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단군정음
세월이 흘러 기원전 258년의 봄이 찾아오자 드디어 태자비 민이 열 달의 임신 기간을 채우고 출산일 맞이했다.
태자비는 왕검성 궁궐 안에 있는 태자비의 침실에서 산파와 여러 궁녀의 보살핌 속에서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한부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침실 밖을 서성이다가 아내의 비명을 듣고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처님! 천신님! 제발 아내와 아이 모두 무사히 지켜주십시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자 이마에 땀이 흥건한 궁녀 한 명이 침실의 문을 열고 태자에게 다가오더니 밝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기뻐하십시오! 태자 전하! 태자비께서 건강한 태손을 생산하셨습니다!”
“그보다 부인의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태자비께서도 무사하십니다! 전하! 어서 안으로 드셔서 태손을 만나보시지요.”
한부는 궁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침실 안으로 들어가 창백한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부인. 참으로 고생 많았소. 부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 하지만 우리 아이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격통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말에 태자는 고개를 돌려 갓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게 말이오. 그대를 닮아 참으로 사랑스럽구려.”
그가 궁녀들이 고운 비단으로 양수와 피를 닦아낸 아기의 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아기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펴서 아버지의 굵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태자비가 잠시 통증을 잊고 활짝 웃으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전하! 아직 눈도 못 뜬 갓난아기가 벌써 아버지를 알아보는 모양입니다! 어서 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허’라고 지으면 어떻겠습니까?”
“글쎄······. 그 이름도 좋지만, 준할 준(準) 자를 써서 한준이라고 지으면 어떻겠소? 이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조선이 서쪽 대륙의 전국칠웅에 못지않은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겠다는 의미라오.”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준도 좋은 이름인 듯합니다. 준아! 어서 자라서 전하처럼 늠름한 청년이 되어야 한다!”
한부는 첫 자식의 이름을 원역사에서 고조선 토착 왕계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과 같은 이름으로 짓고 다시 한번 고조선 부흥의 목표를 가슴에 새겼다.
‘이번 역사에서는 이 아이가 왕위를 찬탈당하고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되는 일이 없어야지. 그러려면 모든 분야에서 고조선의 국력을 길러야 한다. 내일부터 시작될 탄광 개발이 그 시발점이 될 거야.’
그는 작년 11월 즈음에 한열 왕검에게 탄광 개발을 허가한 이후 봄 햇살이 얼어붙은 땅을 녹이자마자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지난 몇 달 동안 왕검성의 대장간에서는 석탄 채굴에 사용될 철제 곡괭이와 삽 수백 자루가 생산됐고 작업에 동원될 한반도 남부 출신인 건장한 남자 노비들은 태자에게 앞으로 3년 동안 탄광 개발 작업을 견디면 면천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기가 오른 상태였다.
한부는 모든 정책이 자신의 계획대로 풀린다면 고조선은 연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평양, 아니 왕검성 탄전 개발은 어떤 의미에서는 강철 제련술 도입보다 중요한 사업이다. 증기 방앗간이 왕검성에 하나둘 들어서서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농업에 종사해야 할 인력은 줄어들고 대신 공업이나 군사 분야로 돌릴 수 있는 인력은 그만큼 늘어날 테니까.’
태손이 태어난 다음 날 아침, 한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장남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고는 탄광 토목공사의 지휘를 맡은 제1 공조박사 드루수스와 함께 인부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왕검성의 성문을 나섰다.
태자 일행이 대동강을 따라 서쪽으로 약 20리쯤을 행군했을 때, 크테시비우스와 함께 탄맥을 발견했던 인도 출신 기술자가 한국 조어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바로 이 부근이 작년에 탄맥을 발견했던 곳입니다.”
“왕검성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석탄이 묻혀있다니! 부처님과 천신께서 조선과 왕실을 보살피시는구나! 갱도를 어느 정도 깊이로 파고 내려가야 석탄을 캘 수 있겠느냐?”
“노천광산을 개발해도 충분한 석탄을 채굴할 수 있을 테니 굳이 갱도를 팔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럼 땅거죽을 조금만 걷어내면 석탄을 캘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한부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 역사에서는 우리나라에 노천 탄광은 거의 없었는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구나! 21세기의 평양 탄전하고는 달리 일제의 수탈을 당하지 않아서 지표 바로 밑에도 석탄이 많이 남아 있나 보다! 아니면 시대가 시대다 보니까 지층이 현대보다는 좀 더 얇은 건가?’
박사 드루수스도 기술자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어려운 공사를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 그저 이 주변에 캐낸 석탄을 저장할 창고와 인부들이 쉴 쉼터를 짓고 길이나 좀 닦으면 충분하겠군요.”
“아, 박사. 석탄을 캘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소. 석탄은 왕검성의 제지소와 대장간, 그리고 방앗간에서 필요한 만큼만 캐고 석탄을 충분히 캐낸 곳은 반드시 흙으로 다시 덮도록 하시오.”
“전하. 기왕이면 조선의 모든 백성이 나무나 숯 대신 석탄으로 아궁이에 불을 땔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석탄을 생산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 근처에는 조선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열수(대동강)가 흐르고 있소. 노천탄광에서 나온 더러운 먼지나 이물질이 열수에 많이 흘러들면 이곳보다 하류에 사는 백성들이 병을 얻고 말 것이오.”
“허······ 그런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전하의 박식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한부는 로마 출신 박사의 칭찬을 듣고 대답을 하는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저 전생에 인터넷 기사에서 읽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을 뿐인데 뭐.’
노천광산은 갱도를 파서 광물을 채굴하는 방법보다 채굴비용이 훨씬 저렴하고 안전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낮지만,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하는 편이다.
특히 채굴 과정에서 지표에 노출된 여러 중금속 물질이 빗물에 섞여 하천에 흘러들거나 지하수에 스며들면 인근 주민의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 발견한 노천탄광은 왕검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큼 특히 주변 환경오염에 특히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드루수스는 그날 이후로 태자의 명에 따라 대동강에 오염물질이 최대한 덜 흘러들도록 신경 쓰면서 인부들을 지휘해 노천탄광을 개발했고 계절이 초여름에 들어서자 왕검성에 석탄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크테시비우스는 석탄을 가득 실은 마차 몇 대가 자신의 작업장에 도착하자 크게 기뻐하면서 이미 올해 봄에 만들어둔 증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절구의 아궁이에 석탄을 넣고 불을 지펴 시운전을 해보았다.
잠시 후 석탄이 아궁이에 연결된 물통의 물이 끓어 발생한 수증기가 관을 타고 올라오면서 밸브실 안의 피스톤을 밀어내면서 피스톤과 연결된 바퀴를 돌렸고 그 바퀴와 연결된 절구가 반복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였다.
“됐다! 제대로 작동한다고! 이제 인부를 반의반만 쓰고도 값싼 종이를 잔뜩 만들 수 있겠어!”
신이 난 크테시비우스는 태자에게 추가 예산을 요청해서 더 많은 증기기관 절구를 만들어냈고 왕검성 곳곳에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제지소와 방앗간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제조공정은 단순하지만 만드는데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면섬유지와 대마 종이의 개발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고조선의 왕실은 그해 가을까지 많은 종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원전 258년 9월, 한부는 박사 크테시비우스가 직접 가져온 면섬유지를 받아서 살펴본 다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칭찬했다.
“정말 다 떨어진 헌 옷 조각으로 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참으로 큰일을 해냈소! 이제 두세 해만 지나면 조선의 모든 백성이 본인이 발명한 한지와 경이 발명한 값싼 종이로 만든 불경을 읽게 되겠구려!”
“반드시 앞으로 몇 년 안에 왕검 폐하와 전하의 뜻대로 부처님의 말씀이 반도의 남쪽 끝까지 닿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불경 발간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려면 종이와 더불어 새로운 필기구를 도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 종이에 칼집을 낼 수는 없으니 관리들에게 서도 대신 붓을 쓰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지요.”
“제나라의 붓도 물론 쓸모가 있지만, 소신의 고향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깃펜을 도입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듯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겠소?”
“제나라산 붓은 품질이 뛰어나지만, 재료비가 비싸고 제조방법이 복잡한 데다 글을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많은 공문서를 작성하는 관리들에겐 쓰기 불편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깃펜은 붓보다 저렴한 재료를 사용하여 빠르게 만들 수 있고 글을 쓰기도 더 편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구려. 그리고 잉크는 비싼 소나무를 태운 가루가 없어도 만들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잉크도 먹처럼 송연(松煙)으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오징어 먹물 같은 다른 재료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흠······.”
기원전 3세기의 동아시아에서 붓과 먹은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서 사치품으로 취급되며 아직 널리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의 서양에서 널리 쓰이던 깃펜은 새의 깃털 끝을 자르고 다듬기만 하면 만들 수 있어서 훨씬 경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부는 동양적인 멋이 있는 붓과 먹을 포기하지 않았다.
“경의 제안대로 앞으로 호적장부 같은 공문서 작성에는 깃펫을 사용하되 역사서 등의 중요 서적을 편찬할 때에는 붓과 먹을 사용할 것이오. 그러니 붓글씨에 사용할 먹과 깃펜에 찍어 쓸 잉크를 모두 넉넉히 만들도록 하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크테시비우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보고를 마치고 태자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한부는 그런 그리스 출신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종이랑 필기구는 완성됐으니 얼른 한글을 좀 더 손봐야겠네. 아무래도 현대 한글보다는 훈민정음하고 가까운 편이 이 시대의 발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지.”
* * *
기원전 257년 1월 초, 한부는 몇 달 동안 집무실에 틀어박힌 끝에 한국 조어의 발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글을 다듬은 다음 조선의 훈민정음에 해당하는 책을 발간했다.
그는 집필을 마치자마자 궁궐의 알현실에서 여러 대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열 왕검에게 자기가 쓴 책을 바치면서 말했다.
“폐하. 소자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새로운 문자를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이 글은 제나라나 마우리아의 문자보다 배우기 쉬우니 부디 조선의 모든 백성에게 이 글을 가르쳐 부처님의 말씀이 남해안에서 엄리대수 강변(압록강)까지 닿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태자야. 참으로 고생 많았다. 우리 조선도 서쪽 대륙의 전국칠웅처럼 고유의 문자를 갖게 되었으니 조만간 천하에 조선을 야만인의 나라라고 깔보던 무리가 봄날에 눈 녹듯 사라지겠구나. 그래서 그 새 글은 뭐라고 부를 생각이냐?”
“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우리말을 바르게 표현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단군정음’이라 부를까 하옵니다.”
“단군정음이라! 참으로 훌륭한 이름이다! 어서 새 글을 전국에 배포하여 여자와 평민도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여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