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전설적인 명장을 등용하다. (1)
태자가 두 해에 걸쳐 종이와 한글 발명에 힘쓰면서 고조선의 문화 부흥기를 이끄는 동안 계는 제나라 출신의 부유한 상인으로 위장하고 부하들과 함께 중원 대륙에 숨어들었다.
그는 기원전 258년 9월 즈음에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한부가 공작자금으로 쓰라고 준 은덩이를 판 돈으로 커다란 기와집을 얻고 고조선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진나라의 유명인사들에게 선물하면서 인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진나라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을 외교정책으로 삼고 진나라에서 거리가 먼 제나라와는 친교를 맺고 있었기에 많은 진나라의 유력자들이 계가 접근하면 그를 내치지 않고 제나라의 사정을 물으며 친분을 쌓으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부가 꼭 고조선으로 데려오고 싶어 하는 진나라 최고의 명장인 무안군 백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계는 많은 시간과 재물을 들여서 백기와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노력했고 진나라 재상 범수의 중상모략으로 권세를 잃고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혀 있던 백기는 총명하고 부유한 젊은이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갔다.
그렇게 약 1년이 흐른 후 기원전 257년의 10월이 시작되던 날 한낮, 계는 여느 때처럼 선물이 들어있는 비단 보자기를 손에 들고 함양 한복판에 있는 백기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그가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을 두드리자 젊은 남자 하인 한 명이 문을 빼꼼 열고 밖을 내다보더니 얼른 허리를 굽히며 계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이 녀석아. 겨우 닷새 만에 만났거늘 꼭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는구나.”
“그야 상심하신 무안군을 달래실 분은 나리밖에 안 계시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요!”
“무안군께서 또 대낮부터 홀로 술잔을 들고 계시는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나리. 그저께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간 후로는 안주도 없이 술잔을 비우고 계시지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어서 날 무안군께 안내해라.”
계는 하인을 따라 대문을 안으로 들어서서 정원을 지나 백기가 있는 저택의 안방 앞에 섰다.
그러자 하인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기도 전에 닫힌 방문 안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나의 벗 이계가 찾아온 모양이구나.”
“어?! 맞습니다.”
“마침 헛소리를 듣고 분통이 터지던 차에 잘됐구나. 어서 들어오라고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인이 미닫이문을 열자 계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반상이 차려진 작은 탁자 앞에 앉아있는 백기가 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게. 이계. 그렇지 않아도 그대가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그대의 집으로 쳐들어갈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안군.”
“고맙기는. 하루아침에 권세와 병권을 잃은 노장을 일부러 찾아와서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은 오직 자네뿐일세.”
계는 백기의 대답을 듣고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노장이라. 누가 저 매서운 장수를 보고 내년에 환갑이라고 생각할까?’
백기는 키가 170cm 초반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도 거인 소리를 들을 만큼의 장신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전신에 근육이 탄탄한 데다 흰머리와 흰 수염이 거의 없어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또한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그것과 같이 날카로워서 눈을 마주치는 이가 움찔하게 하는 박력이 있었다.
계는 백기의 앞자리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인은 사업상의 볼일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갈 외지인이지 않습니까? 진나라 사람들이야 무안군을 홀대하시는 왕과 상방(相邦: 전국시대 재상의 관직명) 범수의 눈치를 보느라 무안군과 친분을 쌓는 것이 두렵겠지만, 소인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음······. 지금은 왕과 상방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네.”
“지난 닷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오대부 왕릉이 나 대신 장군이 되어서 십만이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가 조나라군에게 역습을 당했다고 하네. 어찌나 크게 패했는지 장수를 다섯 명이나 잃었다고 하더군. 염파 그 교활한 늙은이가 조나라군을 지휘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허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재작년까지만 해도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황이 그렇게 바뀌었단 말씀입니까?”
“내 말이 그 말일세! 범수 그 옹졸한 자가 내가 큰 무공을 세우는 게 샘이 나서 왕께 거짓된 간언을 드리는 바람에 큰일을 그르쳤어! 장평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로 한단을 포위했으면 두 달이면 점령할 수 있었어! 그래놓고선 왕께서는 이제 와서 사람을 보내 나보고 다시 장군직을 맡아 조나라를 치라고 하시더군!”
“어명을 받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당연하지! 이제 왕께서 직접 날 찾아와 사과하시지 않는 이상 절대로 병부를 받지 않을 걸세!”
백기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 쾅!
그러자 술이 들어있던 호리병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하얀 술이 흘러나와 작은 폭포처럼 탁자 밑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는 바짓자락이 술에 젖지 않게 하려고 자세를 고치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여전히 오만해 보일 정도로 강한 자존심이구나. 하긴, 백기가 지금까지 세워온 공적을 생각하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주나라의 태공망을 능가하는 공적을 세워왔으니’
백기는 지난 30여 년 진나라와 국경을 접한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초나라의 성을 70여 개나 빼앗았으며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진나라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했던 초나라는 초나라 수도였던 영을 빼앗기고 이릉 등 많은 대도시가 잿더미가 되어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고 초나라 다음으로 진나라의 라이벌로 떠오른 조나라도 3년 전 백기가 장평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류국가로 전락해버렸다.
과장을 좀 보태면 원역사에서 진나라의 중원 통일은 강력한 정복군주 진 소양왕과 명장 백기가 거의 기초공사를 마쳐놓은 집을 진시황이 마감 공사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백기는 군사적 재능만큼의 정치적 감각이 없었기에 상방 범수를 정적으로 돌리고 마침내 왕의 분노를 사서 결국 진나라 대신들 사이에서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분노한 노장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계가 말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안군. 급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냐?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방해하지 마라.”
“그게······. 대문 밖에 응후께서 무안군을 뵈려고 찾아오셨습니다.”
“뭐?! 그 파렴치한 자가 뭐하러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이냐?!”
“무······ 무안군께 어명을 전하러 왔다고 합니다.”
“어명을?! 우선 들여보내라!”
응후(應侯)는 상방 범수가 응읍(應邑) 땅의 후작으로 봉해지면서 얻게 된 작위 명으로 공석에서 그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계는 하인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백기에게 말했다.
“무안군께서 어명을 받으시는 자리에 제가 함께할 수는 없지요. 저는 잠시 자리를 뜨겠습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곧 진나라를 떠날 벗과의 한때까지 방해하는 구먼.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주게.”
“그리하지요.”
잠시 후 하인은 진나라의 재상 범수를 백기와 계의 앞으로 데리고 왔다.
보라색 비단옷을 입은 범수는 방문 밖으로 나서면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계와 탁자 위에 쓰러져있는 술병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백기에게 말했다.
“무안군. 일전에는 왕께서 보내신 사자에게 중병을 앓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다시 건강을 되찾으신 것 같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백기는 그 말을 듣고 히스테릭한 웃음을 웃으면서 대답했다.
“허허허허허! 응후! 본인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린 당사자에게 그따위 인사치레를 들으니 더욱 지병이 도지는 듯하구려! 거두절미하고 본론이나 말하고 돌아가시오.”
“그럼 무안군의 말씀대로 하겠소. 대왕께서는 경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해 본인을 보내셨소. 병부를 받들어 외지에서 죽어가는 진의 병사들을 구하고 조나라 정벌을 마무리하시오. 무안군(武安軍)이라는 작위명 대로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워 나라를 평안하게 하면 왕께서도 경에게 항명죄를 묻지는 않으실 것이오.”
“일전에 왕께서 보내신 사자에게 말했듯이 본인의 병이 중해서 아직 말안장 위에 오르기 어렵소.”
“그런 분이 손자뻘의 벗과 어울리면서 볼이 빨개지도록 술을 마신단 말이오? 꾀병 부리지 말고 어명과 병부를 받드시오.”
“경께서 중상모략 이외에 의술에도 통달하신 줄은 몰랐구려. 본인의 모습을 한번 훓어본 것만으로도 오장육부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시니 말이오.”
범수는 백기의 대답을 듣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그에게 전하고 뒤돌아섰다.
“경이 선택한 일이니 후회하지 마시오.”
계는 방문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만간 백기는 진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겠구나. 이제 마지막 준비만 하면 되겠다.’
* * *
기원전 256년 1월 초, 진나라의 소양왕은 계속 병을 핑계로 장군직을 거절하는 백기를 일개 병졸로 강등시키고 벽지인 음밀로 귀양갈 것을 명했다.
결국 백기는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가족과 하인 열 명만을 데리고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저택을 떠나 귀양길에 올랐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함양성의 성문을 나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월나라의 명신 문종이 월왕 구천에게 죽임을 당했듯이 나도 토사구팽을 면치 못했구나. 배은망덕한 진나라의 번영도 월나라처럼 그리 길지 못하리라.”
그런데 백기의 말을 들은 성문의 초병이 그 사실을 진나라 왕에게 보고했고 진 소양왕은 크게 노하며 범수를 비롯한 몇몇 신뢰하는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모아서 상의했다.
“백기 그자가 귀양을 가면서도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뼈 있는 말을 읊었다고 하오. 이 자를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상방 범수가 진 소양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폐하. 무안군의 오만방자함이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이런 자의 숨을 붙여두면 나쁜 전례를 남기게 되니 목숨을 거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짐도 진작에 응후의 말대로 하고 싶었지만, 백기를 존경하는 백성이 적지 않으니 잡아다가 참수하면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두렵구려.”
“아직 백기는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자에게 사자를 보내 단도 한 자루를 주면 폐하의 뜻을 이해하고 자결할 겁니다.”
“그러다가 백기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기라고 하면 큰일이지 않겠소? 반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도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자요. 게다가 우리 진나라의 군사기밀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자이니······.”
“폐하. 백기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초나라의 백성을 죽여왔습니다. 네 나라의 백성들은 자주 진나라 쪽을 바라보면서 ‘백기를 죽여서 고기를 삶아 먹고 싶다.’고 한탄한다고 하니 그 네 나라에 망명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제나라와 연나라로 도망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소?”
“우리 진나라에서 제나라나 연나라로 가려면 조, 위, 한 삼국을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백기가 성난 백성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제나라와 위나라는 현재 우리 진나라와 친분을 다지고 싶어 하는 데다 주변국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을 테니 백기가 망명해 온다 한들 목을 잘라서 폐하께 바칠 겁니다.”
“음······. 응후의 말에 일리가 있구려. 당장 추격대와 사자를 보내 백기를 쫓도록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