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종이+한글+불교 = ?
한부는 연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도 된다는 한열 왕검의 허락을 받은 후 연나라 왕에게 줄 공물을 준비하는 궁인들을 직접 지휘하며 물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겼다.
“귀금속으로 만든 물건은 절대로 공물에 넣으면 안 된다. 대신 모피나 귀한 약재를 많이 챙기도록 해라.”
태자가 직접 외국에 보낼 공물을 챙기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이번에는 공물이 너무 과하면 연나라가 고조선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예방전쟁 차원에서 압록강을 넘어 침략해 올 수도 있었기에 빈틈없는 준비를 한 것이다.
그렇게 보름 만에 공물이 준비되자 고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는 부처인 외조의 수장이 십수 명의 대신과 수백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연나라의 수도 계를 향해 출발했다.
사절단이 왕검성을 떠나던 날, 한부는 성문까지 배웅을 나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매년 신하의 예를 갖추면서 공물을 바치면서 반도 남부에만 신경 쓰는 척하면 연나라는 우리한테 관심을 거두고 조나라를 칠 생각만 하겠지. 그러는 동안 연나라를 정벌할 군사력은 충분히 기를 수 있을 테고. 이제 문제는 고조선이 중원에 진출해도 고대 중국 문화에 먹히지 않도록 소프트 파워를 기르는 거구만.’
원역사에서는 요나라, 몽골, 청나라 등 여러 기마민족이 중원 대륙을 정복했지만, 인구가 많고 선진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중화 세력에 동화되어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과 언어를 차차 잃어버리고 결국 또 하나의 중국이 되어버렸다.
한부는 지금으로서는 고조선이 연나라를 정복한다고 해도 고조선 백성들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중화 문화에 물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불교를 수입해서 전륜성왕 사상을 만들긴 했지만, 아직은 유가나 법가처럼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알려진 제자백가의 통치이념하고 경쟁하기에는 인지도가 너무 부족해. 고조선에선 죽간을 만들기가 힘들다 보니 아직도 불경을 별로 만들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
이 시대 동아시아의 문서는 모두 대나무를 쪼개서 끈으로 엮은 죽간이었다.
이 죽간은 동시대에 서양에서 주로 사용되는 파피루스에 비해 제조법이 간단하고 보존 기간이 길다는 장점이 있지만, 칼로 획이 많은 한자를 하나하나 새겨야 해서 문서를 작성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 시대에도 죽간에 글을 쓸 수 있는 먹물과 붓이 없지는 않았지만, 워낙 귀한 사치품이라 공문서 제작용으로 쓰기는 어려운 물건이었다.
게다가 기후가 서늘한 한반도 북부에는 따듯한 곳에서 잘 자라는 대나무가 별로 자라지 않아서 죽간 제작용 대나무를 대부분 한반도 남부에서 들여오거나 외국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한부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만에 새로운 발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슬슬 종이를 발명할 때가 된 것 같구만.”
그는 과거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할 때 전통 한지의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을 작성한 적이 있어서 제지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전통 한지의 재료는 가을이 되어야 채취할 수 있기에 태자는 약 5개월이 지난 후 기원전 259년의 9월이 되자 발명을 담당하는 관청인 제2 공조의 수장 박사 크테시비우스의 작업장에 찾아갔다.
예고도 없이 태자가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오자 크테시비우스는 손에 들고 있던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황급히 입구로 달려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태자 전하! 거의 석 달 만에 뵙는군요!”
“오랜만이오, 크테시비우스 박사. 온몸에 쇳가루와 톱밥이 묻어있는 걸 보니 여전히 뭔가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있나 보구려.”
“대나무를 관처럼 사용해서 건반과 공기로 소리를 내는 대나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궁중 제례용 악기를 만들어 보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악기가 완성되면 조선의 음악사에 큰 획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전하!”
“그것참 기대되는구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물건을 만들려면 구상도를 여러 번 그려봐야 하지 않소?”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전하.”
“죽간에는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으니 고생이 많겠소.”
“말씀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파피루스와 잉크가 이제 거의 바닥나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죽간에 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는 상세한 그림을 그리기가 정말 어렵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파피루스처럼 잉크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문구를 발명해볼 생각이오.”
“정말 조선에서도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종이라고 부르는 물건인데 본인의 예상대로라면 죽간보다 훨씬 얇고 가벼우면서도 파피루스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한 훌륭한 문구를 만들 수 있을 거요.”
“저 같은 발명가에게는 황금보다 귀한 물건이군요! 다른 작업은 일단 중지하고 제2 공조의 전 인력을 종이개발에 투입하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좋겠구려. 그럼 잠시 후에 대략적인 종이 제작법을 설명해줄 테니 공조의 관리 전원을 이곳에 모아주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 시진 안에 전부 집합시키겠습니다!”
흥분한 크테시비우스는 체통도 잊고 넓은 작업장 안을 뛰어다니면서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와 인부들을 태자의 앞에 집합시켰다.
잠시 후 제2 공조에 소속된 기술자와 인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한부가 그들의 앞에 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 중 닥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자는 손을 들어보아라.”
그 말을 듣고 마우리아 출신의 기술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조선 토박이 기술자 중 몇 명은 손을 들었다.
한부는 그중 한 인부의 앞으로 다가가서 말을 이어나갔다.
“네 동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닥나무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 보아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닥나무는 뽕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로서 주로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자랍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때 딱 소리가 난다고 해서 닥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나뭇가지가 가늘어서 건축용 목재로는 쓸 수 없어 땔감용으로 쓰이는 잡목이지만, 그 나무 열매는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했다. 자세히 알고 있구나. 평소에 닥나무를 본 적이 많은 모양이지?”
“소인의 가족이 예전에 살던 집이 대성산의 산기슭에 있었기에 어린 시절에는 닥나무를 자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거 잘됐구나! 어서 제2 공조의 인부 전원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닥나무 가지를 최대한 많이 베어오너라.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닥풀의 뿌리도 구해와야 할 거다.”
“닥풀이라면 전하께서 마우리아에서 가져오신 큰 꽃이 피는 풀 말씀이시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태자의 명을 받은 제2 공조의 인부 약 1백 명은 지게와 도끼를 챙긴 다음 호위병들과 함께 왕검성 근처에 있는 대성산으로 향했다.
그 후 약 반나절 지나 석양이 질 때 즈음에 닥나무 가지를 잔뜩 실은 지게를 진 인부들이 돌아와서는 궁궐로 돌아간 태자에게 찾아와서 보고했다.
“전하. 분부하신 대로 닥나무 가지를 배어왔습니다.”
“수고했다. 크테시비우스 박사에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부터 종이 제작 작업을 시작하자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다음 날 아침, 한부는 수탉이 울자마자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2 공조의 작업장으로 찾아가 크테시비우스 박사에게 대략적인 제지법을 알려주었다.
“박사. 먼저 닥나무 가지를 푹 찐 다음에 껍질을 벗기고 다음 잘 다듬고 하얀색이 될 때까지 잘 말리시오. 그러고 나서 말린 닥나무 가지를 물에 불리고 솥에 넣어서 잿물에 삶아야 하오.”
“끓이는 시간은 몇 시진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건 시험을 해보면서 알아내야 할 거요. 일단은 세 시진에서 네 시진 정도를 삶은 다음 삶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거나 줄여나가면서 적당한 시간을 알아보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일단 잿물에 삶은 닥나무를 다시 햇볕에 말려야겠군요.”
“그렇소. 그러고 나서 닥나무의 섬유가 잘 분산되도록 방망이로 잘 두드리시오. 그다음에는 닥풀 뿌리로 만든 접착제를 풀은 물에 잘 짓이긴 닥나무 섬유를 그 안에 넣어 풀고 발이라는 도구로 물속의 닥나무 섬유를 떠서 말리면 드디어 종이가 완성되는 거요.”
“파피루스 제조법과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훨씬 복잡한 방법이로군요. 그 발이라는 도구의 생김새를 알려주시면 바로 제작에 들어가겠습니다.”
“경이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거요. 자동문이나 펌프에 비하면 구조가 단순한 물건이니 말이오.”
그후 1백 명의 인부들이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삶은 동안 크테시비우스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면서 태자에게 원역사에서 오직 한민족만 종이를 제작할 때 사용했던 외발 뜨기식 발의 생김새를 전해 들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이집트 출신 박사는 외발뜨기식 발의 원리를 모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부에게 대답했다.
“그저 풀물을 담은 수조 위에 외줄에 매달린 발을 설치하면 되는 것이군요. 구조가 단순해서 만들기는 어렵지 않지만, 소신의 밑에서 일하는 공인들이 이 물건으로 종이 만드는 기술을 익히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달 후에 이 방법으로 가장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공인은 관등을 한 등급 올려주고 은 열 근을 상으로 내릴 생각이오.”
“허허! 그 귀한 은을 열 근이나 상으로 거신단 말씀입니까?! 공인들이 밤잠을 줄여가며 종이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소신도 경쟁에 참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크테시비우스 박사. 그대의 직무는 새로운 발명품을 고안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나저나 한 달 후가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종이를 양산해서 불경을 많이 발간해 조선 연합 전역에 배포하면 더 많은 백성이 부처님 말씀에 감화될 거요.”
“음······. 전하. 앞으로도 계속 제나라의 문자로 불경을 제작할 생각이신지요?”
“조선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읽을 줄 아는 백성이 한 명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제나라 글자는 상형문자라서 제대로 사용하려면 수천 자나 되는 글자를 암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평민들은 불경이 많아진다 한들 부처님 말씀을 접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의 알파벳 같은 표음문자를 조선말에 맞게 변형하여 불경을 발간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한부는 머릿속에 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종이에 불경을 한글로 적어서 배포하면 행정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한글을 조선 연합 전역에 퍼트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지! 어쩌면 한반도를 넘어서 제나라에도 불교와 한글을 전파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동안 한부는 고조선의 한정적인 행정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한글 반포는 후세에 맡기고 대신 한글을 군사암호 정도로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부의 활약 덕에 한반도 거의 전역에 불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한글로 적혀있는 불경을 발간하면 스스로 한글을 배우려는 자가 폭증할 것이 분명했다.
한부는 기쁜 나머지 크테시비우스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크테시비우스 박사!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오! 여태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소!”
“그럼 그리스 알파벳으로 적은 불경을 발간하는 걸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보다 조선인들이 더 배우기 쉬운 새로운 표음문자를 만들어낼 생각이오. 어쩌면 신앙의 힘을 빌려서 새 문자를 조선 연합의 모든 백성에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