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종이에서 시작된 혁신
기원전 259년 10월 말 어느 날, 왕검성의 외곽에 마련된 제지소에서 근무 중이던 기술자 한 명이 갑자기 우렁찬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성공했다! 박사님! 드디어 제대로 된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제지소 안을 시찰 중이던 박사 크테시비우스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환호성을 지른 기술자에게 달려가서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흠! 표면이 매끈한 것이 겉보기에는 그럴싸하구먼. 그 종이를 내게 줘 보겠나?”
“여기 있습니다. 박사님.”
크테시비우스는 제지기술자에게 널찍한 종이를 받은 다음 얼굴 가까이에 대고 살펴보다가 갑자기 종이를 쥔 두 손을 교차하며 찢으려고 했다.
그러자 종이를 만든 제지기술자가 집에 불이 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볼멘소리를 질렀다.
“박사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은 열 근이 걸려있는 귀한 물건이란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크테시비우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허허허! 너무 놀라지 말게.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외발뜨기 방식으로 만든 종이 중 상등품은 워낙 질기고 튼튼해서 결대로 찢지 않으면 잘 찢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네. 이 종이는 꽤 힘을 줘서 잡아당겼는데도 찢어지지 않는 걸 보니 품질이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럼 이제 은덩이는 제 차지로군요!”
“아직 좋아하기는 이르네. 이 종이에 먹으로 글을 쓴 다음 물에 빨아서 글자를 지우고 다시 사용하는 시험이 남아있거든.”
“네?! 박사님! 품질검사 기준이 너무 가혹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니 내게 하소연해봤자 소용없네.”
“아······.”
제지기술자는 박사의 말을 듣고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그가 만든 종이는 두 번째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다.
크테시비우스는 물에 빨아서 말린 종이에 제대로 글이 적히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옆에 있던 제지기술자에게 말했다.
“축하하네! 이제 은 열 근은 자네 차지일세!”
“부처님! 천신님!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먼. 내 곧 입궁해서 왕검 폐하와 태자 전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오겠네.”
“여기서 꼼짝도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시 후 크테시비우스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더러운 작업복을 관복으로 갈아입고 콧노래를 부르며 궁궐로 향했다.
궁에 도착한 그는 한열 왕검이 다른 대신들을 만나고 있다는 내관의 말을 듣고 먼저 국상부에서 업무를 보느라 죽간에 글을 새기고 있는 태자를 먼저 찾아가서 기쁜 소식을 알렸다.
“태자 전하! 기뻐하십시오! 드디어 종이가 완성됐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이번에는 본인이 말했었던 두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한 거요?!”
“그렇습니다! 전하! 소신이 직접 품질검사를 해본 결과 결대로 잡아당기지 않으면 잘 찢어지지 않고 물에 빨아서 다시 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습니다!”
“지금 당장 제지소로 갑시다!”
한부는 크테시비우스의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든 죽간과 서도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궁궐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제지소에 도착한 태자는 원역사의 전통 한지와 거의 비슷한 품질의 종이를 보고 감탄하면서 그것을 만든 제지기술자를 극찬했다.
“정말 큰일을 해냈구나! 약속대로 너의 관등을 12등급에서 11등급으로 올리고 은 열 근을 하사하겠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제지기술자는 태자가 약속을 지키자 기뻐서 날뛰었고 한부는 한번 물에 빨아서 말렸음에도 빳빳한 종이의 결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전통 한지는 보관만 잘하면 천 년이 지나도 멀쩡하지. 이번 역사에선 고조선왕조실록이 21세기까지도 보존될 거다.’
한민족
특유의 외발뜨기 제지법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의 쌍발뜨기 제지법보다 훨씬 오래가는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원역사에선 서기 8세기에 전통 한지로 만들어진 신라의 목판 인쇄물인 한국의 국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300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현대까지 전래 되었다.
또한, 전통 한지는 워낙 질겨서 조선 시대에는 여러 겹을 겹친 다음 옻칠을 해 화살을 막아낼 정도로 튼튼하고 가벼운 종이 갑옷인 지갑(紙甲)을 만들어 궁수와 수군에게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우수한 한민족의 전통 한지에도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생산성.
전통 한지의 제조법인 외발뜨기 제지법은 쌍발뜨기 제지법보다 생산속도가 절반 정도인 데다 제작 과정에 손이 많이 가서 제조비용 또한 다른 종이에 비해 높았다.
크테시비우스는 이런 단점을 금세 파악하고 태자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전하. 전하께서 고안하신 종이는 파피루스나 죽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매우 우수하지만,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제지법이 까다로워 제지장인을 육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가을에만 수확할 수 있고 아직 재배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닥나무가 주된 재료이다 보니 재료 수급도 쉬운 편은 아니지요.”
“박사의 말이 옳소. 그러니 한동안은 종이와 죽간을 혼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소.”
“그보다는 이 종이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싼값에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저급 종이도 개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닥나무의 섬유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식물이나 천의 섬유로도 능히 종이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구려. 값싼 종이의 재료로는 뭐가 좋겠소?”
“예를 들어 조선에서 많이 재배하는 데다 1년이면 다 자라는 삼의 줄기나 헌 옷의 조각으로도 종이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백성이 종이를 넉넉하게 쓸 수 있게 되겠지요.”
크테시비우스의 말을 듣고 한부는 원역사의 서양에서 쓰였던 여러 종이를 떠올렸다.
‘대마 종이에 면섬유 종이라? 그거 괜찮네! 미국의 독립선언문도 대마 종이에 적혀졌는데 현대까지 보존됐었지. 한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오래갈 거야. 면섬유 종이도 중세 유럽에서는 널리 사용했다니까 제조법만 확실히 개발하면 서양식 종이도 쓸만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크테시비우스에게 새로운 종이 개발에 대해 조언했다.
“경의 말에 일리가 있소. 다만 삼 줄기나 천 조각으로 종이를 만들려면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 때와는 다른 제지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아마도 대마나 천 조각으로 만드는 종이는 전하께서 개발하신 제지법보다는 공정이 간단하지만, 대신 절구에 재료를 넣고 찧은 과정이 필요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경도 알다시피 우리 조선은 늘 일손이 부족하오. 그러니 값싼 종이를 만들려면 절구로 재료를 찧은 과정을 기계장치를 먼저 발명할 필요가 있겠구려.”
“소신의 생각도 전하와 같습니다. 조선에는 강이 많으니 먼저 수력을 이용해 절구를 찧는 장치를 개발해 보겠습니다.”
“음······. 물레방아를 말하는 거구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
“해보지 않고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소신에게 맡겨주십시오!”
크테시비우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한부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세종대왕님도 결국 못하신 일을 고조선 시대에 해낼 수 있겠냐고.’
한반도는 여름에만 비가 많이 내리고 봄과 겨울에는 강수량이 적어서 계절에 따라 하천에 흐르는 물의 양이 많이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강수량이 적은 봄과 겨울에는 강에 충분한 물이 흐르지 않아 기껏 물레방아를 설치해도 제대로 돌지 않는 경우가 많다.
원역사의 조선은 이런 자연환경의 한계 때문에 세종대왕 시대부터 중국이나 일본처럼 물레방아를 활용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음에도 근대 이전에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없었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기술 발전의 과정을 몇 단계쯤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크테시비우스 박사. 그러지 말고 증기의 힘으로 절구를 찧는 기계장치를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저번에 사원의 자동문을 만들 때 이미 비슷한 장치를 만들어 봤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오.”
“음······. 만들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 장치에 쓸 숯을 충분히 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왕검성 주변에 대장간이 많이 늘어서 숯을 넉넉히 쓰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인들은 예전부터 석탄을 연료로 써왔다고 들은 적이 있소. 타는 돌 광산을 개발하면 증기로 돌아가는 기계장치도 충분히 쓸만할 거요.”
“석탄이라 하심은 혹시 타는 돌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맞소.”
“전하. 소신은 지금까지 조선에서 타는 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경은 석탄의 생김새와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구려.”
“물론입니다. 소신은 과거에 이집트인이었지 않습니까? 지금의 파라오께서 그리스 출신이시다 보니 그리스의 물건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요.”
“그거 다행이구려. 아직은 조선에서 그 물건을 캐거나 사용한 적이 없지만, 왕검성 근처의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묻혀있다고 알고 있소.”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증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절구를 만들어 볼 만하겠군요! 바로 장치 개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마우리아 출신 광물 탐색꾼들과 함께 타는 돌의 광산을 찾아봐 주시오. 조선에서 타는 돌의 실물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대뿐이니 말이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한부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이미 석탄을 대장간에서 연료로 사용해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계인 크테시비우스가 석탄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석탄을 사용해본 적이 있는 크테시비우스의 지식으로 왕검성 근처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석탄을 찾아내서 활용하면 고조선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 분명했다.
‘원역사의 일제 해군이 생산한 무연탄 중 60퍼센트 이상이 평양 탄전에서 생산됐다고 했었지. 일제 해군의 석탄 소비량을 평양 탄전에서 생산한 석탄만으로 메꾸다시피 했다니까 고조선의 수요 정도는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거다.’
그 후 크테시비우스는 태자의 명에 따라 마우리아 제국 출신 광산 탐색 기술자들에게 석탄의 특징을 설명한 다음 함께 대동강을 따라서 탄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평양 일대에는 무연탄이 수억 톤이나 매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고대의 광물 탐색 기술로도 열흘 만에 탄맥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부는 크테시비우스에게 석탄을 발견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왕검의 집무실에서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탄광 개발을 건의했다.
“폐하. 제2 공조박사 크테시비우스가 어제 왕검성에서 멀지 않은 열수(대동강) 강변에서 숯을 대체할 수 있는 타는 돌이라는 연료가 묻힌 광맥을 발견했다고 소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석탄이라? 문자 그대로 타는 돌이라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폐하. 크테시비우스 박사가 말하길 석탄은 숯보다도 화력이 강하고 땅에서 캐면 바로 연료로 쓸 수 있어 서역에서는 이미 대장간의 화로를 달구는 데 쓰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탄맥이 왕검성에서 가까우니 광산을 개발하면 캐낸 석탄을 나르기도 쉬울 겁니다.”
“흠······. 천하에는 나무처럼 타는 돌도 있단 말인가.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네 말이라면 분명 사실이겠지. 그래서 석탄 광산을 개발하자는 말을 하러 온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허나 농사를 지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백성들에게 고된 부역을 부과하면 민심이 험악해지지 않겠느냐?”
“우선은 소자가 반도 남부를 정벌하면서 포로로 잡아 온 공노비들을 탄광 개발에 동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다가 차차 왕실에서 품삯을 주고 양민을 고용해 광산에서 일하게 하면 될 듯합니다. 4윤작법을 도입하면서 농작물의 생산량이 충분히 늘어나서 농가에도 분명 일손에 여유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방법이라면 백성들이 불만을 품지 않겠구나. 좋다. 한번 뜻대로 해보아라.”
“감사합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