 은근히 걱정했다.
또한 진나라, 위나라, 한나라는 고조선에 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에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면서 동이족의 약진이 자국의 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나라에서는 겁에 질린 왕과 대신들이 궁궐에 모여 망국을 피할 방법을 논했지만, 뾰족한 수를 내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5년 전에 왕좌에 앉은 연나라의 젊은 왕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로 떠나서 자리에 없는 재상 율복을 탓하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상방의 진언을 따랐다가 나라가 망하게 생겼구나! 조선의 군대가 엄리대수를 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더니! 조나라 장정은 장평에서 전부 죽었으니 한두 달이면 한단(조나라 수도)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더니! 대체 뭐 하나 들어맞은 게 없구나! 다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요동군이 통째로 동이족에게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오! 게다가 조선군 수만 명이 계를 향해 똑바로 진격해 오고 있다지 않소!”
그러나 젊은 왕의 주변에 모인 연나라의 대신 중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온 나라의 병사를 조나라 원정에 동원하는 바람에 수도인 계에 남은 수비병은 보병 2만 명에 기병 1천 기뿐이고 전차는 단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이 정도 병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벽에 의지해 고조선군을 상대로 농성을 벌이다가 이미 조나라의 국경선을 넘은 원정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관 한 명이 급히 옥좌의 곁으로 다가와서 기쁜 목소리로 연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폐하! 기뻐하시옵소서! 북방을 수호하던 상장군 극신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계에 입성했다 합니다!”
“뭐라고! 이제 살았다! 상장군이라면 동이족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게야! 상장군에게 어서 입궐하라고 전해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극신은 원래 조나라의 장군이었지만, 조나라에는 염파나 이목 같은 초일류급 명장 외에도 방난이나 사마상 같은 우수한 장수가 많아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자 조국을 떠나 연나라의 장수가 된 인물이다.
연나라는 몇 년 전 천금을 주고 극신을 데려왔는데, 지금까지 극신은 북방에서 흉노를 비롯한 유목 민족을 성공적으로 토벌하면서 연나라에서만큼은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내관이 어명을 전하자 온몸에 극신은 미늘을 갑옷을 걸친 채로 입궐해 연나라 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인사했다.
“상장군 극신이 대황 폐하를 뵙습니다.”
“상장군! 정말 적시에 와주었구려! 경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오!”
“폐하. 안타깝게도 아직은 마음을 놓으실 때가 아닙니다. 흉노를 경계할 병사를 남겨 놓느라 소장이 데려온 병력은 보병 3만 에 기병 1천 기뿐으로 요동과 요서에서 날뛰는 조선군이 합류하면 적군을 막기 어려울 겁니다.”
“그럴수가······. 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오?”
“다행히 전략을 모르는 동이족
야만족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계로 진격하고 있는 조선군이 요동의 적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요격하는 것만이 나라를 구할 길일 것입니다.”
“알겠소! 그럼 계의 수비병 중 1만 명도 데려가 요서를 지나고 있는 적군을 궤멸시키시오!”
“상장군 극신. 어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