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전설적인 명장을 등용하다. (2)
“으흑! 여보! 어쩌다 우리 가문이 이런 지경이 된 건가요?! 대체 어쩌다가요!”
병졸이 되어버린 무안군 일행이 함박눈을 맞으며 눈길을 5리쯤 걸어갔을 때, 백기의 아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면서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백기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면서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그녀의 이마에 가득한 주름살에 시선이 닿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반평생을 전장에서 떠도는 동안 홀로 자식들을 가르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꼬. 게다가 마흔이 넘어서도 늦둥이 아들을 낳아준 부인이 아니던가.’
그녀의 절망적인 표정을 본 백기의 머릿속에 아내에게 하고 싶은 무수히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면목없소.”
그런데 그때, 백기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 길 저편에서 말을 탄 장수 한 명이 백기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기는 선두에 선 장수의 얼굴을 알아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어려울 때 찾아오는 사람이 진정한 벗이라고 했던가. 사마근 저 친구가 날 버린 게 아니었구나.”
사마근은 백기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부하 장수이자 최측근으로 장평대전에서 기병 2만5천 기를 이끌고 40만 조나라군의 퇴로를 막았다고 알려진 유능한 기병대장이다.
사마근은 백기를 알아보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에서 내린 다음 눈이 쌓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안군! 함양을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왕께서 무안군을 벽지로 귀양보내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오랜만이구려. 그나저나 더는 경이 본인에게 존대할 이유가 없소. 본인은 이제 진나라의 상장군이 아닌 일개 병졸이니 말이오.”
“무안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평생 모시겠다고 정한 분은 오직 무안군뿐입니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은 함양 시내 곳곳에 상방 범수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역시 자네를 잘못 보지 않았구먼. 곤경에 처한 늙은이를 배웅하러 와줘서 참으로 고맙네. 자네의 부대로 보냈던 내 아들도 잘 있는가?”
“아드님은 무안군의 소식을 듣고 급히 평민으로 변장시켜서 신뢰할만한 인물의 식객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무안군께서도 어서 진나라를 떠나 한동안 은거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천하에 진나라 말고 나를 받아줄 나라가 어디 있겠나? 장평에서 40만 명의 포로를 갱살한 인간 백정 백기를 말일세.”
“연나라는 무안군께 악감정이 없고 아직 진나라와의 친분이 아주 두터운 편은 아닙니다. 이제 범수가 무안군과 가족분들을 해치기 전에 소장과 함께 연나라로 망명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닐세. 일단 벽지에서 몸을 웅크리고 기다리다가 가슴 속의 울분을 풀 날을 기다리겠네.”
“후······. 무안군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귀양지까지 호위하는 것만은 허락해주십시오. 범수 그 교활한 자가 가시는 길에 자객을 심어 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참으로 고맙네. 역시 자네밖에 없구먼.”
“여기서 5리만 더 가면 두우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의 객잔이 깨끗하고 음식이 맛있어서 묵을만합니다. 일단 그곳에서 눈이 그칠 때까지 묵도록 하시지요.”
“그렇게 하세나.”
백기는 대화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사마근이 내준 말을 타고 눈길을 지나 두우로 향했다.
일행이 목적지인 2층 객잔에 도착하자 사마근은 재산을 몰수당한 옛 상관 대신 숙박비 식비를 내고 백기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렇게 백기 부부와 사마근이 객잔의 1층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 틈에 섞여 뜨끈한 국물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을 때, 갑자기 진나라의 관리 한 명이 중무장한 병사 다섯 명을 이끌고 들어오더니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백기는 어디 있느냐?! 대역죄인 백기는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 말을 들은 사마근은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개지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대더니 관리에게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감히 누가 무안군을 그따위 멸칭으로 부르느냐!”
문관은 그의 흉흉한 기세에 잠시 움찔했다가 마음을 다잡고 손에 든 돌돌 말린 죽간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 지역의 어명을 받들어 백기를 찾아온 사자 변삼이다! 대역죄인 백기에게 어명을 전하러 왔다! 백기는 어디 있느냐!”
백기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자를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안군 백기다. 이미 어명에 따라 음밀로 귀양 가는 중인데 왕께서 본인에게 또 무엇을 바라신단 말이냐?”
그러자 변삼이 손에 든 죽간을 펼쳐서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지금부터 대왕을 대신해 그분의 명을 전하겠다. 대역죄인 백기는 들어라. 너는 짐을 능멸한 죄로 귀양을 가면서도 함양 성문을 지날 때 왕실을 저주하는 말을 읊었다. 이는 네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역심을 품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국법대로라면 너를 저잣거리에 끌어내 목을 쳐야 마땅하나 그동안 세운 전공을 고려해 검 한 자루를 하사하노라. 이 검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그대가 가장 잘 알리라 생각한다.”
백기는 사자의 말을 듣고 얼이 나가서 멍한 표정으로 서서 중얼거렸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사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눈짓으로 명령을 내려 백기에게 진 소양왕이 준 검을 전달하도록 했다.
병사가 아무런 치장도 되어있지 않은 투박한 청동검을 손에 쥐여주자 백기는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그 검을 거꾸로 잡았다.
사마근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백기의 아내는 남편을 보면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여보! 여보! 안된다 이놈들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공신 중의 공신을 이렇게 죽이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녀가 남편의 검을 쥔 남편을 잡아끌려고 하자 사자가 데려온 병사 두 명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진왕의 사자 변삼은 중년의 부인이 대성통곡하는 와중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백기의 곁으로 몇 발짝 더 다가와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는가?”
백기는 그 질문을 듣고 허탈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내 선조께서는 초나라의 왕족이셨지만, 부당하게 살해당하셨지. 나는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이릉을 불태워 선조의 원한을 갚았지만, 함양을 불태워 내 원한은 갚지 못하고 눈을 감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이······ 이런 발칙한!”
유언을 마친 백기가 눈을 감으며 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는 탁자에 앉아있던 손님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백기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왕의 사자 변삼이 성난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이건 또 뭐야! 너는 뭐 하는 놈이길래 어명의 집행을 방해하는 거냐!”
그리고 백기는 자신의 팔을 잡은 젊은이와 눈이 마주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이계! 자네가 왜 여기 있나?! 볼일을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무안군. 오랜만에 뵙는군요. 지난 한 달 동안 이 객잔에서 무안군께서 두우에 도착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곳을 지날지 어떻게 알고?”
“조선의 태자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함양에서 두우로 이어진 길목마다 사람을 심고 이 객잔을 사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역시 이곳을 지나시더군요.”
“뭐라? 이 큰 객잔을 통째로 샀다고?!”
원역사의 사료인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는 백기가 귀양을 가다가 자결하게 되는 지역의 이름이 적혀있다.
한부는 사기 열전을 몇 번이나 읽었기에 그곳의 지명을 기억하고 계에게 미리 알려줬던 것이다.
왕의 사자는 두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고 대화를 나누자 크게 화를 내면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대역죄인 백기가 목숨이 아까워서 연극을 하는구나! 저자가 자결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냥 두 놈을 죽여라!”
사자의 명을 들은 진나라 병사 다섯 명은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객잔 손님으로 위장해 있던 고조선 암부의 조직원 수십 명이 병사들보다 먼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면서 일제히 진나라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크어어억!”
“끄아아아아악!”
불의의 기습을 당한 진나라 병사들은 검집에서 청동검을 뽑아보기도 전에 목과 갑옷의 틈새를 비수에 찔려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진왕의 사자 변삼은 그 모습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볼품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객잔 입구를 향해 도망쳤다.
“히이이이익! 반역이다! 백기가 반역을 일으켰다!”
그러나 객잔의 출입문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계의 부하들은 그가 문에 다가가기 전에 제압해서 밧줄로 포박해버렸다.
“이놈들아! 이거 놔라! 이놈들아!”
백기는 놀란 눈으로 왕의 사자가 붙잡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주변을 둘러본 다음 계에게 물었다.
“설마 이 객잔 안의 손님은 전부 자네의 부하인가?”
“그렇습니다. 무안군.”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일단 평범한 제나라 상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구먼.”
“다시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소신은 조선 왕실의 직속 기관인 암부의 수장 계라고 합니다.”
“허······. 조선이라면 수십 년 전에 연나라에게 2천 리 땅을 빼앗긴 동이족의 나라이지 않나. 간신히 멸망만은 면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데 진나라에까지 간자를 심었었다는 말인가.”
“그동안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무안군.”
“입바른 소리는 됐다. 대체 조선 왕실이 무슨 목적으로 몇천 리 밖에 있는 진나라에 간자를 보내서 내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거지?”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조선의 태자께서 무안군을 등용하고 싶어하십니다.”
“하하하하하하! 진나라의 상장군 자리도 걷어차 버린 내게 동이족
약소국의 장군이 되라고 말하는 거냐?!”
“무안군께서는 방금 함양을 불태워서 진나라 왕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조선의 태자께 충성을 바치면 진나라 왕실에 복수할 기회를 잡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연나라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조선이 무슨 수로 진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요즘 조선은 연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고 들었거늘.”
“조선 왕실은 월왕 구천이 그랬듯이 연나라에 선조의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은밀히 조선의 국력을 길러오셨습니다. 소신이 함양에서 돈을 물 쓰듯 쓰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재물이 다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음······.”
“게다가 조선의 태자께서는 이미 오늘 벌어질 일을 예견하시고 소신을 일찌감치 함양에 파견하실 정도로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무안군의 군사적 능력이 더해지면 조선은 순식간에 연나라를 집어삼키고 진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백기는 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사마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마근은 백기의 표정을 보고 그의 뜻을 알아채고는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안군이 어디를 가시든 소장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고맙네. 사마근.”
백기는 충직한 부하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손에 든 검을 한 손에 들고 밧줄에 묶여서 번데기처럼 바닥에 쓰러져있는 진왕의 사자에게 다가갔다.
사자는 백기의 발끝과 그거 아래로 늘어뜨린 검을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중얼거렸다.
“무······ 무슨! 살려줘! 난 그저 어명을 전했을 뿐이라고!”
백기는 대답 없이 두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검을 높이 든 다음 아내에게 말했다.
“부인. 눈을 감으시오.”
안색이 창백해진 백기의 아내가 눈을 감자 그는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 사자의 목을 내리쳤다.
- 콰앙!
묵직한 청동검이 사자의 목을 일도양단하고 나무 바닥에 박히자 백기가 검 자루에서 손을 떼고 다시 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제 한동안은 우리가 조선으로 도망치고 있다고 밀고할 자는 없네. 그런데 왕의 사자와 병사들을 죽였으니 곧 진왕과 상방이 추격대를 보낼 텐데. 어떻게 진나라를 빠져나갈 생각인가?”
“무안군하고 부인과 체격과 골격이 비슷한 최근에 병사한 중년 남녀의 시신을 준비해뒀습니다. 그 시신을 이 객잔의 바닥에 늘어놓고 불태우면 무안군께서 병사들과 사자를 모두 처치하고 객잔에 불을 질러 부인과 함께 자결하셨다고 알려지겠지요.”
“그럴듯한 방법이군. 그럼 어서 이 나라를 떠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