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거침없는 남벌 (2)
‘아직 어린 데도 음흉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구나! 분명 자기 병사들의 피를 보지 않고 우리 마을을 점령할 생각이겠지!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부족장 누는 한부의 말을 듣자마자 깊은 갈등에 빠졌다.
태자의 반쯤은 협박인 요청을 거부하면 기병들이 쏜 화살을 온몸에 맞고 처참하게 죽을 것이고 고조선의 군대를 마을의 울타리 안으로 안내했다가는 부족민 전체가 노비로 전락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고조선군의 본대가 태자의 곁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고민을 멈출 수 있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가 모두 금속으로 만든 병장기로 무장했단 말인가?! 게다가 빛깔을 보니 모두 철이구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병사들이 행군하는 줄 알게 분명하다. 이 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부족민 1천 명은 모두 저 무시무시한 놈들에게 붙잡혀 노비 신세가 되겠지······.’
그는 마침내 저항을 포기하고 한부와 눈을 마주치면서 대답했다.
“전하께서 본인을 집주인으로 대해주신다면 본인 또한 전하를 손님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마을은 작고 비좁아서 저 많은 병사가 쉬게 할 집이 없어서 난감하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를 수행할 호위병만 마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마을 밖에서 야영하도록 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우리 마을은 여기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부족장 누는 그렇게 대답한 후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놈들. 이 주변은 밤마다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데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겠다고? 어디 한번 자다가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오줌이나 지려봐라. 이것들아.’
잠시 후 부족장 일행을 따라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한부는 고조선군의 석과 중대장들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 마을 앞의 강가에 숙영지를 짓는다. 이 지역의 부족민들이 조선의 건축술에 감탄하도록 해가 지기 전에 작업을 마치도록 해라.”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열세 명의 중대장이 태자의 명을 받자마자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자 곧 조용하던 강가에서 장교들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빨리 움직여라! 한 시진 안에 숙영지를 짓지 못하면 저녁밥은 없다!”
그와 동시에 고조선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목재를 나르고 망치질을 하면서 드루수스에게 배운 고대 로마식 숙영지를 짓기 시작했다.
부족장 누는 높고 튼튼한 나무 울타리에 감시탑까지 갖춘 숙영지가 순식간에 지어지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정말 하룻밤 잘 곳을 마련하려고 저렇게 높은 울타리를 친다고? 숙영지가 아니라 요새를 짓는 것 같구나!”
한부는 그런 부족장의 놀란 얼굴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사람 수만큼 호랑이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병사들이 마음 놓고 잘 수 있으려면 저 정도 숙영지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조선인 상인들과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저렇게 빨리 건물을 올릴 줄 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실 수밖에요. 조선은 몇 년 전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한해가 다르게 큰 발전을 이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서쪽 바다 너머에 그렇게 대단한 부족이 많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괜찮으시다면 마을 안에서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본인이 서역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말씀해 드리지요.”
“음······. 좋습니다. 대신 부족민들이 놀랄 수 있으니 마을 안에는 너무 많은 호위병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요. 호위병은 딱 1백 명만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부족장은 여전히 한부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완전무장한 병사 수천 명이 당장 마을을 공격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놓으면서 고조선의 태자를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임둔국 소속 부족의 마을에 발을 들인 한부는 석, 그리고 부족장에게 줄 선물을 든 병사들과 함께 마을 안을 걸으면서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는 통나무를 잘라다 박아 놓은 거구나. 마을 안에는 기와집은 없고 크고 작은 움집만 보이네. 관청으로 보이는 건물은 따로 없는 것 같고.’
그가 열심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동안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부족장 누는 마을에서 가장 큰 움집의 싸리문을 열면서 태자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전하. 이곳이 바로 본인이 가족과 함께 사는 저택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부족장님.”
한부가 부족장에게 대답하면서 호위병 중 석만 데리고 움집 안으로 들어가자 집 안에 있던 하인들이 돌아온 주인과 두 손님에게 멧돼지 가죽으로 만든 방석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석과 함께 방석에 앉으면서 누에게 말했다.
“하인과 같은 공간에서 사시는 걸 보니 부족장님께서 얼마나 아랫사람을 아끼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다른 부족의 귀족들도 아마 대부분 하인과 같은 집에서 살 겁니다. 그래야 시종이 필요할 때 쉽게 부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부는 그 말을 듣고 한반도 남부의 문명 발달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일단 계급사회가 시작되긴 했지만, 지배계층하고 피지배계층의 거주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지는 않았구나. 행정조직도 거의 발달하지 않은 것 같고. 그저 유력자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는 단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어. 역시 성읍국가 이론은 틀린 이론이었구만.’
원 역사의 20세기 후반의 한국 사학계에는 한때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를 자치하고 있을 때 한반도 남부에는 돌로 쌓은 성채를 중심으로 수백 개의 도시 국가가 난립했었다는 성읍국가설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 증거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부는 기록과 자료가 부족해서 현대에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기원전 3세기의 한반도 남부의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드디어 진실을 알았다는 기쁨과 낙후한 한민족의 선조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처음 고조선에서 눈떴을 때도 난감했었는데, 이런 데서 다시 태어났으면 정말 답이 없었겠구나. 아무튼, 남부에는 도시 국가는커녕 정부라고 부를만한 조직도 아직 없단 말이지. 얼른 남부를 정벌하기가 생각보다 더 쉬울 수도 있겠어.’
그렇게 그가 감상에 젖어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석이 태자에게 물었다.
“전하. 이제 부족장님께 드릴 선물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라고 할까요?”
“아! 그렇지. 그걸 잊고 있었구만. 얼른 가지고 들어오라고 해라.”
석은 한부의 대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움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선물이 든 상자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부족장 누는 병사들이 자기 앞에 내려놓은 커다란 나무 상자 두 개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전하. 이 상자를 왜 본인의 집에 들여놓으시는 겁니까?”
“조선과 사슴 부족의 우호를 다지고 싶어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어서 열어보시지요.”
부족장은 그 말을 듣고 상자를 연 다음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전부 철로 만든 무기와 갑옷이군요! 정말 이 귀한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 병장기들은 그냥 철이 아니라 강철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서 찍어낸 철제 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하지요.”
“철보다 강한 무기라······. 그럼 본인의 검과 이 검을 부딪쳐 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서 강철검의 위력을 확인해 보시지요.”
그 말을 듣고 부족장 누는 하인 두 명에게 호랑이 부족
출신 상인들에게 샀었던 철검과 한부가 선물한 우츠 강철로 만든 검을 부딪쳐 보도록 명령했다.
두 하인이 검을 들고 앞사람이 든 검을 향해 힘껏 휘두르자, 둔탁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불꽃이 튀었다.
- 카앙!
그 소리에 놀란 부족장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반 토막 난 철검의 날에 닿았다.
부족장 누는 강철검의 강력한 위력을 확인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태자에게 물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귀한 물건을 그냥 주실 리는 없겠지요. 우리 부족에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왕검께서는 반도 전체의 부족을 아우른 연합을 만들고자 하십니다. 부족장님이 조선의 왕실을 연합의 맹주로 인정하고 충성을 바칠 것과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을 약속하시면 왕실은 사슴 부족에 강철 무기와 발달 된 농법을 전수할 겁니다.”
“만약 전하의 제안을 거절하면 우리 마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지간하면 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슴 부족에게 적대적인 인근 부족의 전사들은 모두 이런 강철 무기로 무장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임둔국 소속의 부족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은 건 아닐 테지요?”
“허허······. 조선인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왕실에 충성하지 않는 부족을 전부 궤멸시키시려는 겁니까? 참으로 무서운 분이시군. 조선은 그런 식으로 임둔국의 부족이 서로 싸우게 한 다음 손쉽게 이 일대를 집어삼키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맹세코 조선 왕실은 연합의 맹주로서 조선 연합에 소속된 부족의 적대세력을 무찌르는 데 언제나 앞장설 것이며 연합에 소속된 부족장과 귀족의 지위와 권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을 걷지 않을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부족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군요. 오늘부로 우리 사슴 부족은 연합의 맹주인 조선 왕실에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 *
한부는 부족장 누를 회유한 후 사슴 부족의 부족민들을 사절로 삼아 임둔국과 진번국 소속의 모든 부족에 보냈다.
그중 그리 많지 않은 부족은 고조선 왕실의 협박 섞인 제안을 듣고 사슴 부족
마을에 사절을 보내 고조선군의 위용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 조선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다른 부족장들은 대부분 사절의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치면서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냈다.
부족장 누는 마을로 돌아온 사절들의 보고를 받은 후 한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전하. 안타깝게도 예순 개가 넘는 부족이 왕검 폐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바요. 신중하지 못한 부족장들은 아직 우리 군대의 위세를 확인하지 않고 일단 반발할 것 같았소.”
“분명 임둔국과 진번국의 여러 부족은 한때나마 전하의 군대와 우리 마을을 공격하려고 동맹을 맺을 겁니다. 놈들의 병력이 한곳에 집결하면 큰 위협이 될 테니 우리가 먼저 군대를 움직여 적을 각개격파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누 부족장의 말대로 하는 편이 현명하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적의 세력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정당당히 회전을 벌일 생각이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조선연합의 군대가 막강하다고는 하나 회유한 부족의 병력을 다 합쳐도 약 적대적인 부족의 병사들이 한 곳에 모이면 우리 병사들보다 수가 훨씬 많을 겁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 정도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둬야 중립을 지키는 부족들도 정신을 차릴 거요.”
“오······. 천지신명이시여. 부디 조선의 병사들이 훌륭한 무기만큼이나 용맹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