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분할통치(Divide and Rule) (2)
기원전 260년 9월 말의 어느 날 오전, 한부가 지휘관 막사 안에서 왕검성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기 위해 죽간에 글을 새기고 있는데 입구의 문밖에서 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전하. 기병대장 석입니다. 보고 드릴 사안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와라.”
태자가 허락하자 석은 문을 열고 들어와 태자에게 경례한 후에 입을 열었다.
“기병대장 석이 태자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궁기병 스무 기를 거느리고 순찰을 나갔다가 우리 군영에서 남쪽으로 약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영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무장한 무리 약 1백 명을 발견했습니다.”
“그자들이 어느 부족
출신인지는 확인했나?”
“무리에 활을 든 병사가 많이 보이기에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시할 기병 열 기를 남겨두고 군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명한 판단이다. 마상용 단궁은 일반적인 활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짧으니 궁기병이 궁수와 활 솜씨를 겨루는 건 자살행위지. 그럼 부대에 남아있는 기병을 모두 데리고 가서 그자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적대적인 부족의 병사들이면 사살하거나 생포해서 군영으로 끌고 와라.”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석은 다시 경례하고 막사 밖으로 나간 후 군영의 천막에서 쉬고 있던 기병 2백 기를 거느리고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군영의 병사들이 저녁을 준비하려고 취사장에 나와 모닥불에 불을 지피고 있을 때, 감시탑 위에서 망을 보던 초병이 우렁차게 외쳤다.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돌아옵니다!”
마침 그 근처에 있던 한부는 직접 감시탑에 올라가 먼발치에 보이는 아군 기병대가 1백 명의 무리를 호위하면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활짝 웃더니 밑에 있는 한 중대장에게 소리쳤다.
“중대장! 아무래도 기다리던 귀한 손님이 도착한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는 연회를 열 생각이니 식량창고에 남아있는 고기를 모두 꺼내고 소 세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잡아라!”
갑자기 콩과 순무와 밀가루를 섞어서 끓인 죽뿐이었던 저녁 메뉴에 고기구이가 추가되자 고조선군 병사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한부는 막사로 돌아가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군영에 들어온 석이 데리고 온 1백 명의 무리 중 지도자 격인 세 명을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여보내자 한부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진국에서 오신 귀빈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본인은 조선의 태자이자 고조선군의 지휘관인 한부라고 합니다.”
그러자 세 명 중에서 옥구슬과 뼈를 꿰어서 만든 장신구를 몸에 두른 중년 남자가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우리가 진국에서 왔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군요! 조선군의 군영에 점을 잘 치는 무당이 있는 모양입니다.”
“조선의 군법은 군영에 삿된 무리를 두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본인에게 부족장님께서 진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려 준 건 무당이 아니라 입고 계신 바지에 묻어있는 진흙이지요.”
“아! 바지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우리가 늪지대를 지나왔다는 걸 알아채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남쪽에 있는 조선 연합의 부족들은 늪지대를 지나지 않고도 본인의 군영에 사절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쪽에서 귀빈들이 찾아오셨다면 십중팔구 진국의 영역이고 늪지대가 많은 아리수 근처의 마을에서 오신 분이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소문대로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본인은 조상 대대로 아리수 상류에서 살아온 황새 부족의 부족장 가람이라고 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시겠군요. 연회 준비가 거의 끝나가니 함께 향기로운 술과 고기를 드시면서 여독을 푸시지요.”
그 후 한부는 술과 고기를 아낌없이 써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 손님을 대접했다.
고조선과 황새 부족의 병사들이 취사장의 모닥불 근처에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는 동안 부족장 가람은 태자와 막사 안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직접 고조선의 군영에 찾아온 이유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진국 부족
회의에 참석해서 쉰 명이 넘는 부족장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주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회의에 참석하는 부족장이 그렇게 많습니까?”
“진국은 반도의 남부를 전부 아우르는 부족
연합이니 그럴 수밖에요. 부족
회의에는 자기 지역에서 작은 부족을 거느리고 맹주 노릇을 하는 큰 부족만 참여할 수 있어서 쉰다섯 개의 부족만 모이지만, 진국에 소속된 부족은 전부 2백 개가 훨씬 넘습니다.”
“올해 조선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부족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군요. 과연 부족장들이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족장들은 진국으로 도망쳐온 임둔국 출신의 난민들에게 조선의 병사들이 얼마나 용맹한지를 듣고도 결사항전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본인처럼 조선 왕실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부족장들은 복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저런······. 조선에 적대적인 부족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유력 부족
쉰다섯 개 중 무려 서른한 개가 반조선파입니다. 이렇게 친조선파 부족과 반조선파 부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면 내년 봄쯤에는 부족
간의 전쟁이 터질까 봐 걱정될 지경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전하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친조선파인 스물네 부족은 어차피 터질 전쟁이라면 전하께서 지휘하시는 군대와 연합군을 구성해 반조선파 부족들을 먼저 쳐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피를 덜 보는 길이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부디 조선 왕실을 맹주로 모시고자 하는 부족들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한부는 부족장 가람의 간청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국 소속 부족들 사이에서 벌써 분열이 일어났단 말이지? 반역자 부족
출신 난민들이 진국의 영역으로 도망치게 내버려 둔 보람이 있구만.’
그는 자꾸 귀를 향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조선 왕실을 섬기고자 하는 선량한 부족들이 위험에 처했다니 마음이 아프군요. 하지만 곧 겨울이 시작되니 당장 군대를 움직이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겨울이 지나가면 이 땅의 산천은 젊은이들이 흘린 피로 물들 수밖에 없겠군요······.”
“대신 본인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 반조선파 부족들을 제압할 계책을 알려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신묘한 계책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전하! 부디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먼저 친조선파 부족들과 입을 맞추고 나서 반조선파 부족들에게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부족
회의를 연 다음 조선에 대항해 연합군을 구성하자고 제안하십시오. 그런 다음 부족
회의가 끝나고 연회를 베풀어 반조선파 부족장들을 그 자리에서 일망타진하는 겁니다.”
“음······. 전하. 부족
회의에 참석하는 부족장들은 모두 많은 호위병을 데리고 올 겁니다. 부족
간의 불화가 심한 요즘 같은 시기에는 연회 도중에도 호위병들이 부족장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 그 자리에서 암살을 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그리고 부족장이 먹을 술과 음식도 모두 먼저 노비에게 먹여볼 테니 독살을 시도하기도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러니 이번 거사에 성공하려면 아주 교묘한 계책이 필요할 겁니다. 그런데 본인의 계책이 성공하려면 아리따운 무희가 한 명 필요한데 준비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희라니요?! 고작 무희 한 명에게 거사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우선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시지요.”
한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부족장을 안심시키면서 머릿속에 들어있는 계략을 설명해 주었고 태자의 설명을 들은 부족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정말로 천하에 그토록 무서운 맹독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전하의 말씀이라도 쉽게 믿기 어렵군요.”
“정 의심스러우면 본인이 준 물건을 짐승에게 먼저 시험해보십시오.”
“음······. 알겠습니다. 그 계책대로라면 만에 하나 독이 통하지 않더라도 반조선파 부족장들에게 발각될 일은 없겠군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전하의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거사에 사용할 물건을 보여 드리지요.”
* * *
한부의 계책을 받아들인 부족장 가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고조선군의 군영을 떠나서 황새 부족의 마을로 돌아와서 진국에 소속된 친조선파 유력 부족의 부족장 중 특히 믿을만한 다섯 명에게 사절을 보내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황새 부족의 마을에 모인 친조선파 부족장 다섯 명은 부족장 가람이 태자가 알려준 계책을 설명해주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하나둘 입을 열었다.
“가람 부족장님!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솔직히 본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책이 실패하더라도 잠시나마 저들이 우리가 같은 편이 됐다고 착각하게 할 수 있을 테니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나쁘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입단속만 잘하면 독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자는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음······.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만에 하나 거사가 실패했을 때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은 친조선파 부족이 우리가 배신했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겁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조선의 태자가 준 독을 염소에게 시험해 보니 실패할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부디 부족장님의 말씀대로 되길 바랍니다.”
은밀히 열린 친조선파 부족장들과의 회의를 마친 후, 가람 부족장은 이번엔 반조선파 부족에 사절을 보내 반조선파로 돌아선 다섯 부족과 함께 부족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반조선파 부족장 중 스물다섯 명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260년 11월 중순이 되자 마침내 황새 부족의 마을에서 서른 명의 부족장이 모여서 부족
회의를 열었다.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들어선 반조선파 부족장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부족장 가람을 비롯한 친조선파 부족장 다섯 명에게 물었다.
“부족장님께서는 부족
회의가 열릴 때마다 늘 조선에 복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니 무엇 때문에 마음을 고쳐 드신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실은 지난가을에 다른 부족장님들께 말씀드리지 않고 홀로 조선군의 군영에 찾아가서 조선의 태자를 만나고 왔습니다.”
“뭐라고요?! 기어코 조선의 군대를 끌어들여서 진국 연합을 깨려고 했던 거로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설마 조선의 태자라는 자가 그토록 오만방자한 자일 줄이야······.”
그 말을 듣고 다른 반조선파 부족장이 부족장 가람에게 물었다.
“대체 조선의 태자에게 어떤 푸대접을 받으셨길래 그토록 분해 하십니까?”
“우리 부족이 아직 조선 연합에 가입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주인이 노비를 대하는 태도로 본인을 하대하더군요. 그것도 아직 상투도 틀지 않은 놈이 말입니다.”
“그런 찢어 죽일 놈을 봤나!”
“그때 아무리 조선의 세력이 강해도 그런 오만방자한 자에게는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아직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한 다른 부족의 부족장들은 본인이 책임지고 설득하도록 하지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셨다니 다행이로군요. 그럼 천지신명께 조선의 침략자들을 격퇴할 것을 맹세하는 제사를 지냅시다.”
“물론 그래야지요. 오늘은 이미 밤이 깊으니 지금은 연회를 즐기시고 내일 제사를 지내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놨으니 어서 자리를 옮기시지요.”
반조선파 부족장들은 연회장이 준비됐다는 흡족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연회장에 도착한 서른 명의 제후들은 푸짐한 잔칫상 주변에 둘러앉아 악사들이 연주하는 곡을 감상하면서 술과 음식을 즐겼다.
그렇게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중 부족장 가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연회에 춤이 빠지면 섭섭하지요! 이 자리를 빛내주신 부족장님들께 진국 최고의 무희 다래를 소개하겠습니다!”
부족장이 소개를 마치자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무희가 양손에 짙은 녹색이 감도는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임을 연상케 하는 부채춤을 선보였다.
그러자 거나하게 술에 취한 반조선파 부족장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무희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가람 부족장님께서 대단한 미녀를 숨겨두고 계셨구려!”
“체면이고 뭐고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겁니다!”
곧 반조선파 부족장 스물다섯 명은 무희의 주변에서 취기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었고 무희는 그들의 사이를 돌아다니며 짐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로 취객의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