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거침없는 남벌 (1)
왕검성에서 훈련병들의 함성과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군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매일 울려 퍼지는 동안 마침내 기원전 260년의 봄이 찾아왔다.
포근한 봄 햇살이 얼음을 녹여 한반도 전역의 하천에 혈관을 따라 피가 흐르듯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한열 왕검은 고조선의 모든 제후와 지방관을 제외한 대신을 왕검성의 궁궐로 소집했다.
그리고 며칠 후 궁궐 알현실에 백여 명의 제후와 대신이 모두 모이자 한열 왕검은 태자를 옥좌 앞으로 부른 다음 남벌을 지시했다.
“이제 우리 조선은 반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안에 이토록 눈부신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모든 왕족과 제후와 대소신료와 백성들이 태자가 서역에서 배워온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각자 맡은 소임을 충실이 이행한 덕분이다. 그러니 주변의 나라에 부처님을 말씀을 전해 교화시키면 온 천하가 평안해지지 않겠는가? 이에 짐은 천하를 정복해 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하니 태자 한부는 짐의 검이 되어서 남쪽의 모든 소국과 부족을 평정하라.”
왕검이 연설을 마치고 옥좌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온 다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태자에게 청동검을 하사했다.
한부는 두 손으로 군권을 상징하는 청동검을 받은 다음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반도 전역의 나라와 부족이 조선을 맹주로 떠받들도록 하겠나이다.”
군권을 수여하는 의식이 끝나자 한부는 왕검성 교외의 병영으로 향한 다음 병사를 보내 석을 막사로 불렀다.
연병장에서 마지막으로 출정을 준비하고 있던 석은 호출을 받자마자 막사로 뛰어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기병대장 석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깜짝이야! 석아. 왜 그리 신이 난 거냐?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왕검께서 드디어 전하께 군권을 상징하는 청동검을 하사하시지 않았습니까?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아무리 왕족이라도 겨우 스물두 살에 군권을 받는 경우는 단군왕검 이래 처음일 겁니다!”
“고맙다. 너와 계가 그동안 나를 위해 애써준 덕에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왕검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니 이번 원정을 꼭 성공적으로 마치자.”
“물론 그래야지요! 소장도 하루빨리 공을 세워 왕검께 청동검을 하사받고 싶습니다!”
“이번 원정에서는 공을 세울 기회가 많을 테니 한번 열심히 해보아라.”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회에 계가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이제야 얘기한다만, 계는 벌써 암부라는 기관에서 왕실을 위해 큰일을 해주고 있다.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는 일이다만, 이미 큰 공을 세워서 비왕과 맞먹는 높은 관직에 올랐지.”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출세했다니! 그래서 요즘 계의 얼굴을 보기가 그리도 힘들었군요! 전하. 이미 보급품 준비가 끝났으니 더 지체하지 말고 출정하시지요.”
“네 말대로 더 시간 끌 거 없지. 먼저 호랑이 부족
출신 반역자들이 다스리던 지역에서 가까운 임둔국의 마을부터 하나하나 복속시킬 생각이다. 앞으로 한 시진 뒤에 출발할 생각이니 병사들에게 행군할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후 약 두 시간이 지나자 한부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의 병사 5,300명과 그 뒤를 따르는 비슷한 숫자의 수송부대가 왕검성을 떠났다.
한부는 행군 대열의 중간쯤에서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남쪽을 향해 진군하라! 앞으로 사흘 안에 남쪽의 국경선을 넘는 거다!”
* * *
기원전 260년 3월 중순의 어느 날, 현대의 황해남도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한 마을을 다스리는 부족장 누는 커다란 움집 안에서 식사를 하다말고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벌써 반년이 다 돼가도록 조선의 상인들이 코빼기도 보이질 않다니. 이러다 그자들에게 팔려고 창고에 쌓아놓은 약초와 모피가 다 상하고 말겠구나.”
지난 몇 년 동안 호랑이 부족
출신의 여러 제후는 고조선 남쪽의 여러 부족이나 소국과 독자적으로 교역하면서 이득을 취해 왔었다.
하지만 상 완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호랑이 부족의 영역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이 왕실직할령으로 변경되면서 자연스럽게 무역도 중단되었고 한반도 남부의 토호들은 자체 생산할 수 없는 철제 농기구 등의 공급이 끊기자 곤란을 겪고 있었다.
부족장이 가족과 함께 토기에 담긴 잡곡밥과 구운 물고기로 식사를 마친 다음 흙바닥에서 일어나는 순간,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 돌창을 든 병사 한 명이 움집의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족장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용 이 녀석아! 내 집에 들어올 때는 무기를 들고 들어오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거늘! 자꾸 그러면 온몸에 꿀을 바른 다음 반달가슴곰이 사는 동굴 앞에 거꾸로 매달아 둘 줄 알아라!”
“아······ 죄송합니다. 부족장님. 너무 기쁜 나머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왔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
“사냥꾼 촉이 방금 고라니 한 마리를 잡고 돌아왔는데, 오는 길에 조선인 무리가 우리 마을 쪽으로 오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드디어 조선인 상인들이 도착한 모양이구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구나!”
부족장 누는 깨끗한 흰옷을 입고 움집 한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 상자에서 옥구슬을 꿰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얇고 둥근 청동 쟁반이 달린 장신구를 가슴에 걸친 다음 부족민 스무 명을 데리고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부족민들의 눈에 울창한 숲을 빠져나온 수천 명의 고조선 병사들이 서해안의 밀물처럼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족장 누는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옆에 서 있는 호위병 용에게 말했다.
“용아! 올해 봄에는 조선인 상인들이 정말 많이 오는구나! 분명 진귀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게 말입니다! 부족장님! 혹시 이번에 흥정이 잘되면 저도 철로 만든 단검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한부가 이끄는 병사들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족장님. 상단의 호위병치고는 병사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영 느낌이 좋지 않아! 상품을 실은 수레는 보이지 않고 온통 중무장한 병사뿐이지 않느냐!”
“저들은 상단이 아니라 도적 떼인 모양입니다! 부족장님! 서둘러 농성할 준비를 하시지요!”
“그게 좋겠구나! 모두 마을로 도망쳐라!”
한족
부족민들은 부족장이 외치자마자 뒤돌아서 통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부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고 석에게 말했다.
“석아. 저기 1리쯤 앞에 이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무리가 우리를 보고 도망치는 것 같구나.”
“그렇지 않아도 소장도 놈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전하.”
“이 주변에 사는 부족의 정찰병일지도 모르니 저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붙잡아라. 물어볼 게 많은 데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니 어지간하면 죽이지는 않는 게 좋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석은 태자의 명을 받은 후 원정군의 기병 3백 기 중 궁기병 1백 기에게 명령했다.
“저놈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붙잡아라! 어지간하면 생포하되, 심하게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
서역의 덩치 큰 명마를 탄 기병대장이 그렇게 외치면서 말을 달려나가자, 조랑말을 탄 궁기병들도 그 뒤를 따라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온힘을 다해 달리던 스물한 명의 부족민은 고막을 찢을듯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더니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부족장님! 기병대가 우릴 쫓아오고 있습니다!”
“기병이 저렇게나 많다니!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저 도적놈들을 물리쳐주소서!”
그러는 동안 도망치는 부족민들을 순식간에 따라잡은 석은 뒤따라오는 궁기병 1백 기에게 다시 명령했다.
“저놈들을 포위해라! 주변을 맴돌면서 발밑에 활을 쏴서 겁을 주는 거다!”
그가 외치자 궁기병들은 마치 사슴 떼를 모는 사냥꾼 무리처럼 부족민들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싸서 빙빙 돌더니 고함을 지르면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도망치는 놈은 이 화살로 엉덩이에 구멍을 하나 더 내줄 테다!”
통역사 한 명을 제외한 한족
부족민들은 예맥족의 언어인 한국 조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바로 옆으로 떨어지는 화살을 피하느라 손에 든 돌창의 자루를 움켜쥐면서 점점 한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부족장 누는 큰 말을 타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석이 대장임을 알아보고 통역사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도록 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우리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난 이 근방에 있는 마을을 다스리는 부족장 누요! 우리 마을의 부족민들에게 나를 포로로 삼았다고 전하면 몸값을 준비할 테니 죽이지 마시오!”
통역사가 부족장의 말을 전하자 석은 궁기병대에게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다음 옆에 있던 기병에게 지시했다.
“이거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활을 쐈더니 꿩이 맞은 격이구나! 태자 전하께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기병대장님!”
명을 받은 기병은 곧바로 본대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태자에게 석의 말을 전했고 한부는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랑이 부족이 평소에 임둔국하고 진번국의 부족들하고 교역해온 덕에 행운을 잡았구나! 일단 전초기지로 삼을 마을을 쉽게 점령할 수 있겠다!’
그는 제1 중대의 중대장에게 본대를 전진시키라고 명한 다음 석에게 사로잡힌 부족장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부는 석의 옆에 말을 멈춘 다음 겁에 질린 부족민들을 바라보면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본인은 조선의 태자 한부다! 너희 중 본인과 대화하고 싶다는 자가 누구냐?!”
그 말을 들은 통역사가 부족민들에게 태자의 말을 전한 다음 부족장 누의 대답을 한부에게 전했다.
“태자 전하! 여기 계신 이분이 사슴 부족의 부족장 누이십니다! 부족장님께서는 전하께 일단 겁박을 멈추고 조선이 우리 부족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신다고 요청하셨습니다!”
통역사의 말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한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남부에 사는 한족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말 등에서 내려 부족장의 앞으로 다가간 다음 한족의 언어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정찰병 무리일 줄 알았는데 한 마을의 부족장님께서 계셨군요. 이거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럴 수가! 전하께서는 우리 부족의 말을 참으로 능숙하게 하시는군요! 혹시 모후께서 우리 부족의 출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대들의 말을 할 줄 몰랐지만, 부처님의 은총 덕에 방금 한족의 말을 익히게 된 것이지요.”
“그 부처님이라는 대체 무엇을 다스리시는 신이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그대의 집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해보십니다. 마침 본인이 좋은 술을 한독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