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백기와 비왕 무의 신경전 (1)
한부는 백기와 합의한 후 아버지가 왕검성 근교 시찰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알현실로 데리고 갔다.
백기가 옥좌에 앉아있는 한열 왕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태자가 그를 소개했다.
“폐하. 진나라에서 상장군 직을 역임했던 백기 공을 소개합니다.”
“흠······. 그 유명한 무안군 백기 공이란 말이지. 제나라에서 온 사신들에게 몇 번이나 그 위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진나라의 상장군이 왜 제나라 문관의 옷을 입고 이 먼 곳까지 찾아왔을꼬?”
“허락하신다면 백기 공이 직접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우리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참으로 놀랍구먼. 백기 공. 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허하겠소. 진나라를 떠나 짐을 찾아온 이유가 뭐요?”
백기는 그 질문을 듣고 고개를 들면서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한열 왕검을 바라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나라 왕이 소장을 토사구팽하려 하기에 암부의 수장 계의 제안에 따라 폐하께 몸을 의탁하기 위해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소장은 이제 무명(無名)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인으로 살고자 합니다. 폐하께서 언젠가 소장이 진나라에 복수하는 것을 허락해주신다면 조선의 장수로서 왕실의 적을 무찌르겠습니다.”
“음······. 우리 조선이 연나라를 멸하면 언젠가 진나라와 부딪힐 일이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 그나저나 암부장이 먼저 공에게 조선으로 망명하자고 제안했단 말이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폐하.”
한열 왕검은 백기의 대답을 듣고 다시 태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태자야. 아무래도 이번 일도 네 작품인 모양이구나. 백기······. 아니, 무명 공을 우리 조선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싶어서 왕검성으로 모시고 온 거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대체 어떻게 몇천 리 밖에 있는 진나라의 상장군이 곤경에 처한 걸 알고 무명 공을 등용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4년 전에 진나라군이 장평에서 조나라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명 공이 조만간 곤경에 처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백기 공을 등용할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진나라군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냈다고?”
“폐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무명 공은 지난 30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무패의 장군입니다. 거기에 장평에서 조나라군에게 대승을 거두고 적국의 상장군 조괄까지 죽였으니 주나라의 건국 공신인 주공 단이나 태공망보다도 더 큰 공적을 세운 셈이지요.”
“그렇겠지.”
“그런데 무명 공은 강직하고 아첨을 모르는 성품으로 유명하니 분명 진나라 조정에 큰 공을 세운 무명 공을 시기한 나머지 음해하는 무리가 비 온 뒤에 대나무밭에서 죽순이 자라듯 속출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허허······. 장평대전의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내다보다니. 네가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열다섯 해째인데 아직도 네 지혜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구나. 하지만 무명 공에게 병부를 맡겨도 될는지는 더 고민해 봐야겠다.”
한열 왕검이 당연히 자신을 반길 줄 알았기에 백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혹시 소장의 나이가 많아서 그러시는 겁니까?! 분명 소장의 나이가 내년에 환갑이기는 하나 아직 머리와 수염이 검고 종일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공의 능력이나 체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오. 제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말하길 공은 서쪽 대륙 일곱 대국의 장군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병법에 밝지만, 포로를 학살하는 걸 즐긴다고 했소. 그런데 우리 조선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무분별한 살생을 국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어찌 짐이 공에게 선뜻 병부를 맡길 수 있겠소?”
백기는 왕검의 대답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백기가 진나라군을 지휘하면서 죽였다고 진나라 왕실에 보고한 적군과 포로의 수를 전부 합치면 무려 약 165만 명이나 된다.
그의 보고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기는 당시의 중원 대륙 전체의 인구로 추정되는 약 3천만 명 중 5%가 훨씬 넘는 장정을 죽인 셈이다.
물론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더 많은 상을 받기 위해 왕실에 죽인 적군의 수를 부풀려서 보고하거나 사관이 역사 기록을 남길 때 전쟁에 동원된 병사의 수를 두세 배쯤 늘려서 적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사료에 남은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백기가 적어도 10만 단위의 포로를 학살했다는 것만은 사실임이 분명했다.
한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기껏 데리고 온 명장을 등용하지 못할까 봐 속을 태웠다.
‘계가 얼마나 고생해서 백기를 고조선에 데려왔는데 그저 식객 노릇이나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는 다시 한열 왕검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폐하. 도적이 검을 들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 그 죄는 도적에게 물어야겠습니까? 아니면 검에 물어야겠습니까?”
“태자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도구에 불과한 검에 무슨 죄가 있겠느냐? 당연히 도적에게 벌을 내려야지.”
“무명 공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나라는 전장에 나간 병사들에게 적의 목을 베어온 수만큼 관등을 올려주고 노비와 땅을 하사하는 국법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니 백기 공이 장평에서 이끌던 병사들 또한 40만 명이나 되는 조나라군 포로의 머리를 금덩이로 보았겠지요. 만약 이 많은 포를 그냥 풀어주었다면 불만에 찬 진나라군 병사들은 십중팔구 폭동을 일으켜 무명 공을 해쳤을 겁니다.”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넌 그 많은 조나라인을 죽게 만든 건 악법을 만든 진나라 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로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무명 공은 장평에서 붙잡은 조나라군 포로 중에서 17세가 되지 않은 소년병 240명은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만약 무명 공이 사람의 마음이 없는 살인귀였다면 어린 소년들을 살려줄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니 백기 공을 장군에 임명하셔도 폐하께서 포로를 함부로 죽이는 것을 엄히 금하시면 장평에서와 같은 학살이 다시 벌어질 일은 없을 듯합니다.”
태자가 말을 마치자 한열 왕검은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백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명 공. 태자의 말대로 짐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포로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대에게 3등급의 작위를 내리고 장군직에 임명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명 장군. 앞으로 짐과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해주길 바라오. 아, 그대와 함께 온 진나라인 중에서 장수 감이 있다면 천거해주시오.”
“소장을 보좌했던 사마근이라는 부관이 함께 조선에 왔지만, 아직 조선말이 서투릅니다. 사마근이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말 실력이 늘면 그때 폐하께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그럼 경도 먼 길을 오느라 피로할 테니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소. 곧 경과 사마근 경이 살 집을 구할 테니 그전에는 사절단이 묵는 숙소에서 여독을 푸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백기라는 이름을 버린 무명은 한열 왕검에게 인사한 후 태자와 함께 알현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궁궐의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한부가 무명에게 물었다.
“무명 장군. 혹시 경과 함께 온 사마근이라는 부관이 장평에서 기병대를 이끌었고 조나라군의 퇴각로를 끊었던 기병대장 사마근이오?”
“맞습니다. 전하. 그런데 어떻게 소장의 부관이 장평에서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를 알고 계신 겁니까? 암부장 조차도 소신이 소개하기 전에는 사마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본인은 중원 대륙의 소식에 밝은 편이라오. 사마근 경의 가족도 함께 조선에 왔소?”
“경황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음······. 그것참 유감스러운 일이구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한부는 이번 일이 불러오게 될 나비 효과가 역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기병대장 사마근이라면 그 유명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직계조상이잖아. 어차피 사마근은 백기랑 같이 숙청당할 운명이었으니 진나라에 남은 그 사람 가족들은 원역사랑 비슷하게 살아가겠지. 이번 역사의 사마천은 조선의 장수가 된 백기와 자기 조상을 어떻게 기록하려나?’
반면 무명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태자의 옆얼굴을 흘끔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까는 내가 장평에서 풀어준 소년병의 숫자를 정확하게 읊더니 내 휘하 부관의 정보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구나. 이 젊은이는 노회한 범수보다도 만만치 않은 자가 분명하니 결코 정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겠다.’
* * *
사마근은 무명이 이름까지 바꿔가며 조선의 장군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존경하는 상관을 계속 모시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고조선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명은 사마근이 어학 공부에 열을 올리는 동안 자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한부에게 고조선의 제도와 풍습을 배워나갔다.
무명 일행이 조선에 망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정오, 눈과 코, 입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 검은 철가면을 쓴 무명은 궁궐의 서재에서 태자에게 고조선의 십이등작 제도에 관한 설명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등작 제도는 숫자가 작을수록 높은 등급이었군요. 진나라에서는 숫자가 클수록 높은 등급이라 고작 3등급의 작위를 하사받은 자가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경이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먼저 십이등작제도를 먼저 설명한 거요. 그리고 조선의 등작 제도가 진나라와 다른 점이 몇 가지 더 있소.”
“전장에서 무공을 세웠을 때 말고도 학문의 발전 같은 다른 공을 세운 백성의 작위를 올려주는 법 말씀입니까?”
“그렇소. 또한, 조선의 등작 제도는 평민들이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을 두지 않고 있소. 특출난 능력을 지닌 자는 신분의 벽을 넘어 재상이나 장군이 될 길이 열려있는 것이오.”
“참으로 합리적인 제도입니다. 진나라의 이십등작제도는 8등급 작위인 공승까지를 평민이 올라갈 수 있는 상한선으로 정해놓고 하위의 1등급에서 8등급까지 작위를 민작(民爵) 이이라고 부르고 9등급 이상의 작위를 관작(官爵)이라고 부르지요. 진나라도 조선과 같은 효율적인 등작 제도를 도입했으면 더 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서재 밖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관 참이 문밖에서 태자를 불렀다.
“전하. 조금 전 비왕이 입궐해 왕검 폐하를 알현했는데, 폐하께 전하를 뵙고 싶다고 청했다 합니다.”
“비왕이? 먼저 부르기 전에는 맡은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아무래도 무명 장군을 비롯한 진나라 출신 망명자들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서 전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무 비왕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전하는 게 나을는지요?”
한부는 내관 참의 말을 듣는 순간 골치가 아파졌다.
‘음······. 이거 고민되는구먼. 무 비왕으로서는 갑자기 고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난민이 자기랑 같은 작위를 받고 장군이 됐으니 당연히 빡치겠지. 분명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데려왔을 때의 관우 같은 기분일 거야.’
그러나 고조선이 앞으로도 전국칠웅의 유능한 인재를 계속 영입하려면 토착민 출신 대신과 외국인 출신 관리나 무장 사이의 갈등을 초반부터 잘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한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관에게 지시했다.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바로 비왕을 서재로 데려와라. 이 기회에 무명 장군을 비왕에게 소개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