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분할통치(Divide and Rule) (1)
전투의 함성이 요란스레 울려 퍼지던 구릉지에 붉은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자 반조선 연합군의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하러 갔던 고조선군 병사들이 속속 본대로 귀환했다.
한부는 밧줄로 두 손을 묶인 채 아군 병사들에게 끌려오는 포로 무리를 보고 기병대장 석과 중대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선 숙영지를 짓고 패잔병을 연병장에 집결시켜라. 그런 다음에 아군과 적군의 사상자와 포로의 숫자를 확인하고 바로 내게 보고해라.”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고조선군의 장교들은 태자의 명을 받고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서 부하들과 함께 숙영지를 지은 다음 전사자와 포로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한부는 부족장 누와 함께 지휘관 막사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임무를 마친 석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 태자에게 경례한 다음 보고를 시작했다.
“기병대장 석이 태자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이번 전투에서 왕실 소속 보병 5천 명 중 열두 명이 전사했고 스물다섯 명이 다쳤으며 기병 3백 기 중에는 부상자 두 명을 제외한 사상자가 없습니다. 또한 사슴 부족을 비롯한 동맹 부족
병사 5백 명 중에선 열일곱 명이 전사하고 스물세 명이 다쳤습니다.”
“적군의 전사자와 포로는 몇 명이나 되나?”
“적군 약 1만 명 중 약 1,500명이 전사했고 적장을 포함한 약 3천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석의 말을 들은 부족장 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태자에게 말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셨군요!”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라······. 누 부족장. 과찬이 심하시구려. 오늘의 전투는 내용 면에서 보면 그리 자랑할만한 것은 못되오.”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예순한 개의 부족이 뭉쳐서 만든 연합군을 물리치셨다는 사실이 천하에 알려지면 반도 안의 모든 나라와 부족의 백성이 전하를 칭송할 게 분명합니다!”
중년의 부족장은 처음으로 승전을 경험한 신병처럼 들뜬 목소리로 계속 태자를 칭찬했지만, 한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좀 더 제대로 된 전술을 쓰고 싶었는데 아직은 무리였어. 오늘 싸운 한족
부족민들은 대체로 고조선인들보다 왜소하고 대규모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크게 이겼지만, 진나라나 연나라군하고 이런 식으로 싸웠으면 우리 측 피해도 만만치 않았겠지.’
그가 이번 전투에서 사용하고 싶었던 전술은 투창 공격 이후 팽배수 부대가 백인대 단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갈라진 바위틈에 빗물이 스며들 듯 흐트러진 적 진형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 작전이 성공하면 적의 본대가 수십 조각으로 찢어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느슨한 연합군의 지휘체계가 개전초기에 마비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고조선의 다른 병과와는 달리 팽배수 부대는 부대원 전원이 반년 동안의 군사훈련만 받은 신병이라 그런 난도 높은 전술을 수행할 능력이 모자랐고 처음으로 전장에 나선 한부도 아직은 신병들을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통솔하기에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멈추지 않는 부족장의 아부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신의 고조선군의 현황과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우리 병사들은 다른 나라 평민들보다 잘 먹으면서 살아온 데다 체력훈련을 반년이나 받아서 피지컬 하나는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이제 백인대 단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훈련에 집중하면 될 거고. 나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걸 실전에 적용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겠네. 지금은 춘추전국시대 무장 중에서 비교하면 조괄 수준밖에 안 될 테니까.’
조괄은 바로 지금 시대의 조나라 장군으로 원역사에서는 이론적인 병법에는 빠삭하지만, 머릿속의 지식을 전장에 적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 번의 패배로 수십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어 나라를 망친 것으로 유명한 졸장이다.
한부는 고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개발해온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알고 있으나 그것을 실전에 적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자신이 아직 조괄 수준의 무장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실망하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아직 군사 전술 쪽에서는 일류가 아니지만, 대신 내 머릿속에는 인류가 6천 년 동안 쌓아온 지식이 있으니 혐성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할 수 있지. 그럼 앞으로는 좀 편하게 정복사업을 진행해 볼까?’
* * *
고조선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 한부는 지난밤의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용소를 지은 다음 그곳에 포로를 가두고 보병 중대 1개와 5백 명이 조금 안 되는 동맹 부족
병사들을 남겨서 포로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조선 연합에 가입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왕실을 배신한 세 부족의 마을을 중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진군했다.
약 반나절 후 고조선군과 동맹 부족의 병사 4,800명이 마을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 마을의 부족장은 마을 울타리의 문을 열고 고조선군을 안으로 들인 다음 몇몇 장로와 함께 태자가 탄 말 앞에 서서 무릎 꿇고 바닥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울부짖었다.
“태자 전하! 소인이 무지하고 어리석어 그만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소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조선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주신다면 우리 부족은 자자손손 왕검께 변치 않는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한부는 그런 부족장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주변의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이 가증스러운 반역자들을 포박하고 부족민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해라”
“저······ 전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에 놀란 부족민 몇 명이 부족장을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한부에게 덤벼들었지만, 순식간에 중무장한 고조선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이 부족장과 장로 세 명을 참수하자, 한부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족민들에게 소리쳤다.
“조선 연합을 배신한 부족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반역자에 대한 본보기로서 너희 마을을 이 땅에서 지우고 모든 부족민을 노비로 삼을 것을 선포한다! 저항하는 자는 너희 부족장처럼 목 없는 귀신이 될 터이니 허튼짓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태자가 한족의 언어로 외치자 겁에 질린 부족민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멍청한 부족장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나 한부가 미리 병력을 나눠 마을의 울타리 밖에도 포위망을 쳐놓았기 때문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부족민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고조선군 병사들은 온몸이 굴비처럼 묶인 부족민 수백 명과 전리품을 실은 우마차를 마을 밖으로 끌고 나온 다음 마을에 불을 지른 다음 근처에 숙영지를 지어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한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된 마을 터를 바라보면서 석에게 지시했다.
“반역자들이 살던 땅에서 다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려라.”
“전하.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조선 연합이 뒷간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럼 다른 두 마을에도 같은 일을 벌일 생각이신지요?”
“일단은 그런 소문을 퍼트려둬야겠지.”
“그럼 다른 두 마을의 부족민들은 벌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포로가 너무 많으면 군량이 부족해져서 곤란해진다. 다른 두 마을을 향해서 천천히 진군하면 겁먹은 반역자 부족은 마을을 버리고 남쪽에 있는 진국의 영역으로 도망치겠지. 그럼 진국에 속한 부족들 사이에도 조선의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소문이 나지 않겠느냐?”
“아······. 이제야 전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했습니다. 당장은 잔혹해 보이더라도 피를 가장 적게 볼수 있는 방법이로군요.”
“그럼 얼른 저 잿더미에 소금을 뿌리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자꾸나.”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부가 배신자 부족을 처단하는 동안, 부족장 누는 반조선 연합에 소속된 부족
전부에 사절을 보냈다.
현대의 함경북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구석구석으로 흩어진 사슴 부족
출신 사절들은 패배의 충격과 멸족의 두려움에 떠는 부족장들을 찾아가 고조선 태자의 요구를 전했다.
“그대에게 태자 전하의 말씀을 전하노라. 포로가 된 부족민의 목숨과 부족의 생존을 원한다면 무기를 내려놓고 조선 연합의 일원이 되어라.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조선 왕실을 맹주로 받들었다가 배신한 세 부족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리라.”
그러자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임둔국과 진번국의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 연합의 일원으로서 조선 왕실을 맹주로서 받들게 되었고 몇몇 소수의 부족은 고향을 버리고 남쪽의 진국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임둔국과 진번국에서 적대 세력이 사라지자 한부는 약 3,700명의 포로 중 6백 명과 전리품 일부를 이번 전투에서 고조선군과 함께 싸운 동맹 부족의 부족장과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사슴 부족의 마을을 임시 기지로 삼고 고조선에서 물자를 들여와 조선 연합의 부족들에게 약속한 강철 무기와 농기구를 지원하자 조선 연합 소속 부족의 부족장과 장로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조선 왕실과 태자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부족장님!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그저 탐욕스러운 침략인 줄 알았습니다만, 알고 보니 천지신명께서 우리 부족의 번영을 위해 보내신 은인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훌륭한 농기구가 있으면 내년에는 그동안 개간하지 못한 뒷산의 산기슭에 밭을 일굴 수 있을 겁니다!”
“그러게 말이오! 조 장로! 게다가 강 건너의 수달 부족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지 뭐요? 그건 그렇고 며칠 후면 조선 왕실의 사절이 우리 마을에 도착한다고 하니 어서 잔치를 열 준비를 해주시오.”
“저는 처음 듣는 말씀이군요! 사냥꾼들에게 어서 큼직한 멧돼지를 잡아오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시 시간이 흘러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자 고조선의 세력권은 현대의 황해북도 전체와 강원도 북부로 넓어져 한반도에는 오직 고조선과 진국, 그리고 북동쪽의 옥저 세 세력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고조선군의 중대장들은 함께 태자의 막사에 찾아가 남쪽의 진국을 공격하자며 열변을 토했다.
“전하. 지금 진국에 소속된 부족들은 친조선파와 반조선파로 양분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다면 친조선파 부족들과 힘을 합쳐 손쉽게 남부를 정벌할 수 있을 겁니다.”
“전하! 부디 출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군대를 움직이면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적대적인 부족을 쳐부수고 우리 조선의 영역을 아리수(한강) 일대까지 넓힐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부는 중대장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임둔국과 진번국 소속이었던 부족들이 왕실에 복속한 지 아직 석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반란에 대비해 이 근처에서 주둔하는 편이 안전하다.”
“전하! 올해 원정을 벌써 멈추시면 전에 말씀하신 대로 3년 만에 반도 남부를 전부 복속시키기 어려울 겁니다.”
“다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적대 부족을 군대가 아니라 책략으로 무너뜨릴 계획을 이미 세워놨으니 말이다.”
“그 많은 부족을 무너뜨릴 책략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여기서 몇 달만 더 기다리면 진국의 반조선파가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