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51화] 궁지에 몰린 상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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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는 한열 왕검과 자신이 대제사장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자마자 신속하게 독살의 증거를 없애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대제사장이 누워있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긴장한 표정으로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관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궁중 약사 천에게 곱게 빻은 코뿔소 뿔 가루와 수은을 섞은 탕약을 달일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연회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뿔소 뿔 술잔은 내가 직접 약방으로 가져가겠다! 대제사장님을 구하려면 한시가 급하니 잠시 궁중 예법은 잊고 전력으로 달려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내관은 태자의 말대로 전력을 다해 약방을 향해 달렸고 한부는 연회장으로 돌아가 코뿔소 뿔 술잔을 챙긴 다음 궁중 약사 천에게 찾아갔다.
그가 약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궁중 약사 천이 태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아궁이에 올려놓은 탕기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전하. 명하신 대로 탕약을 끓일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설마 그 탕기 안에 벌써 수은을 넣어둔 건가?”
“아닙니다. 전하. 소인도 처음 달여보는 탕약이지만, 먼저 코뿔소 뿔 가루를 준비한 다음 수은과 함께 넣고 달이는 게 더 약효가 잘 우러날 듯하여 전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했네. 그리고 이 탕약을 달일 때 두꺼운 두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게.”
“입과 코를 말입니까? 소인이 무식하여 그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꼭 그래야 하네. 탕약이 완성되면 내관의 숙소로 가져오게. 대제사장님께서는 그곳에 몸져누워계시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앞으로 두 시진(약 네 시간)만 기다려주시면 탕약을 다 달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코뿔소 뿔잔을 가루로 만드는 모습을 내가 전부 지켜보고 돌아갈 생각이네. 자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천금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섭섭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먼저 이 술잔부터 빻겠습니다. 전하.”
궁중 약사 천은 태자에게 대답하자마자 망치로 코뿔소 뿔 술잔을 부순 다음 그 조각을 약사발에 넣고 빻기 시작했다.
한부는 유일한 범행 증거물이 가루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완전범죄도 중요하지만, 만에 하나 나중에 아버지가 저 술잔에 술을 따라 드시다가 남아있는 짐독에 중독되시기라도 하면 정말 큰 일이지.’
그 후 한부는 약방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내관의 숙소로 돌아가서 한열 왕검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폐하. 이제 두 시진만 기다리시면 궁중 약사가 탕약을 가져올 겁니다.”
“대제사장님께서 이토록 위독하신데 두 시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냐! 약재를 푹 우려내려면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제사장님은 천신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니 분명 다시 일어나실 겁니다.”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제 대제사장님의 간호는 궁중 약사와 궁녀들에게 맡기고 천지신명께 대제사장님의 쾌차를 비는 제사를 지낼 준비하는 게 좋겠다.”
장남과의 대화를 마친 왕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의 제후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우리가 여기 모여서 웅성거려봐야 대제사장님께서 안정을 취하시는 데 방해가 될 뿐이오.”
그러자 대부 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왕검의 말에 맞장구쳤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용한 무당을 찾아내서 병마를 막는 부적을 만들게 하는 것이 대제사장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제후들도 두 사람의 말이 옳다고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열 왕검을 따라 내관의 숙소에서 나왔다.
그런데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던 한열 왕검이 막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의 눈에 복도 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후 연과 궁녀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모후 연은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남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아침에 천신의 사당에 절을 하고 오던 중 대제사장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궁녀들이 말하길 이 방 안에 대제사장님께서 몸져누워 계시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옵니까?
“그렇지 않아도 곧 부인에게 비보를 전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구려······. 불행히도 대제사장님께서는 연회장에서 술 한잔을 드시고는 갑자기 각혈하시며 쓰러지시더니 이제는 의식까지 흐릿해지시고 말았소.”
“그런 끔찍한 일이······! 천신이시여! 당신의 대변자에게 어찌 이리 큰 시련을 내리신단 말입니다!”
“아직 희망을 버리긴 이르니 진정하시오. 부인. 지금 궁중 약사가 진나라와 초나라에서 들여온 귀한 약재로 대제사장님께 드릴 탕약을 달이고 있으니 기다려 봅시다.”
“폐하. 그렇다면 지금부터 소첩이 직접 궁녀들과 함께 대제사장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까지 그분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부인이 말이오?! 부인이 의술이나 약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그렇지만, 대제사장님의 쾌차를 위해 하늘을 감동케 하려면 왕족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폐하. 부디 소첩이 대제사장님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음······. 부인의 말에 일리가 있소. 그럼 한동안 대제사장님께 결례가 없도록 잘 간호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한부는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직접 수은 탕약을 대제사장한테 먹이시겠다고?! 그러다 수은 중독되면 큰일인데!’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모후 연에게 말했다.
“모후시여. 대제사장님께 탕약을 드리는 일만큼은 직접 하시지 마시고 그 일을 많이 해본 궁녀에게 맡기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시 구하기 힘든 귀한 약재로 만든 탕약이니 실수로 흘리거나 바닥에 쏟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허약했던 어린 시절에 병을 앓으면 항상 이 어미가 손수 탕약을 먹여왔어요. 귀한 탕약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한부는 어머니의 말을 듣자 가슴이 답답했지만, 피할 수 없다면 지금의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역시 천신 신앙과 관련된 일이면 쉽게 물러나지 않으시는구나. 위험하기는 해도 왕족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극진히 간호하면 왕실이 대제사장을 독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확 줄어들긴 하겠지. 대신 어머니께서 수은에 중독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둬야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모후시여. 정 그러시다면 대제사장님을 돌보실 때 꼭 손에 두꺼운 가작 장갑을 끼시고 입과 코를 두건으로 가리십시오. 대제사장님께서는 맹독에 중독되신 것일 수도 있으니 그분의 숨결도 유독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태자의 말대로 준비를 단단히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 *
대제사장이 짐독을 먹고 쓰러진 진 후 몇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궁중 약사 천이 은빛이 감도는 탕약이 든 사발을 가지고 내관의 숙소에 찾아와 모후 연에게 말했다.“
“모후시여. 어명에 따라 코뿔소 뿔과 수은을 듬뿍 넣은 탕약을 대령했사옵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어서이리 다오!”
태자의 말대로 두꺼운 장갑과 두건을 착용한 모후는 탕약 사발을 받자마자 자리에 누워있는 대제사장에게 가져갔다.
모후는 궁녀 두 명과 함께 여전히 의식이 흐릿한 대제사장을 일으켜 앉힌 다음 그에게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대제사장님. 만독을 정화하고 노인도 젊게 만든 탕약이옵니다. 냄새가 역하지만, 이걸 전부 드셔야 쾌차하실 수 있다고 하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대제사장을 달랜 다음 그의 입을 손으로 벌려서 목구멍에 수은 탕약을 부어 넣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억······.”
대제사장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지만, 모후와 궁녀들은 걸쭉한 은빛 액체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의 목구멍 속에 전부 부은 다음 잽싸게 턱을 닫았다.
모후와 궁녀들은 대제사장이 탕약을 전부 삼킨 것을 확인하고 그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후 다시 몇 시간이 흘러 가을 하늘에 붉은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던 때, 대제사장의 안색을 살피던 궁녀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모후에게 말했다.
“모후시여! 보십시오! 흙빛이던 대제사장님의 안색이 몰라보게 밝아졌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오! 천신이시여! 정말 대제사장님의 피부가 훨씬 희고 고와졌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마에 가득했던 주름도 많이 펴진 걸 보니 탕약이 효험이 있나 봅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약방에서 가서 궁중 약사에게 탕약을 더 지어오라고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모후시여!”
사실 대제사장의 안색이 밝아진 것은 급성 수은 중독의 증상이었다.
다량의 수은이 체내로 들어가면 온몸의 멜라닌 색소가 없어져서 피부색이 하얘지고 혈액 순환을 방해해서 피부가 경직되는데, 이때 잠시나마 주름이 펴지고 피부가 탱탱해진다.
원역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800년 후의 중세 유럽인들도 이런 현상을 보고 수은이 젊음을 되찾아 주는 명약으로 착각했으니 기원전 3세기의 동아시아인들도 같은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대제사장의 곁을 지키는 동안 한부는 다시 궁궐의 주방에 찾아가서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한동안 모후와 대제사장님을 간호하는 약사와 궁녀의 식사에는 서역에서 가져온 마늘을 듬뿍 넣은 음식을 매일 올리도록 해라.”
“전하. 서역의 마늘은 맛이 굉장히 맵습니다. 그런 음식을 매일 드시면 모후께서 괴로워하시지 않겠습니까?”
“서역의 마늘은 양기가 강해 심신이 허할 때 먹으면 큰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 모후께서는 대제사장님을 간호하시느라 많이 지치셨을 테니 마늘을 많이 드실 필요가 있다.”
“소녀가 무식하여 아직 서역 마늘의 효능을 몰랐습니다. 전하의 명대로 모후께 올릴 식탁에 마늘을 넣은 음식을 올리겠나이다.”
마늘에 들어있는 유황성분은 수은을 포함한 몸속에 축적된 중금속을 배출하는 효능이 있다.
수은 탕약을 며칠 다루는 정도면 심한 수은 중독이 발생할 확률이 높지 않지만, 한부는 어머니가 중금속에 중독될 확률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대제사장이 빨리 죽어야 어머니가 병을 얻지 않으실 텐데. 그래! 그 방에 불을 더 때야겠다. 그러면 혈액순환이 빨라져서 짐독하고 수은이 전신에 빨리 퍼지겠지.’
* * *
오장육부가 짐독과 수은에 찌든 대제사장은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급사했다는 소문은 고조선 전역에 마른날의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자네 소문 들었는가?! 대제사장님께서 여러 제후들과 함께 왕검성의 궁궐에 찾아가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대!”
“뭐?! 갑자기 왜?!”
“태자께서 불교라는 서역의 종교에 관심을 두시는 걸 왕검께 따지다가 그러셨다는 걸 보니 서역의 신이 천벌을 내린 게 아닐까?”
“그게 정말인가?! 그저 불온한 무리에게 독살을 당하신 걸 수도 있잖아.”
“그건 아닌 모양이야. 왕검께서 용한 해독제와 영약을 함께 달여서 대제사장님께서 드시게 했다는데 결국 숨을 거두셨다는 걸 보니 말이야.”
“휴······ 그것참 섬뜩하구먼. 대제사장님과 같이 간 제후들은 자기도 천벌을 받을까 봐 속이 타겠어.”
많은 백성의 예측대로 대제사장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던 제후들은 걱정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그날의 자리를 주도했던 상 완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간 상 완은 천벌을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길······. 하필 그날 대제사장이 궁궐에서 뒈져버리는 바람에 우리 가문의 처지가 말이 아니게 됐구나!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그는 대제사장이 코뿔소 뿔을 먹고도 죽어서 사인이 독이 아니라는 결정이 난 덕에 독살범의 누명은 벗었지만, 대신 그날 함께 입궁했던 제후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입궁했던 제후들은 상이 부추기거나 강요하는 바람에 불교를 모독했다가 대제사장도 천벌을 내려 죽이는 부처의 원한을 샀다며 그를 원망했기 때문이다.
“호랑이 부족 출신 대부들까지 점점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어······. 이대로는 왕실을 견제하기는커녕 상의 자리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때, 상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닫힌 침실의 문밖에서 주인에게 보고했다.
“상이시여. 대문 밖에 몇 년 전 양자로 들이신 계가 찾아왔습니다. 대문 안으로 들일까요?”
“뭐라고?! 그 자식이 무슨 낯짝으로 날 다시 찾아왔다는 말이냐?! 들여보내라! 그놈을 멍석말이해야 내 기분이 좀 풀리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