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남벌을 서둘러야 명장을 얻는다.
계는 새로운 짐독의 실험을 마친 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밀히 궁궐에 찾아가 태자에게 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했다.
한부는 계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나더니 목소리를 낮추면서 물었다.
“도저히 믿기질 않는구나. 상처도 아니고 맨살에 닿기만 하면 죽는 맹독이라니.”
“전하. 소신이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을 천하에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런 흉악한 독을 함부로 사용하신다면 분명 많은 업을 쌓게 되겠지요. 전하께서 장차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시는 전륜성왕이 되시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은 두 짐새를 세상에서 지우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계야. 사람이 귀천에 따라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듯 전륜성왕 또한 덕을 쌓은 정도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부끄럽게도 아직 불경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전륜성왕에는 금륜왕, 은륜왕, 동륜왕, 철륜왕 이렇게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 세 번째 등급인 동륜왕은 압도적인 무기로 적을 겁주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천하를 정복해 덕으로 다스린다고 한다. 그 맹독이 폭군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질서가 망가지겠지만, 백성을 아끼는 군주의 손에 들어가면 그 나라엔 전륜성왕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겠지.”
“전하. 하오나 그 짐새 조차도 붉은사슴뿔버섯을 먹고 열 중 여덟이 죽었습니다. 겨우 짐새 두 마리에서 뽑아낸 독으로 천하의 군주들을 겁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짐새가 부족한 게 문제라면 더 구해오면 되지. 요즘 시간이 지날수록 왕검성을 찾는 대만의 상인이 나날이 늘고 있다. 대만은 짐새 서식지에서 뱃길로 하루 거리인 데다 그곳의 원주민 전사들은 위험한 항해와 모험을 즐기지. 왕실이 살아있는 짐새의 새끼를 비싼 값에 사겠다고 하면 분명 목숨을 걸고 울창한 숲에 들어서는 자들이 없지는 않을 거다.”
“음······. 알겠습니다. 전하. 왕검성의 시장에서 믿을만한 대만 상인을 찾아서 은밀하게 짐새의 새끼를 조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매번 붉은사슴뿔버섯을 산에서 캐면 맹수를 만날 수도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재배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영지버섯이 잘 자라는 썩은 나무만 구할 수 있으면 그 독버섯을 기르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독을 만드느라 간자를 육성하는데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 버섯을 기르고 짐독을 만드는 인원을 새로 뽑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하마. 다만 반드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가려 뽑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계가 보고를 마친 후 궁궐에서 나가자 한부는 즉시 내관 참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비왕과 드루수스 박사에게 내일 아침에 입궁해서 임시 국상부 건물의 내 집무실로 오라고 전해주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는 짐독의 양산을 진행하는 한편 새로운 병장기 개발과 군제개혁에도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는데, 그 실무를 병조의 수장을 겸하게 된 비왕 무와 제1 공조의 수장 드루수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한부가 자기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서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두 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자에게 인사했다.
“비왕 겸 병조박사 무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1 공조박사 드루수스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등청했는 데도 두 사람이 먼저 도착했구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태자가 사과하자 드루수스가 웃으면서 한국 조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소신이 전하께서 부르신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을 뿐입니다.”
“박사는 몇 달 사이에 조선말이 많이 늘었구려.”
“여기 있는 무 비왕이 중매를 서서 소신을 장가보내 준 덕분입니다. 매일 아내하고 비왕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조선말이 느는 중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친분을 쌓았단 말이오? 참으로 신기한 일이구려!”
그 말에 비왕이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드루수스 박사가 전직 군인이라는 전하의 말씀을 듣고 흥미를 느껴서 소신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거의 안 통해서 대화가 거의 안 통했었지요.”
“잘됐구려. 그렇지 않아도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력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었소.”
“드디어 연나라를 공격하실 생각이신지요?”
“그 전에 우리 조선의 국력을 서쪽 대륙의 어느 나라와 맞붙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르는 게 우선일 거요. 그 첫걸음으로 먼저 남쪽의 임둔국과 진번국, 그리고 진국을 정벌하여 왕실에 복속시킬 생각이오.”
“음······. 전하께선 분명 여러 정보를 접하시고 심사숙고하여 그런 결정을 내리셨겠지만, 소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남쪽을 정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쪽의 옥저를 먼저 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겠소?”
“첫 번째 이유는 동쪽의 옥저의 백성 중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예맥족이 언어와 풍습이 비슷하고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넓이에 비해 인구가 적어서 점령지의 백성을 쉽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반면 반도의 남쪽에 사는 백성은 대부분 반도의 토착민족인 한족(韓族)이라 우리 고조선과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달라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맞는 말이오. 그럼 두 번째 이유도 설명해주겠소?”
“임둔국, 진번국, 진국, 이 셋을 편의상 일단 나라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들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작은 부족국가가 뭉친 느슨한 연맹일 뿐입니다. 우리 조선과는 달리 각 마을이나 도시마다 왕이나 부족장을 자처하는 자들이 군주 노릇을 하고 있지요.”
“서로 협력이 잘 안 되는 부족
국가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켜 나가면 되지 않겠소?
“하나하나를 점령하는 건 쉽겠지요. 하지만 큰 나라를 점령한 후에는 몇 안 되는 지배계층만 포섭하면 쉽게 점령지를 다스릴 수 있지만, 작은 나라 수백 개를 점령하고 나서 점령지의 반란을 막으려면 그 많은 도시와 마을에 전부 주둔군을 둬야 합니다. 게다가 반도의 남쪽 지역은 조선 땅보다도 늪과 우림은 많고 논밭은 적으니 조세를 거두기도 어렵습니다.”
“비왕의 말이 옳소. 하지만 남부를 점령하지 않으면서도 소국의 군주들이 왕검께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면 점령지에 반란이 일어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요.”
비왕 무는 태자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드루수스는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밝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 혹시 남쪽의 소국들이 조선을 연합의 맹주로 받들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렇소. 로마도 그런 방법으로 이탈리아반도에 사는 여러 민족이 사는 도시 국가를 복속시키지 않았소? 로마의 전략은 조선이 반도를 평정하는 데도 유용할 것이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고대 로마 공화국의 라틴인들은 그리스인과 에트루리아인 등 여러 이민족이 세운 도시 국가와 연합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아주 빠른 기간 동안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세력을 뻗어 나갔다.
이 연합정책의 특징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외교적 협박과 회유로 항복한 도시 국가에 자국의 지방관을 파견하는 대신 그 지역의 지배계층에게 지금까지 누려왔던 권력과 지위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세금을 원칙적으로 걷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로마연합에 가입한 도시 국가들은 연합의 맹주인 로마에 외교권을 넘겨야 하고 로마가 정복 전쟁을 시작하거나 타국의 침략을 받으면 무조건 지원군을 제공해야 하며 이 맹약을 어기면 훗날 로마군과 주변의 로마연합 소속 도시 국가들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한부는 어차피 점령해봤자 유지는 어렵고 당장은 충분한 세금을 걷기 어려운 한반도 남부에서 예산과 인력을 거의 들이지 않고 병력을 차출할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조선의 태자가 고향의 정복 정책을 높게 평가하자 신이 난 드루수스는 시킨 사람도 없는 데 혼자 신이 나서 비왕에게 연합정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비왕 무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감탄을 금치 못하며 태자에게 말했다.
“서역의 군사정책까지 훤히 꿰고 계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전하! 그런 방법이라면 분명 남벌을 감행할 실익이 있을 겁니다!”
“비왕이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구려. 다만 반도의 모든 소국이 기존의 연맹에서 탈퇴하고 조선연합에 가입하게 하려면 조선의 군대가 남부의 군대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다음 외교적으로 겁박과 회유를 병행해야 하오. 그러려면 먼저 지금보다 강한 군대를 육성해야 할 터인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소?”
태자가 문자 두 중년의 대신은 거의 동시에 다른 대답을 했다.
“더 많은 궁수와 투석꾼을 육성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더 강한 중보병대를 훈련 시키시지요. 전쟁이란 보통 더 강한 보병대를 보유한 나라가 이기는 법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갑자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드루수스 이 친구야! 전하 앞에서까지 또 보병 타령인가? 보병은 머리 위로 돌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니까? 왜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나?!”
“아! 무 이 사람이 또 답답한 소리를 하네! 그건 조선의 대장장이들이 아직 제대로 된 갑옷과 방패를 만들 줄 몰라서 그렇다고! 대장장이들이 로리카 하마타를 만드는 법을 익히면 화살 같은 건 아무것도 안 먹힐 걸세!”
“아 대체 그놈의 로리인지 뭔지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한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다투는 중년의 대신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원딜의 민족하고 근딜의 민족
사이에 부심 싸움이 붙었구나. 이거 재밌는데?’
조총이 수입되기 전까지의 한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호국 무기는 언제나 활이었다.
이는 기원전에도 마찬가지여서 고조선인들은 질 좋은 단궁을 만들 줄 알았고 국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병과도 역시 궁수였다.
반면 고대 로마는 극단적인 보병 중심의 군사조직이 특징이었는데 특히 기원전 3세기 중반인 현재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서 자국에서는 궁수를 한 명도 육성하지 않고 동맹국의 군대에 의존하고 기병 또한 정찰이나 패잔병 추격에만 쓸 정도였다.
그리고 한부는 이 두 나라 군대의 장점을 합친 막강한 군대를 육성할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 흥미진진한 중년 대신들의 언쟁을 구경하다가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하시오. 그대들은 지금 조선의 태자와 국무를 논하는 중이라오.”
“죄송합니다! 전하! 드루수스 박사의 말을 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소신들이 참으로 흉한 꼴을 보였나이다.”
“경들의 과오를 추궁하지 않을 테니 부디 서로 합심하여 긴밀하게 협력해 주시오. 왕검께서는 보병과 궁수가 모두 강한 군대를 육성하고 싶어 하시니 말이오. 드루수스 박사. 로리카 하마타라는 건 쇠사슬 여러 개를 연결해서 만드는 갑옷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전하.”
“마우리아 출신의 공인 중에서 그 갑옷을 만들 줄 아는 자들이 있소. 그 공인들과 함께 천하에서 가장 튼튼한 경번갑을 개발하시오.”
“전하. 경번갑이란 게 어떤 물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슬갑옷의 철판을 여러 장 덧대서 찌르는 공격에도 강한 갑옷이라오. 로리카 하마타의 개량판이라고 보면 되겠구려. 그리고 마우리아 출신 활 장인들에게 강한 각궁과 편전이라는 신무기를 만들게 하는 것도 잊지 마시오. 각궁은 장인들이 이미 만들 줄 알 거고 편전을 만드는 법은 나중에 알려주겠소.”
“로리카 하마타보다도 튼튼한 갑옷이라니!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비왕에게도 당부할 게 있소. 드루수스 박사에게 로마의 보병 전술을 배워서 로마식 보병대가 궁수, 투석꾼, 마상편곤을 쓰는 중기병 같은 조선의 병과들과 긴밀한 연계를 펼칠 수 있도록 훈련해 주시오.”
“전하. 서역의 병과가 과연 조선의 병과와 잘 어울릴지 의문입니다.”
“로마는 오직 강한 보병만으로 이 땅의 반도보다 넓은 반도를 평정했소. 그들의 보병 전술에는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거요.”
“음······.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드루수스 박사의 말이 모두 허풍인 것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왕검께서는 늦어도 4년 후에는 반도 전역을 조선연합의 세력권에 두고 싶어 하신다오. 그러려면 늦어도 내년 봄에는 원정을 시작해야 하니 군제개혁과 병장기 개발을 서둘러주시오.”
태자의 명을 받은 두 대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부에게 인사를 한 다음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한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각오를 다졌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앞으로 4년 뒤에 토사구팽당하고 자살할 운명이지. 막판에 진나라 왕하고의 사이가 최악이었다니까 진나라에 복수하게 해준다고 약속하면 딜을 해볼 여지는 충분할 거야. 그것도 그때까지 고조선의 체급이 적어도 연나라랑 싸워볼 만할 정도로 커져 있을 때의 얘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