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거침없는 북진
한부는 계의 보고를 듣자마자 아버지가 정무를 보고 있는 궁궐의 집무실에 찾아갔다.
국상부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아들이 갑자기 찾아오자 한열 왕검은 놀란 목소리로 한부에게 물었다.
“태자야.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짐을 찾아왔느냐?”
“아버지! 드디어 연나라가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연나라의 재상 율복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의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구나!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한열 왕검은 자리에서 일어나 울분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30여 년 전 집요하게 추격해오던 연나라의 기병대를 피해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건넜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태자에게 물었다.
“태자야. 연나라를 정벌할 준비는 모두 마쳤느냐?”
“물론입니다. 아버지. 상장군과 비왕이 전 조선 연합에서 모인 10만 명의 병사를 철저하게 훈련했고 군량과 병장기, 그리고 공성 무기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다만 우리 조선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기병 부족만큼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만, 연나라도 거의 모든 전차와 기병을 조나라 침략에 동원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선 연합의 250만 백성 중 장정을 10만 명이나 징집했으니 백성의 고충이 적지 않겠지······. 최대한 빨리 이번 원정을 끝낼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나저나 군대를 둘로 나눠 연나라를 친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무명 상장군이 6만 대군으로 요동군을 공략할 때 소자는 병사 4만을 이끌고 연나라의 수도 계로 곧장 진격할 생각입니다.”
“음······. 너무 도박 수가 아닌지 모르겠구나. 30만에 가까운 연나라의 대군이 국력이 약해진 조나라를 손쉽게 정벌하고 도성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연나라군은 반드시 조의 명장 염파에게 궤멸당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알겠다. 부디 부처님과 천신께서 우리 조선을 승리의 영광으로 이끌어주시길.”
한열 왕검은 태자의 말을 듣고도 연나라의 30만 대군이 계를 포위한 장남의 군대를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반면 한부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연나라의 조나라 원정군이 너무 빨리 궤멸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고조선군이 요동과 요서 지방을 점령해나가서 연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지면 염파가 원역사보다도 더 빨리 연나라의 대군을 박살 낼지도 모른다. 만약 조나라군이 우리보다 먼저 연나라의 수도 계까지 점령해버리면 재주는 조선이 넘고 화북평야는 조나라가 먹는 거지.’
한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조선군이 염파보다 먼저 계를 점령하려면 연나라 수비대의 방해를 최대한 덜 받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하고 아버지에게 그 대책을 건의했다.
“아버지, 소자와 상장군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왕검성을 떠나면 즉시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해 주십시오.”
“제나라는 올해 불과 며칠 전에 섭정이었던 군왕후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국상을 치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와중에 유약하다는 평을 듣는 제나라 왕이 군대를 움직여서 연나라를 치려고 할 것 같지는 않구나.”
“실제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까지는 소자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나라와의 국경에 배치된 제나라 병사들이 마치 연나라 정벌을 준비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그 지역의 연나라군의 발을 묶어주기만 해도 소자가 이끄는 2군이 계를 공략하기가 한결 쉬워질 겁니다.”
“계는 제나라 수도의 국경선과 그리 멀지 않으니 네 말이 맞겠구나. 알겠다. 제나라에 보낼 사절단은 짐이 준비할 테니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출진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반드시 조상님의 오랜 원한을 풀고 고토를 회복하겠습니다.”
한부는 한열 왕검과의 대화를 마친 후 연나라 원정군이 집결해있는 왕검성의 병영으로 향했다.
태자가 찾아오자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무명이 그에게 인사했다.
“상장군 무명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전히 몸소 병사들을 돌보는구려. 훌륭하오. 상장군.”
“장수 된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곧 큰 전투를 치를 병사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지요. 그런데 왕검께서 언제쯤 연나라 정벌을 시작하실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방금 왕검께 출진 명령을 받고 오는 길이오. 내일 아침에 왕검성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아주 오랜만에 전장다운 전장에 서보겠군요!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모든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고조선군은 북진을 위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기원전 249년 4월 15일 아침, 한부와 무명은 석과 사마근을 비롯한 부장 수십 명, 십만 명의 보병, 그리고 2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왕검성의 모든 왕족과 대소신료의 배웅을 받으며 왕검성의 성문을 나섰다.
한열 왕검과 모후 연은 커다란 갈색 말 옆에 서 있는 아들을 격려했다.
“병약하던 태자가 건장한 장수로 자라서 고토를 회복하러 떠나다니! 돌아가신 선왕께서도 하늘에서 보시고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정말 장합니다! 태자!”
“태자야. 네 손에 우리 조선의 운명이 달렸다. 반드시 계를 점령해 연나라군의 검에 쓰러지신 네 조부의 원한을 갚아다오.”
“소자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한부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자 아들 한준의 손을 잡고 있던 태자비 민이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전하. 이번 원정이 조선의 장래를 위해 중대한 일이라는 건 소첩도 잘 알고 있사오나 부디 옥체를 가벼이 여기지 마시옵소서.”
“부인을 걱정시킬만한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 말을 듣고 올해 열 살이 된 태자손 한준이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한부는 그런 장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천신께 맹세코 무사히 돌아오마.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가끔 운동도 하고 그래라.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꼭 그럴게요. 아버지.”
그렇게 가족과의 작별인사를 마친 태자는 말 등위에 올라서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전군 북으로 행군하라! 앞으로 열흘 안에는 엄리대수(압록강)를 건너야 한다!”
* * *
한부와 상장군 무명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왕검성에서 압록강까지 뻗어있는 로마식 포장도로 덕분에 하루에 20km를 행군하여 단 일주일 만에 현대의 신의주에서 가까운 강변에 도착한 다음 사흘 동안 뗏목을 엮어서 다리를 놓아 압록강을 건넜다.
왕검성에서 출발한 지 열흘 만에 요동에 발을 디딘 고조선의 10만 대군은 가장 먼저 도강 지점에서 남동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마을인 서안평으로 진격했다.
서안평은 원역사의 현대에는 중국의 대도시인 단둥시가 있는 위치에 있지만, 이 시대에는 그저 고조선에서 연나라로 향하는 조공 사절단이 자주 지나다니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기원전 249년 4월 25일 한낮, 성벽도 없이 허술한 나무 울타리만 둘러싸인 서안평을 지키던 연나라의 초병들이 망루 위에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고조선군을 발견하고 즉시 마을의 수비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북동쪽에서 10만에 가까운 적군이 몰려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북쪽의 예맥족
유목민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적군은 대부분 보병입니다! 아무래도 조선군이 강을 넘어서 서안평을 공격하려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조선은 바로 작년에도 계에 계신 왕께 조공을 바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조선 말고는 이 주변에서 저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나 부족은 없습니다!”
“하필 온 나라의 병사가 조나라로 몰려갔을 때 이 사달이 나다니! 어서 계에 파발을 띄워서 이 사실을 알려라!”
연나라는 고조선이 지난 몇 년 동안 연나라 왕실에 조공을 바쳐온 데다 고대에는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을 북방에서 수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압록강과 요동군 일대에 그리 많은 수비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몇 년에 걸쳐 시행된 한부의 화전양면 전술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안평의 수비 병력은 기껏해야 1천 명 정도였기에 그 곳의 연나라군 병사들은 백성들에게 고조선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소식을 알린 다음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곧 엄청난 수의 적군이 이 마을에 들이닥칠 것이다! 살고 싶은 자는 당장 양평성으로 도망쳐라!”
관군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연나라의 백성들도 최소한의 백성만 챙긴 다음 요동에서 가장 큰 요새 도시인 양평성을 향해 달아났다.
“이에 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여!”
“푸념할 틈이 있으면 보리 한 줌 이라도 더 챙기고 빨리 도망치자고!”
연나라군이 저항을 포기한 덕분에 한부와 상장군 무명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손쉽게 서안평을 점령하고 비왕 무가 와검성에서 보내올 수송부대가 지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상장군 무명은 고조선인 군단장 중 한 명에게 휘하의 병사 중 5천 명을 맡겨 서안평을 지키게 한 후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서안평의 방비 상태를 보니 전하의 예상대로 연나라는 요동에 많은 수비병력을 배치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요동 곳곳에 퍼져있는 수비병력이 모이기 전에 양평성을 공략하면 튼튼한 성을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소장은 곧바로 병사 5만 5천을 이끌고 양평성으로 진격하겠습니다.”
“앙평성은 평지에 지어져 있긴 하지만, 성벽이 높고 튼튼하다고 들었소. 정말 본인이 지휘하는 병사들과 함께 양평성을 먼저 공략하지 않아도 되겠소?”
“진나라에서 장수 노릇을 하던 시절에는 험지에 지어진 더 큰 성도 여러 번 점령해 봤습니다. 양평성 공략은 소장에게 맡기시고 전하께서는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군보다 먼저 계를 포위해 연나라군의 보급로를 끊어주십시오. 금방 요동과 요서를 제압하고 소장도 계 공략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럼 경의 제안에 따르겠소. 무운을 비오. 상장군.”
“무운을 빕니다. 전하.”
그렇게 고조선의 원정군은 서안평에서 태자가 이끄는 1군과 상장군 무명이 지휘하는 2군으로 갈라졌다.
한부는 왕검성에서 가지고 온 공성 무기를 대부분 2군에 넘기고 보병 4만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곧바로 연나라의 수도 계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동안 상장군 무명은 보병 5만 5천 명과 기병 1천 기와 함께 강행군 끝에 약 1백km를 단 4일 만에 주파하며 양평성에 도착했다.
무명은 푸른 초원 위에 우뚝 서 있는 양평성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연나라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성을 지어놨구나. 그래 봐야 날 막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지.”
양평성은 원역사에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요동성으로 개명된 곳으로 요동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양평성만 점령하면 고조선은 어렵지 않게 요동군 전체를 제압하고 고조선 본토와 요서를 잇는 병참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장군 무명은 병사들에게 양평성 근처에 숙영지를 짓게한 다음 군단장으로 승진한 부관 사마근을 비롯한 다섯 군단장을 지휘관 막사로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오늘부터 바로 양평성 공략을 시작한다. 내일까지 성곽 주변에 울타리를 두르고 망루를 세워라. 울타리와 완성되면 분온차, 정란, 발석차를 조립해 본격적으로 성을 공격한다.”
“상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