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대륙 진출 직전의 외교 (1)
태자 일행이 천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마치고 백두산에서 내려오자 고조선군의 병사들은 점령한 두 요새에서 전리품을 챙겼다.
그동안 한부는 점령한 요새의 민가 중 부족장 중 한 명이 쓰던 큰 집에서 비왕 무와 무명 장군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왕실에 항복한 옥저인들을 서쪽의 평야 지대로 이주시킬 생각이오. 행군을 시작하기 전에 파발을 띄워 그 지역을 다스리는 현감에게 미리 이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소.”
태자가 말하자 비왕이 제안했다.
“전하. 왕검께 말씀드려서 아예 이번 이주를 시작으로 동쪽의 산악지대에 사는 옥저인들을 왕검성 북서쪽의 평야 지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시행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그 지역에 널려있는 늪지대와 숲을 개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비왕의 말에 일리가 있소. 하지만 옥저인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버리면 기껏 차지한 반도의 북동부를 북쪽의 유목부족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번 이주는 농지개간보다는 왕실에 반항적인 부족을 관리하기 쉬운 지역으로 옮기는 게 주된 목적이라오.”
“아······.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경의 임무는 왕실의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니 내정에 관한 일은 모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런 일로 부끄러워할 것 없소. 그건 그렇고, 앞으로 사흘 안에는 백두산을 떠날 채비를 마쳤으면 좋겠구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태자의 명을 받은 두 장수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다시 행군을 시작할 준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고조선의 병사들은 장수들의 지시에 따라 숙영지를 철거하고 이번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우마차에 실은 후 옥저인 부족민들을 호위하며 남서쪽으로 출발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기원전 255년 7월 초, 태자가 이끄는 고조선군은 현대에는 박천평야가 펼쳐져 있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왕검성 출신의 고조선인들의 눈에는 여기저기에 습지와 원시림이 우거진 척박한 미개척지였지만, 고향을 떠나온 옥저인들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조선군을 따라온 옥저인 부족의 대표 장로 녹은 한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저희 부족민들을 살기 좋은 땅으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녹 장로. 이런 미개척지에 그대들을 데려다 놓고 과분한 감사를 받으니 조금 민망하군요.”
“이곳은 저희가 살던 산악지대에 비하면 하천이 가까워서 식수와 물고기를 얻기 쉽고 땅이 평평해서 어렵지 않게 밭을 일굴 수 있습니다. 고향보다 척박한 곳에서 살게 될까 봐 밤잠을 지새웠던 부족민들도 이제 마음을 놓았겠지요”
“새 삶의 터전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려. 다만 새로 지을 마을에는 꼭 높은 나무 울타리를 쳐야 할 것이오. 늪지대에 사는 호랑이는 산에 사는 호랑이보다 더 크고 사나우니 말이오. 이 근방에서는 하루라도 울타리 밖에서 자는 건 너무 위험하니 한동안은 왕실의 병사들이 지은 숙영지 안에서 지내도록 하시오.”
“따듯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태자는 녹 장로와의 대화를 마친 후 비왕과 무명 장군에게 이주민들이 마을을 지을 때까지 지낼 숙영지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고조선의 병사들은 근처의 숲에서 베어온 나무로 옥저 출신 백성들에게 고대 로마에서 온 건축가에게 배운 건축기술을 과시하며 불과 몇 시간 만에 백성들이 묵을 숙영지와 오늘 밤 자기들이 묵을 숙영지를 짓기 시작했다.
옥저인들은 마치 일개미 무리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면서 어지간한 요새나 다를 바 없는 시설을 올리는 고조선의 병사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인들이 건물을 짓는데 능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
“그러게 말일세. 마침 숙영지가 강가 근처에 있으니 그냥 저 울타리 안에 집을 짓고 마을로 삼아도 될 것 같아.”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이따가 녹 장로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보자고.”
숙영지를 완성한 고조선 원정군의 병사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드디어 옥저 정벌을 마치고 따사로운 초여름의 햇살을 맞으며 그리운 고향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해 7월 말, 옥저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개선장군 무명이 태자와 함께 왕검성의 성문을 지나자 그들의 주변으로 몰려든 백성들이 색색 가지 꽃잎을 공중에 뿌리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태자 전하 만세! 무명 장군 만세!”
“부처님! 천신님! 우리 조선과 왕실을 영원토록 보우하소서!”
개선군은 수 많은 백성의 환대를 받으며 대로를 지나 궁궐에 도착했고 한부와 무명 장군, 그리고 비왕 무는 왕검에게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알현실로 향했다.
내관이 알현실의 미닫이문을 열자 세 사람은 그들의 양옆으로 늘어선 대신들의 사이를 지나 한열 왕검이 앉아있는 옥좌 앞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부는 두 장수가 예를 갖춘 것을 확인한 후 왕관을 쓴 아버지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기뻐하시옵소서. 폐하. 무명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옥저의 산악 부족들을 무사히 정벌하고 조선 왕실에 복속시켰습니다.”
“무명 장군과 무 비왕이 참으로 큰일을 해냈구나! 드디어 우리 조선이 반도 전체에 세력을 뻗치게 되었구나.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이번 원정을 빠르고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데는 무명 장군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장군은 병사들을 마치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니 일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우리 조선에도 상장군의 관직을 새로 만들어 6년 후에 시작할 연나라 정벌을 맡기심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그래야지.”
한열 왕검은 아들에게 대답하면서 옥좌에서 일어나 무명 장군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에게 허리에 찬 청동검을 하사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검은 우리 조선에서 높은 직위의 장수에게 병부(兵符) 대신 하사하는 병권의 상징이오. 경은 오늘부로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장군이 되었으니 병부의 수장인 무 비왕과 함께 힘을 합쳐 대륙 정벌에 힘써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로써 고조선의 군사 조직은 강한 적과 싸워본 경험은 적지만 고조선의 내부 상황을 잘 아는 비왕 무가 현대의 국방부 장관의 역할을 맡고 정치적인 감각이 부족하지만, 당대에 동아시아 최고의 명장인 무명이 대원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열 왕검은 흐뭇한 눈빛으로 두 중년의 장수를 바라보다가 한부에게 말했다.
“태자야. 이제 우리 조선의 영토는 연나라나 위나라보다 넓고 백성의 수도 마우리아와 진나라나, 그리고 초나라를 제외하면 천하의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그리 적지 않을 것 같구나. 이제 천기를 잘 살피다 적시에 숙적 연나라를 공격하면 드디어 선왕의 원수를 갚고 조선은 단군왕검 이래 가장 큰 나라가 될 거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내정을 다지면서도 연나라를 정복한 이후에 벌어질 일에 관한 준비를 해야 할 듯합니다.”
“연나라를 멸한 다음의 준비? 그 나라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벌써 걱정하고 있는 게냐?”
“그보다 연나라와 국경을 접한 조나라, 제나라, 흉노, 그리고 조나라의 오랜 동맹인 위나라와 한나라 조선이 전국칠웅 중 하나를 멸망시킨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예측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해야 조선의 부흥이 삼일천하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상장군이 된 무명이 맞장구쳤다.
“폐하. 태자의 말이 옳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서쪽 대륙의 나라들은 대륙을 둘러싼 여러 나라와 부족들을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서쪽 대륙의 나라들이 우리 조선을 동이족이라 부르며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대륙의 여섯 나라도 자국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우리 조선과 협력하려 들지 않겠소?”
“한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진나라는 교묘한 외교술로 전국칠웅에 속한 다른 여섯 나라의 힘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데 능합니다만, 숙적 조나라와 적대관계인 막강한 흉노의 유목 부족들에게는 한 번도 사절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연나라를 멸한 뒤에도 우리 조선을 적대하지 않을 나라는 오랜 우방인 제나라뿐이란 말인가······.”
한열 왕검의 혼잣말에 한부가 다시 대답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제나라조차도 연나라를 정복한 후에는 우리 조선에 등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제나라는 우리 조선과의 무역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지 않더냐? 또 연나라와 제나라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지간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제나라가 과연 원수를 없앤 우방국을 적대하겠느냐?”
“물론 지금의 제나라는 아들 대신 섭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왕후가 현명한 정치를 펼치고 있어 자기 나라의 곳간을 채워주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조선을 적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왕후는 이미 노쇠해 조선의 병사들이 엄리대수(압록강)을 넘을 때쯤에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흠······.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제나라가 조선을 배신하지 않겠느냐?”
“왕후가 죽은 후에 제나라의 실권을 차지할 인물을 미리 매수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뭐라? 그럼 어린 제나라 왕에게도 연나라에게 하듯 공물을 바치자는 게냐?”
“아닙니다. 폐하. 암부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제나라 왕은 후승이라는 탐욕스러운 간신을 왕후 몰래 총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나라 왕후가 죽으면 분명 후승이 제나라의 상방(재상)이 될 터이니 다른 나라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 미리 후승을 잘 구슬려두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후승은 조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넣은 원흉 곽개와 함께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에서 최악의 간신이자 매국노로 꼽히는 인물이다.
원역사에서 후승은 제나라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군왕후 세상을 뜨자마자 재상의 자리에 오른 후 진나라에서 보낸 밀정들에게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받고 제나라의 마지막 왕 건왕에게 늘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자는 간언을 올렸다.
그 결과 제나라는 주변의 모든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전혀 군대를 움직이지 않다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투항하여 진나라에게 정복당한 전국칠웅 중 가장 추한 멸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역사의 제나라가 진나라에 정복당하고 나서 건왕은 깊은 숲 속에 유폐 당한 후에 굶어 죽었고 후승은 진시황에게 토사구팽 신세를 면치 못하고 처형당했으니 간신 한 명이 사욕을 채우려다 나라의 운명과 자기 신세를 모두 망쳐버린 것이다.
한부는 바로 이 희대의 간신을 진나라보다 먼저 포섭하여 조선이 연나라를 멸망시키자마자 중원 대륙의 모든 나라에게 선전포고를 당하는 상황을 피할 생각이었다.
한열 왕검은 장남의 말을 듣고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껏 나라의 중대사를 논할 때 네 예상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그 자에게 재물을 얼마나 주면 구슬릴 수 있겠느냐?”
“올해부터 매년 금 1백 근에 은 5백 근 정도는 주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뭐라고?! 은이냐 은천광산에서 넉넉하게 난다고 해도 귀한 금을 너무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
“소자가 일전에 반도 남부를 정벌할 때 막대한 금맥이 나는 장소를 봐두었습니다. 이미 그 지역 부족에게 금광 채굴권을 얻어서 금광 개발이 끝나가니 내년부터는 은처럼 금도 넉넉하게 쓸 수 있습니다.”
“흠······. 그렇다고는 해도 간신 한 명에게 들이는 비용이 그 정도라니 너무 아깝다.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
“폐하. 분명 진나라도 몇 년 후에는 후승을 구슬리려고 합니다. 서쪽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진나라와 경쟁에서 이기고 일국의 재상을 부리려면 작은 재물을 아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 후승이라는 자를 포섭하는 걸 허락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