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태자의 혼례식
기원전 259년 3월 중순, 한반도 남부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부와 고조선의 병사들이 드디어 왕검성의 남문을 지났다.
왕검성의 백성들은 커다란 갈색 말에 탄 태자를 필두로 한 개선군이 전리품과 조선 연합 소속 부족들이 바친 공물이 담긴 우마차 수십 대를 끌고 시내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대로변으로 모여들어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전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남부의 모든 부족이 조선 왕실을 섬긴다! 왕검 폐하 만세! 태자 전하 만세!”
말을 타고 태자의 뒤를 따라가던 석은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사방에서 환호하는 기특한 백성들을 보십시오! 왕검성의 백성들이 나라의 경사를 가족의 일처럼 여기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가슴 뿌듯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순박한 백성들도 이토록 기뻐하니 왕검 폐하와 네 조부이신 국상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바로 궁궐에 가서 왕검 폐하를 알현하자꾸나.”
“물론 그래야지요. 소장도 어서 가족들에게 적장을 생포하여 공을 세운 걸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환호와 축복을 받으면서 왕검성의 궁궐에 도착한 한부는 석을 비롯한 열한 명의 중대장급 장교들과 함께 내관 참을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일행이 목적지에 도착한 후 내관 참이 알현실의 미닫이문을 열자 한부의 눈에 금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있는 한열 왕검과 옥좌까지 이어진 길 양옆에 늘어선 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열두 명의 청년이 대신들의 사이를 지나 옥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한열 왕검이 1년 만에 집에 돌아온 장남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자야! 작년 봄에 네가 군대를 이끌고 왕검성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이번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모두 기우에 불과했구나! 설마 겨우 1년 만에 수백 개나 되는 남부의 부족을 전부 굴복시킬 줄이야! 네게 무슨 상을 내려야 합당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큰 공을 세웠어.”
“모두 유능한 무관들과 충직한 병사들이 소자를 보좌한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폐하. 부디 소자에게 상을 내리시기 전에 소자와 함께 원정길에 오른 무관과 병사들에게 그들이 세운 공적에 합당한 상을 내려주십시오.”
“건국 이래 가장 큰 군공을 세우고도 부하들을 먼저 챙기다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장수의 귀감이구나. 네 부탁대로 이번 전투에 참가한 무관과 병사들에게 모두 각자가 세운 공적의 크기와 계급에 따라 큰상을 내리고 관등을 한 등급씩 올리도록 하겠다.”
왕검이 말하자 기병대장 석과 중대장들이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열 왕검은 그런 그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다시 한부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태자야. 네가 짐에게 경사스러운 승전보를 전했듯이 짐도 네게 들려줄 좋은 소식이 있다.”
“그렇습니까? 어떤 소식인지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폐하.”
“자세한 내용은 이 자리를 마치고 짐의 침실에서 들려주마. 아무래도 부인도 함께한 자리에서 말하는 게 좋은 이야기라서 말이다.”
잠시 후 개선군의 장교들과 대신들이 알현을 마치고 퇴궐하자 한부는 아버지와 함께 왕검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고 미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후 연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남을 보자마자 얼싸안으며 반겨주었다.
“태자!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요!”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소자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쁩니다! 동생들도 모두 잘 있지요?”
“그럼요! 부처님의 가호 덕분에 모두 건강하게 잘 있지요!”
그 후 한부는 부모님에게 짐독이나 음모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 원정 도중에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한열 왕검과 모후 연도 왕검성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세 가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열 왕검이 아내의 안색을 살피더니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우리 태자도 벌써 스물세 살이나 됐구나. 어서 좋은 짝을 만나서 태손을 낳아야 할 터인데······.”
남편의 말을 듣고 모후도 한숨을 푹 쉬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하지만 그토록 열심히 수소문을 해봐도 우리 태자에게 어울리는 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게 자라나서 기뻐했더니 설마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이야······.”
한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나랑 어울리는 몸집인 귀족
출신 처녀를 찾지 못하신 건가······. 올해도 못 신붓감을 못 찾으면 외교 관계도 개선할 겸 대만의 덩치 큰 폴리네시아인 중에서 구해봐야겠구만.’
이 시대의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모두 10대 후반이나 늦어도 20대 초반에는 짝을 찾아 결혼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한 나라의 태자인 그가 아직도 상투를 틀지 못한 이유는 그가 원역사에서 개혁군주로 유명한 신라의 지증왕이 왕비감을 구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모로 신경 쓴 덕에 덩치가 커진 건 좋은데 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한부는 5대 영양소를 갖춘 양질의 식사와 10대 초반부터 꾸준한 운동을 한 덕에 키 180cm가 훌쩍 넘는 거구로 자라났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의 특정 부위도 지금 시대를 기준으로는 너무 커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부와 비슷한 또래의 양갓집 규수들은 고조선의 전통적인 소박한 식습관을 유지해왔기에 대부분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몸집이 작았던 것이다.
아무리 고대 왕족과 귀족의 결혼에서는 가문과 가문끼리의 결합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해도 부부가 합방하기 어려운 물리적인 문제가 있어서 자손을 남기기 힘든 경우에는 혼인이 성사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한열 왕검이 밝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 실은 며칠 전에 우리 태자에게 잘 어울릴만한 제후 가문의 처녀를 찾아냈소.”
“폐하! 그게 사실이옵니까?!”
“그렇다오. 곰부족의 장로이기도 한 웅 국상의 둘째 손녀인데, 키가 7척 5촌이나 되는 데다 아주 건강하다고 하더이다. 분명 우리 태자도 키가 8척이나 되니 분명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요!”
“세상에! 여자 키가 7척 5촌이나 된단 말씀인가요? 국상처럼 지체 높은 대신에게 그런 눈에 띄는 손녀가 있는데 어찌 궁 안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처녀가 부끄러움이 많고 다소곳한 성격이라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들었소. 가문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분명 태자의 짝으로서 손색이 없을 거요!”
한부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 잠깐만. 석이가 웅 국상의 막내 손자인데. 그럼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처녀는 석이의 둘째 누나잖아. 석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니까 그 처녀는 나랑 동갑이거나 나이가 많단 말이지······. 그렇게 좋은 집안의 딸인데 왜 지금까지 시집을 못 갔지?’
한부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불길한 예감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한열 왕검에게 물었다.
“아버지. 혹시 웅 국상의 둘째 손녀를 이미 만나보셨는지요?”
“그랬단다. 지난 연나라의 침략 때 조실부모하긴 했지만, 웅 국상의 보살핌 덕에 참으로 품행방정한 처녀로 자랐더구나.”
“그럼 그 처녀의 용모가 어떠했는지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한열 왕검은 그 질문을 듣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고 오른손을 장남의 어깨에 얹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태자야. 용모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신붓감을, 특히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사람을 고를 때 가문과 심성보다 중요한 건 없는 법이거든.”
“아······ 아버지?”
“우리 조선 땅에서는 가문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웅 국상의 둘째 손녀보다 네게 잘 어울리는 신붓감은 없다. 게다가 이 혼인으로 왕실과 곰부족
출신 제후들 사이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다져놔야 나라가 평안해지지 않겠느냐? 이미 국상과 논의해서 닷새 후에 혼례를 치르기로 정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거라.”
한부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지만, 모후도 이번만큼은 전적으로 남편의 편을 들었다.
“태자. 폐하의 말씀에 따르세요. 조선 땅에선 태자에게 어울리는 처녀를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후······. 두 분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마지못해 혼담을 받아들인 후 왕검의 침실에서 나온 자기 방으로 돌아가 침상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한탄했다.
“난 덩치가 커서 후궁을 들이기도 어려운데 정실부인은 아버지가 말을 돌리실 정도로 못생겼단 말이지······. 한 나라의 태자로서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괴롭구나······.”
그렇게 한부가 왕실의 안녕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에 세월은 바람처럼 흘러 태자의 혼례식이 날이 찾아왔다.
궁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신랑의 예복을 입은 한부는 수많은 대소신료가 지켜보는 가운데 꽃으로 치장한 가마에 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궁궐 안에 마련된 혼례식장으로 끌려갔다.
그가 먼저 혼례식장에 도착해 가마에서 내리자 맞은편에서도 꽃가마가 다가왔고 한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처음으로 신부 얼굴을 보는구나. 제발 석이 얼굴에 머리만 길게 늘어뜨린 정도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꽃가마를 든 장정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가마를 내려놓자, 마침내 그 안에 타고 있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색색가지 염료로 물들인 저고리를 입은 신부는 키가 170cm 초반인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쌍꺼풀이 진 큰 눈에 높은 콧대가 돋보였고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이었다.
한부는 그런 신부의 모습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엄청나게 미인이잖아! 아버지께서 내가 태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시려고 거짓말을 하신 건가?!’
그런데 그때, 태자의 귓가에 혼례식장에서 잡일을 하던 궁녀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휴······. 장차 국모가 되실 분이 눈이 저렇게 사슴처럼 크면 너무 볼품없어 보이지 않아?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이 기품있어 보이는데.”
“코도 너무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복이 없어 보이셔. 모름지기 여자 코는 뭉뚝하고 납작해야 복스럽고 예뻐 보이는 법인데.”
한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한열 왕검이 신부의 용모를 말해주기 꺼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까 자잘한 걸 놓쳤구나! 당연히 얼마 전까지 청동기 시대에 살던 고대인하고 나는 미적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지!’
그 후 한부는 대제사장이 천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면서 혼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제후와 대신들은 그런 태자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경 대부. 태자께서는 용모가 아름답지 않은 신부를 맞이하시는 데도 참으로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과연 전륜성왕의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이 혼례로 나라가 더욱 평안해지는 것이 기쁘신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