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왕검성에 도착한 백기
계절이 기원전 256년의 여름에 들어설 때 즈음 조선 왕실은 조선 연합에 소속된 모든 성곽도시와 큰 마을의 관리와 부족장에게 단군정음으로 적은 불경이 전달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한반도 거의 전역에 한글과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한 한부가 박사 크테시비우스와 그의 휘하에 있는 수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아라비아 숫자와 현대식 수학기호를 함께 알려준 덕에 고조선의 자연과학과 기계공학이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작년 여름부터 대만 원주민 부족의 무역상들이 아열대 지방에서 자란 통나무처럼 굵은 대나무를 고조선으로 가져와서 팔기 시작하자 왕검성 시내 곳곳에서 대나무 수도관 설치 작업도 착착 진행되었다.
왕검성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제와 과학기술의 중심지이자 불교의 성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고조선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던 기원전 256년 8월 중순, 한열 왕검은 태자와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왕검성 근교를 시찰하다가 대동강의 부둣가에 정박한 범선에서 내리는 젊은 제나라인 상인과 학생들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야. 저기를 보아라. 배에서 내린 제나라인 중에 유생의 옷을 입고 있는 자도 보이는구나. 과거에는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만 제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제는 제나라인들도 조선에 학문을 배우러 오는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폐하. 우리 조선의 무역상들이 제나라 상인들에게 불경을 전달하면서 서쪽 대륙의 상인들 사이에서 배우기 쉬운 단군정음과 소자가 만든 숫자를 섞어 써서 장부를 작성하고 불교가 유행하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직하학궁의 몇몇 학자들도 전륜성왕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면서 불교를 불가(佛家)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불가라! 그럼 서쪽 대륙의 학자들이 불교를 제자백가 사상 중 하나로 인정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유가의 시조가 공자나 도가의 시조가 노자처럼 너도 언젠가 불가의 시조인 한자라고 불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정치사상으로 정리한 것은 바로 너이니 말이다!”
“한자라니요······. 아직 이뤄야 할 것이 많은 소자에게는 과분한 칭호입니다. 폐하.”
한열 왕검은 태자가 손사래를 치면서 부끄러워하자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태자야!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자만으로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단군왕검 이래 너보다 많은 업적을 세운 조선인이 달리 있겠느냐?”
그 자리에 있던 호위병들은 왕검의 말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부는 마음 한구석에 눌어붙은 걱정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원역사라면 백기가 숙청당했을 시기가 한참 지났을 텐데도 아직 계가 돌아오질 않는구나. 설마 진나라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때, 범선에서 내린 제나라 옷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먼발치에서 태자에게 읍을 했다.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한부는 그 젊은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전생에 역사책에서 읽었던 기록이 떠올랐다.
‘뭐지? 저 아저씨 머리가 왜 저렇게 작고 특이하게 생겼어? 그러고 보니까 백기는 워낙 머리가 작고 뾰족해서 예두장군(銳頭將軍)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던데. 혹시 저 두 사람 백기하고 계인가?’
잠시 후 제나라의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왕검 일행의 곁으로 걸어오면서 거리가 좁혀지자 한부는 드디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씩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암부의 수장 계가 진나라에서 귀한 손님을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진나라에서? 네가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제나라의 옷을 입고 있거늘.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오는 자들인 모양이구먼.”
한열 왕검이 아들의 말을 듣고 정면을 바라보자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계가 함께 온 일행과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면서 왕검에게 인사했다.
“암부의 수장 계가 폐하를 뵙습니다.”
“이룡도 입단 시험 이후로 처음 보는구먼. 우리 태자처럼 늠름한 청년이 됐구나. 그나저나 암부의 일이라면 대로변에서 들을만한 것이 못 될 테지. 짐은 시찰을 계속할 테니 먼저 태자와 함께 왕검성으로 돌아가 있게.”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열 왕검은 계에게 그렇게 지시한 다음 한부에게 말했다.
“암부의 수장이 데리고 온 외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짐에게 소개할 가치가 있는 자들인지 판단해다오 ”
“알겠습니다. 폐하.”
한부가 대답하자 한열 왕검은 아들에게 호위병 몇 명을 넘겨준 다음 태자와 함께 왕검성으로 말머리를 돌렸고 한부는 계와 그가 함께 서해를 건넌 제나라인들을 데리고 궁궐로 향했다.
약 한 시간 후 왕검 일행이 왕검성의 성문을 지나자 백기를 따라온 하인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속삭였다.
“여기가 정말 왕검성이라고? 혹시 제나라의 임치에 온 거 아니야?”
“이 사람아! 우리가 여기 오느라 배를 탄 곳이 임치였잖아!”
“내가 그걸 모르겠나? 너무 놀라서 그냥 나온 말이지. 동이족의 도성이 이토록 화려한 곳인 줄 누가 알았겠나?”
“그건 그렇지. 특히 저기 보이는 높고 웅장한 저택들이 압권이구먼, 저렇게 높은 건물을 벽돌로만 짓다니 말일세.”
“분명 이 나라의 왕족이나 고관대작이나 사는 집이겠지.”
계는 등 뒤에서 백기의 하인들이 속삭이는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저기 보이는 3층 건물은 서역의 기술로 지은 인술라라는 것인데, 대부분 조선 왕실의 근위병들이 숙소로 쓰는 건물일세.”
백기의 하인들은 계의 대답을 듣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근위병이라고는 해도 병졸의 숙소가 저렇게 근사하다니······.”
“어쩌면 진나라는 몰라도 한나라와 위나라보다는 조선이 더 부유할지도 모르겠구먼.”
백기의 아내와 사마근도 거리를 오가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노점 가판대에 놓인 다양한 상품을 둘러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오직 백기만은 무표정으로 계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계는 그런 백기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에게 말했다.
“경께서는 왕검성의 시내를 처음 보시고도 놀라거나 즐거워하지 않으시는군요.”
“지금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조선이 과연 내가 진나라 왕실에 복수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줄 수 있는지 없는지 뿐일세.”
“참으로 무서운 집념이군요······.”
잠시 후 궁궐에 도착한 태자는 계와 백기 일행과 함께 알현실에 들어간 다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부는 먼저 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계야! 무사했구나! 네가 서신을 보내지 않아서 무슨 안 좋은 일을 당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한 지 아느냐?!”
“전하!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무사히 진나라의 장군 백기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잘했다! 정말 잘해줬어!”
그런데 그때, 백기가 회포를 풀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선의 태자 전하. 소장과 소장이 아끼는 자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오나 소장은 아직 조선의 왕께서 하사하신 병부를 받기로 완전히 마음을 정한 건 아닙니다.”
계는 백기의 대답을 듣고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여행길에 뭐하러 우리 조선의 말을 그토록 열심히 배우신 겁니까?!”
“계. 본인은 조선의 장군이 되면 가증스러운 상방 범수와 진나라 왕에게 복수할 희망이 있다고 해서 이 극동의 나라까지 자네를 따라온걸세. 그러니 조선이 진나라를 멸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본인을 설득해보게.”
계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닫고 말았고, 대신 한부가 진나라 출신 노장에게 말했다.
“무안군.”
“조선의 태자 전하. 저를 가증스러운 진왕이 하사한 작위명으로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진왕이 보낸 사자의 목을 치면서 그 호칭을 버렸습니다.”
“알겠소. 백기공. 왕검성 시내를 지나면서 조선이 얼마나 부유한 나라인지 봤을 거요. 왕검성의 백성 중에서 가장 가난한 자도 자식을 굶길까 봐 걱정하는 일이 없고 왕실의 국고에는 늘 금은보화가 넘치니 좋은 때를 기다리면 연나라를 집어삼키고 조선이 전국칠웅 중 하나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오.”
“부유한 나라가 반드시 천하의 패자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조선은 전국칠웅 중 가장 허약한 한나라보다도 영토가 좁고 백성도 얼마 없는 데다 제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는 친교를 맺지 않아서 정보에도 어두우니 조선이 과연 연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전하께서는 이 난관을 극복하실 계책을 세워두셨는지요?”
“흠······. 진나라의 장군께서 조선의 내부 사정에 밝을 줄을 몰랐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계에게 조선의 말을 배우면서 들었습니다.”
“허나 백기공이 알고 있는 조선의 상황은 계가 서해를 건너기 전의 것인 것 같군요. 지금의 조선은 3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오.”
한부는 백기에게 그렇게 대답한 다음 알현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내관 참에게 지시했다.
“서재에 가서 서쪽 대륙과 반도를 그린 지도를 가져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내관 참은 태자의 명을 받자마자 문을 열고 나가더니 곧 두꺼운 한지에 그린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종이를 처음 본 백기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흠······. 지도를 가져오라고 명하시기에 당연히 내관이 죽간을 들고 올 줄 알았건만, 처음 보는 천을 가지고 왔군요. 저렇게 고운 천에 지도를 그리는 걸 보면 조선의 부가 대단하긴 한 모양입니다.”
“이건 천이 아니라 종이라고 부르는 물건이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현재 조선의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리다.”
태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중원 대륙과 한반도가 그려진 지도를 펼쳤다.
물론 한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측량을 거치지 않고 한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중원 대륙의 지도를 옮겨둔 것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동아시아의 지도도 대체로 그런 식으로 그려진 것이기에 특별히 흠이 되지는 않았다.
백기는 고조선 최초의 동아시아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한부에게 말했다.
“중원 대륙의 세력 구도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군요. 다만 노나라를 지도에 그려두시지 않은 건 조금 아쉽습니다. 소국들이 멸망하는 와중에도 전국칠웅의 틈바구니에서 나름 꿋꿋하게 버텨온 나라인데 말입니다.”
“그건 백기공이 잘못 알고 있는 거요. 노나라는 작년 가을에 초나라에게 정복당했소.”
“허······! 정말로 그 노나라가 결국 멸망했단 말입니까?”
“그렇소. 상장군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동안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양이구려.”
“그 말씀대로입니다. 잠깐만······. 이만한 지도를 그리려면 몇 달은 걸렸을 텐데. 그럼 조선 왕실은 노나라가 망하자마자 그 소식을 접하고 지도 제작에 들어간 겁니까?”
“그렇소. 이제 우리 조선이 정보력이 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건 증명했소. 그리고 그 지도를 보면 우리 조선 연합은 이미 조나라나 위나라와 비슷한 넓이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요.”
“음······. 참으로 놀랍군요. 아무리 야만인 부족이 상대라도 겨우 3년 만에 영토를 몇 배나 넓힐 수 있다니. 그럼 조선의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지금은 2백만 명쯤 될 거요. 북동쪽의 옥저를 병합하면 더 늘 거고 말이오.”
“그 정도면 충분히 연나라와 자웅을 겨뤄볼만 하겠군요. 좋습니다. 언젠가 함양을 공격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기꺼이 왕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오. 다만 경이 조선의 장군이 되려면 한가지 약속해 줘야 할 것이 있소.”
“그게 뭡니까?”
“서쪽 대륙에는 경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소. 조선이 경을 등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가 있으니 앞으로는 이름을 바꾸고 집 밖을 나설 때는 항시 가면과 투구로 얼굴과 머리를 가려주시오.”
“월왕 구천은 복수를 다짐하며 매일 간과 쓸개를 씹었다는데 그 정도 불편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럼 함양을 불태우기 전까지는 소신을 무명(無名)이라 불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