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백기와 비왕 무의 신경전 (2)
내관 참은 태자의 명을 받고 곧 비왕 무를 한부와 무명의 앞으로 데리고 왔다.
비왕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굳은 표정으로 태자에게 읍하며 입을 열었다.
“비왕 무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비왕. 옥저의 반항적인 부족을 정벌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소?”
“이렇다 할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하. 다만 실전 경험을 쌓은 장수가 부족한 것만은 아직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지난 반도 남부 정벌은 전투를 한 번만 치르고 끝났으니 말이오. 게다가 왕검 폐하께서 몸소 원정을 진행하실 때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적은 별로 없었으니 이번 전투로.”
“그래서 전하께서 서쪽 대륙 출신의 쓸만한 장수를 등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신병 훈련을 시찰하다 바로 부랴부랴 관복으로 갈아입고 입궁했습니다. 마침 부관으로 삼을만한 장수가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명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아직 제 조선말 실력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방금 이 비왕이라는 장수가 소장을 부관으로 삼고 싶다는 말한 것 같은데 감히 소장을 눈앞에 두고 그따위 망언을 할 수 있는 장수가 천하에 있을 리 없으니 말입니다.”
“진정하시오. 무명 장군. 아직 조선의 대소신료들에게는 경의 정체를 전하지 않았소.”
태자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하자 비왕 무가 다시 말했다.
“전하. 소장은 방금 왕검 폐하를 알현하면서 무명 공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명 공의 정체는 진나라의 상장군이었던 무안군 백기라지요? 조선은 진나라와 지형과 제도가 다르니 무명 공에게 바로 장군직을 맡기는 것보다는 우선 소장의 밑에서 부관으로 일하며 군무를 익히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은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왕 바로 앞으로 다가가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촌구석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여우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시끄럽게 짓는구나!”
“조선은 마을 밖으로 10리만 나가도 맹수가 출몰하는 나라요. 이 땅에서 범을 무서워하는 자가 장수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지금까지 소장의 손으로 직접 죽인 범만 일곱 마리라오.”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잣거리의 건달들처럼 얼굴을 맞대고 눈싸움을 벌이는 두 중년 장수를 떼어내면서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무 비왕! 무명 장군! 두 사람 다 조선의 태자를 눈앞에 두고 뭣들 하는 짓이오?! 환갑을 목전에 둔 두 장군이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신병처럼 서로 다투면 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말 것이오!”
한부가 호통치자 비왕 무는 일단 한발 물러나 태자에게 사과했지만 자기 뜻을 굽히지는 않았고 무명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런 비왕을 노려보았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하오나 병조의 수장으로서 소장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견해를 굽히기 어렵습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요? 경도 제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진나라의 무안군 백기가 무패의 명장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거 아니요?”
“물론입니다. 전하. 하지만 무명 공이 진왕을 섬기던 시절에 늘 큰 승리를 거둬왔던 비결은 그저 진나라의 국력과 군대가 주변국을 크게 압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 조선의 군대가 석기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부족
연합군을 무찔렀을 때처럼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진나라는 수십 년 전부터 전국칠웅 중 가장 부강한 나라로 군림해왔습니다. 덩치 큰 성인이 주변에 모여든 어린아이들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그자를 대단한 무술의 달인이라고 여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비왕이 말을 마치자 무명이 가슴속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실력 있는 장인이 도구를 가리지 않듯이 명장은 어떤 병사를 휘하에 두더라도 승리를 거머쥐는 법입니다! 소장에게 병부를 맡겨주시면 옥저의 저항세력을 일소해 저 무례한 자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태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 두 사람 다 연나라 정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야 해야 서로 인정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중년 장수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무 비왕. 무명 장군.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소? 내년 봄에 경들에게 각각 군단을 하나씩 맡길 터이니 조선 연합에 가입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백두산 근처의 두 대부족
중 하나를 누가 더 빨리 정벌하는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거요. 비왕은 이미 잘 알겠지만, 두 부족은 세력이 비슷하다오.”
태자가 뜻밖의 제안을 하자 비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럼 만약 소장이 경쟁에서 이기면 무명 공은 장군직을 내려놓고 제 부관이 되는 겁니까?”
“무명 장군이 동의하고 왕검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오.”
“그렇다면 기꺼이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무명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장 또한 전하의 말씀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대신 이번 경쟁에서 소장이 승리하면 조선의 상장군 자리를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다만 경쟁을 하느라 아군의 정벌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다 발각되면 엄벌을 내릴 거요.”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그런 치졸한 중상모략은 소장이 가장 혐오하는 일입니다.”
“그럼 본인은 왕검께 이 일에 대한 허락을 받아두겠소. 두 사람은 그동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맡은 일을 하시오.”
한부가 명하자 두 중년의 장수는 태자에게 읍한 후 다시 한번 상대방을 노려보더니 성큼성큼 서재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부는 그런 두 사람을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혀를 한번 찬 다음 집무실에서 홀로 공문서를 읽고 있는 왕검에게 찾아가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무명과 비왕 무가 옥저 정벌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한열 왕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아들에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알력다툼이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구나.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아버지. 소자는 그래서 두 장군이 서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다 유능한 장수이니 서로의 실력을 보고 나면 분명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겁니다.”
“옥저의 마지막 저항세력인 두 대부족은 서로 가까운 곳에 산성(山城)이나 다를 바 없는 마을을 세웠으니 무 비왕과 무명 장군이 서로의 활약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 있겠지. 나라의 중대사를 장수의 역량을 겨루는 시합으로 삼는 게 마음이 걸리긴 하지만, 달리 두 사람을 화해시킬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좋다. 네 청을 들어주는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소자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전하.”
“네가 두 장수와 함께 백두산까지 동행해서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심판 노릇을 하면서 잘 감시하거라. 절대로 호랑이 부족의 난 때처럼 조선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 *
왕검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명과 비왕 무는 각자 병부를 받고 늦여름부터 내년 봄에 시작될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옥저 원정에 동원될 병사들은 올해의 가을 추수가 끝나고 징집해서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었기에 무명은 부관 사마근과 함께 우선 고조선의 병장기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기원전 256년 8월 말 어느 날, 두 진나라 출신 장수는 먼저 공성 무기를 만드는 작업장에 들렀다가 왕검성의 병기창을 시찰하면서 고조선의 첨단 기술로 만든 여러 병장기를 시찰하면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사마근은 도가니 제강법으로 제련한 강철을 벼려서 만든 환도 한 자루를 집어서 몇 번 휘둘러 보고 검은 가면을 쓴 무명에게 말했다.
“백기······, 아니. 무명 장군님! 이 철제 외날검을 좀 보십시오! 도신이 가늘고 칼날이 얇아서 장식용 검인 줄 알았는데 이게 팽배수라는 조선의 중장보병이 주로 장비하는 무기라고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조선의 철은 단단하면서도 질겨서 강철이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었지. 어디 그 말씀이 맞는지 한번 자네의 검과 그 강철검을 힘껏 휘둘러서 부딪쳐보도록 하세.”
“아무리 조선의 철이 강해도 진나라의 두꺼운 청동검과 부딪치면 날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해보면 알겠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당장 해보세나. 그 검은 내가 휘두르겠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사마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고조선의 환도를 무명에게 건네주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청동 양날검을 뽑았다.
두 장수는 물건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가서 각자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을 힘껏 휘둘렀다.
- 카앙!
두 검의 도신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대장간 안에 울려 퍼지자 사마근이 휘두른 청동검의 날이 한쪽으로 휘고 말았다.
진나라의 청동검은 구리와 주석이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고 대부분 크롬도금까지 되어있어서 주변국의 주 무기인 주철로 만든 검보다 품질이 좋았지만, 원역사의 유럽에서는 18세기 중반에나 개발된 앞선 제강법으로 만든 강철검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무명은 부관의 손에 들려있는 휜 청동검과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의 강철검은 참으로 단단하구나! 진나라에 가져가면 한 자루에 천금을 받고 팔 수 있는 명검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단단한 철로 갑옷을 만든다면 화살이나 창검으로 뚫기가 몹시 어렵겠습니다.”
“저기 있는 저 갑옷 말인가?”
무명은 손가락으로 병기창 한구석에 보관되어있는 강철 경번갑을 가리켰다.
사마근은 고개를 돌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갑옷을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다가가 경번갑을 들어 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강철제 환도에 감탄했을 때와는 달리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갑옷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너무 무겁군요. 거의 아홉 근(약 20kg)은 되겠습니다.”
“그렇게 무겁단 말인가? 전차의 기수라면 몰라도 보병에게 입힐만한 물건은 아니구먼.”
“소장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조선의 팽배수는 모두 이런 갑옷을 입는다고 합니다.”
“흠······. 이해하기 어렵구먼. 조선 반도에는 산이 많아서 지형이 험한데 어찌 가벼운 차림의 날쌘 보병이 훨씬 쓸모가 많은 걸 모른단 말인가?”
기원전 3세기 동아시아의 보병들은 보통 경제적인 문제로 제대로 된 갑옷을 몸에 걸치지 못하고 전장에 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진나라의 경우는 전술적인 이유로 유난히 경장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진나라 병사와 장수들은 현대에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병마용이 증명하듯 전장에서 날쌔게 움직이기 위해 투구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계급이 높은 장수나 전차병을 제외하면 온몸을 가리는 갑옷을 몸에 두르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런데 두 장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통역사가 빙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장군. 조선에는 방금 보신 무거운 경번갑 말고 다른 갑옷도 있습니다. 이쪽을 한번 보시지요.”
통역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무 장대에 걸려있는 지갑(紙甲)을 손으로 가리켰다.
무명은 종이로 만든 갑옷을 들어보고 두드려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화살 정도는 충분히 막아내겠군. 게다가 어지간한 피갑보다도 훨씬 가볍겠어. 이건 무엇으로 만든 갑옷인가?”
“한지를 여러 겹 겹친 다음 옻칠을 하여 만든 갑옷입니다. 불에 약한 단점이 있지만, 보시다시피 가볍고 튼튼한 데다 경번갑보다는 싼값에 만들 수 있어 쓸모가 많습니다.”
“이런 좋은 물건이 가격도 저렴하단 말인가? 그거 잘됐군! 이 갑옷과 조금 전에 들른 작업장에서 본 상자노(거대한 쇠뇌: 발리스타)를 잘 쓰면 비왕 그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