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파격적인 군제 개혁
드디어 고조선 왕실은 본격적으로 군제 개혁의 고삐를 당겼다.
기원전 261년의 7월 초, 한부는 앞으로 개혁해 나가야 할 수많은 제도 중 가장 먼저 징병제도부터 손볼 생각으로 호조의 대신들을 전부 국상부 건물로 불러 정책회의를 열었다.
호출한 대신들이 전부 긴 직사각형 탁자 주변에 둘러앉자, 건강상의 이유로 결석한 국상 대신 한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경들도 알다시피 왕검께서 모든 대소신료에게 내년 봄까지 임둔국과 진번국을 정벌할 준비를 마치라 하셨소. 그러나 작금의 징병제도는 빈틈이 많고 일관성이 없으니 가장 먼저 이를 손봐야 할 것이오. 그러려면 먼저 인구조사를 다시 해야 할 것인데······. 정 박사. 작년부터 진행해온 호구조사는 언제 완료될 것 같소?”
태자가 묻자 호조의 수장으로 임명된 박사 정이 탁자 위에 놓인 죽간을 눈으로 읽으면서 대답했다.
“닷새 전에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전하. 현재 전국의 인구는 약 45만 명이고 그중 왕실 직할령의 인구는 33만 명입니다.”
“그럴 리가? 무슨 착오가 있는 것 아니오? 본인이 서역으로 떠나기 전의 인구가 겨우 몇 년 사이에 인구가 그렇게 폭증할 리는 없지 않소?”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조선의 영토가 꾸준히 넓어져서 동쪽의 옥저와 접한 국경선이 넓어지고 북쪽의 국경은 엄리대수(압록강)에 닿았습니다. 덕분에 흉년이 드는 해마다 옥저인이나 엄리대수 이북에 사는 반유목부족민들이 전보다 자주 먹을 것을 찾아서 국경을 넘어 왕실에 귀화를 신청해오다 보니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전하.”
“그게 정말이오?! 부처와 천신께서 왕실을 돕고 계신 게 분명하구려!”
현재 현대의 만주와 간도, 그리고 연해주 일대에는 여러 반농반목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원역사에서 다음 세기쯤에 부여를 건국하는 예맥족
계열 부족으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한국 조어를 구사했고 문화적으로도 고조선과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 북동부와 연해주에 넓게 퍼져서 사는 옥저인도 마찬가지였기에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던 예맥족
부족들이 경제와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한 고조선의 동족들에게 빠르게 동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부는 머릿속에 간도와 만주까지 뻗어 나간 고조선의 강역을 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구나! 당장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굉장한 이득이지만, 어쩌면 만주나 간도에 사는 예맥족들도 조선 연합에 합류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반도의 꿈을 하루라도 앞당기려면 우선 한반도부터 고조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연나라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태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박사 정에게 물었다.
“왕실직할령의 백성만 35만 명이라. 그럼 그중에서 진나라의 법을 적용하면 징병 대상이 되는 장정이 몇 명이나 되오?”
“조사결과로는 17세에서 60세 사이의 평민 남자가 10만 명이 조금 넘었지만, 장애인이나 병을 앓는 자가 있을 수도 있고 관등이 높은 자는 군 복무기간을 단축하는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시니 약 8만 명 정도로 생각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상보다 많군. 전체 남자 인구에서 그 나이대의 장정의 비율이 6할쯤은 되는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열 살을 넘기기 전에 죽는 백성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20대의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
“그 정도면 미리 구상해뒀던 징병제도를 시행할 수 있겠소. 병조에서 구체적인 규정을 정하고 본인이 왕검께 인가를 받는 즉시 전국에 새 징병제도를 반포할 준비를 해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후 약 한 달 동안 비왕 무를 비롯한 병조의 관료들은 태자가 고안한 제도의 뼈대에 살을 붙여 완성하였고, 한부는 새 징병제도의 시행을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기원전 261년이 9월에 접어들자, 왕검은 진나라를 모방한 징병제도의 시행할 것을 왕실 직할령 전역의 지방관청에 명하자 각 현의 현감은 도시와 마을에 포고꾼을 풀어 백성들 앞에서 어명을 발표하게 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위대하신 왕검 폐하의 명을 들어라! 올해 추수가 끝난 이후로 모든 17세 이상 60세 이하의 신체 건강한 양민 남자는 모두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므로 전시에는 언제든 병사나 인부로 차출될 수 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왕실에서 일정한 급료를 지급할 것이다! 또한 평시에는 징병 대상자 전원 중에서 자원자와 제비뽑기로 뽑은 자를 차출하여 1년씩 군역을 지도록 한다! 다만 한번 군역을 진자는 4년 동안 제비뽑기에서 제외되며 관등이 7등급 이상인 자는 관등이 하나 오를 때마다 군역을 마치는 나이를 1년씩 낮출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꽤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징병제도였지만, 고조선의 백성들은 어명에 별 불만을 품지 않았고 오히려 반기는 자도 있었다.
“전쟁이 없는 때에도 군역을 져야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부분은 오히려 전보다 나아진 것 같지 않나?”
“동감이네. 적어도 아직 수염도 안 난 열너덧 살 먹은 꼬맹이들이 전쟁터에 나갈 일은 없어졌으니 말일세. 게다가 전장에서 공을 세워 관등이 오르면 일찍 군역에서 면제될 수도 있을 거고.”
“그리고 쥐꼬리만큼이지만 급료를 받는 데다 한번 병사로 뽑혔던 사람이 다음 해에 또 끌려가는 일은 꽤 줄어들 걸세. 솔직히 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드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덩치 크다고 젊은 시절에 세 해 연속으로 전쟁터에 끌려갔었지? 아직 살아있는 게 용하구먼!”
그렇게 별다른 저항 없이 백성들이 새 징병제도를 받아들였으니 이제는 전국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군사 조직을 손볼 차례였다.
징병제가 공표된 후 지방의 현감들이 징병한 병사들을 왕검성으로 보내서 왕검성 성벽 밖에 마련된 군사 훈련장은 5천 명의 병사로 가득 차자, 한부는 여러 대신과 함께 그곳을 시찰한 다음 비왕을 국상부 건물로 불러서 지시했다.
“비왕. 이제 조선 왕실은 평시에도 보병 5천 명을 상비군으로 두게 됐구려. 왕실이 보유한 기병의 숫자는 얼마나 되오?”
“창과 마상편곤을 쓰는 중기병이 1백 기이고 궁기병은 5백 기가 조금 넘습니다. 전하.”
“기병들은 모두 등자를 사용하는 훈련을 마쳤소?”
“그렇습니다. 또한 기병이 타는 말 6백 마리 중 356마리에는 편자를 장착했습니다.”
“아직 모든 말에 편자를 장착하지 못했나 보구려.”
“편자를 다는 장제술을 완전히 익힌 장제사가 아직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하마(果下馬: 한반도의 토종 조랑말)는 워낙 사나운 짐승이라 네 다리를 묶지 않으면 발굽에 못을 박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요즘은 서역에서 데려온 말을 타고 다니다 보니 그 조그만 놈들이 얼마나 성질이 포악한지 잠시 잊고 있었구려. 아무튼, 이제 상비군이 생겼으니 모든 병종이 잘 어우러져 큰 효율을 낼 수 있는 편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소. 이 죽간에 본인이 구상한 군 편제를 새겨뒀으니 읽고 의견을 말해주시오.”
“벌써 새로운 편제를 고안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어떤 내용일지 참으로 기대되옵니다.”
비왕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죽간을 펴서 읽어보더니 곧 두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이번에도 천하에 없는 제도를 생각해내셨군요. 너무나 생소하고 유능한 하급장교가 많이 필요한 편제라 전시에 많은 병력을 동원할 때도 과연 제대로 기능할지 의문입니다.”
“바로 이때를 위해서 이룡도에서 유능한 무관을 육성해 온 게 아니겠소? 이 편제가 제대로 기능하면 군대를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요.”
“그렇다면 우선 올해의 병사들을 이 편제대로 훈련해 보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오.”
한부가 구상한 편제는 먼저 병사 열 명으로 구성된 십인대를 그 안에서 최선임 병사를 분대장격인 십인대장으로 임명해 지휘하게 하고 십인대 열 개를 모아 백인대를 만들어 부사관에 해당하는 백인대장에게 지휘를 맡긴다.
그런 다음 또 백인대 다섯 개를 하나로 모아 중대라고 이름을 지은 다음 이룡도 졸업생 중에서 중대장을 선임하고 다시 중대 열 개를 모은 다음 기병 수백 기를 더해 장군이 지휘를 맡는 1개 군단을 만들었다.
이 편제는 약 1백 년 후에 태어날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진행할 때 고안한 편제를 모티프로 한 것인데, 말을 기르기 어려워 기병을 많이 육성할 수 없는 환경에서 보병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데 알맞았다.
하지만 한부는 오직 검과 방패를 든 보병만으로 이뤄진 로마군 군단과는 달리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들이 1개 군단을 이루게 할 계획이었다.
“비왕. 1개 군단은 경번갑을 입고 둥근 방패와 한손검으로 무장한 중보병 3천 명과 긴 창이나 두 손으로 휘두르는 긴 편곤으로 무장한 병사 1천 명을 본대로 삼고 궁수와 투석꾼을 1천 명을 본대 양옆에 배치한 다음 기병을 궁수와 투석꾼 부대의 바깥쪽 양익에 배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다만 그 편제가 더욱 빛을 보려면 전장의 상황에 따라 병과의 비율을 바꿀 수 있도록 보조병 부대도 조직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 역할을 할 부대는 왕실과 함께 남벌에 참여할 제후들에게 준비하도록 할 생각이오.”
“그 모든 일을 내년 봄까지 마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요. 오늘부터 바로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전하.”
* * *
태자의 주도로 거센 개혁의 바람이 고조선을 휩쓸고 지나가자, 왕검성 근처의 추수가 끝난 밀밭 옆 공터에서는 매일같이 장교들의 고함과 훈련병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당나귀만도 못한 것들! 몇 번을 말해야 말귀를 알아듣겠나! 방패를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뛰란 말이다! 배꼽이 아니라 가슴! 내년에 여든이신 우리 할머니가 너보다 더 힘차게 뛰시겠다!”
두 눈이 매섭게 옆으로 찢어진 백인대장이 사납게 소리치자, 2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강철 경번갑을 몸에 걸치고 양손에 묵직한 원형 방패와 날이 두툼한 한손검을 든 병사 수천 명이 함성인지 비명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앙!”
한열 왕검은 여러 대소신료와 함께 군사 훈련을 참관하다가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야. 검과 방패를 든 병사들의 표정이 마치 초산을 경험하는 새색시 같구나. 체구가 작은 병사들은 저렇게 크고 무거운 방패를 들고 화살이 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울 거다.”
“폐하. 저 병사들은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방패와 검을 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저 병사들이 앞으로 반년만 같은 훈련을 받고 전장에 나서면 태산처럼 든든하게 창과 화살을 막아내고 범처럼 눈앞의 적을 처치할 겁니다.”
“그랬구나. 분명 효과적인 훈련으로 들리긴 한다만, 남부의 한족(韓族)들과 검을 맞대기도 전에 다치는 병사가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야.”
“폐하의 말씀을 비왕에게 잘 전하겠습니다.”
한부가 고조선의 병사들에게 시키고 있는 훈련은 원역사의 초기 조선에서 활약하던 팽배수들이 받던 훈련과 거의 비슷했다.
팽배수는 원형 방패와 환도를 들고 양손에 들고 전장의 최전선을 담당하던 중장보병인데 팽배수 한 명이 장창병 다섯 명과 싸워서 이긴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강병이었다.
한부는 이마에서 비처럼 땀을 흘리는 병사들을 보며 팽배수와 비슷한 장비와 실력을 갖춘 정예병들이 고대 로마의 전술을 구사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이제 반년만 지나면 처음으로 전장에 서겠구나. 데뷔전은 반드시 대승을 거둬서 한반도 전체에 명성을 떨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