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8화] 미끼를 문 내부의 적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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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63년의 천신 제전이 시작된 날 밤, 상 완은 왕검성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혀서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대제사장을 설득할 계책을 세우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질 않는구나! 대제사장은 자기 권위가 위협받지 않는 때에는 늘 더 부유하고 세력이 강한 쪽에 붙었지. 그런데 요즘 왕실은 그 늙은이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는 게 눈에 보여.’
한열 왕검은 한부가 마우리아 제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변함없이 샤머니즘 세력에 많은 후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태자가 직접 나서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긴 했지만, 그는 불교 교리에 어두운 데다가 아직 고조선에 불교 신자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한부의 포교 활동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당장은 대제사장을 필두로 한 샤머니즘 세력이 자신들의 최대 후원자인 왕실과 대립각을 세우도록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 완은 갑자기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쉬면서 홀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거야 원!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그런데 그때, 누군가 빗장으로 잠겨있는 숙소의 방문 밖에서 그를 불렀다.
“아버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상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깜짝이야! 이 야심한 밤에 누가 찾아온 거냐?!”
그가 묻자 다시 문밖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소자 계입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버님께 전해야 할 소식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뭐? 계? 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난 그런 이름의 아들을 둔 적이 없다!”
“8년 전에 평민의 아들을 한 명 양자로 들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소자이옵니다. 아버님.”
상 완은 계의 대답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를 떠올리면서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야 기억나는구먼. 예전에 왕실의 소식을 캐내려고 왕검성에 잠입시켰던 농부의 자식 중 한 놈이로군. 천한 놈이 감히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그리고 저놈이 왜 이제 와서 날 찾는 거지?“’
그는 8년 전에 대외적으로 계를 양자로 들였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왕립 교육기관인 이룡도에 첩자를 심기위한 수단이었을 뿐으로 농민 출신 양자를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상은 계가 태자와 함께 마우리아 제국으로 떠나면서 약 2년 동안 연락이 끊어진 뒤에는 그의 존재마저 잊어가던 참이었기에 계를 쫓아내려고 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서신 한 통 보내지 않더니 갑자기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온 거냐? 돌아가서 새 주인이신 태자 전하를 열심히 섬기도록 해라.”
“아버님. 소자가 태자 전하의 감시 때문에 아버님께 연락을 자주 드리지 못했으나 매일 끼니를 걱정하던 농민의 아들을 거둬 무관으로 만들어 주신 은혜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천신을 모독하려는 왕실과 태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이렇게 남의 눈을 피해 야심한 밤에 찾아왔습니다.”
“왕실의 횡포?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아버님. 왕검성에는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소자가 적어온 서신을 문 앞에 두고 가겠사오니 누가 집어가기 전에 꼭 읽어주십시오.”
“음······. 알겠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럼 소자 서신을 두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계는 말을 마치자마자 품속에 넣어온 죽간을 문앞에 내려놓은 다음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상 완은 점점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문을 열고 팔을 뻗어 계가 두고 간 죽간을 집은 다음 잽싸게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 완은 옆방에서 자고 있던 하인을 불러 등불을 켠 다음 죽간을 펼쳐서 그 위에 새겨진 제나라의 글을 읽더니 곧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불교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발칙한 종교였구나. 왕검과 태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종교를 전파하려고 했던 거지? 아무튼, 이 서신을 보여주자마자 노발대발할 대제사장의 벌써 눈에 선하구먼.’
그는 죽간을 다시 잘 말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외출복을 입고 하인에게 지시했다.
“어서 외출할 준비를 하여라. 지금 당장 대 제사장님을 봬야겠다.”
“이 야심한 시간에 말입니까?”
“귀가 먹었느냐? 한시가 급한 일이니 어서 준비나 하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상이시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은 상의 호통에 기겁하면서 상에게 외출복을 입인 다음 방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작은 등불 하나를 가져왔다.
잠시 후, 외출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대제사장이 묵고 있는 숙소에 찾아갔다.
숙소를 지키던 호위병이 상의 말을 듣고 그를 대제사장의 방문 앞으로 데려가자, 상 완은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대제사장님. 이미 침소에 드셨는지요? 꼭 지금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닫혀있는 미닫이 너머에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말이오? 알겠소. 들어오시오.”
그 말을 듣고 호위병이 미닫이문을 열자 상은 자기가 데려온 하인을 밖에 세워둔 다음 방석 위에 정좌하고 있는 대제사장에게 걸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상이 대제사장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상.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야심한 밤에 본인의 단잠을 깨우셨소?”
“대제사장님. 왕검이 지금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괴한 다른 나라의 종교를 들여와 대제사장님의 권위를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뭐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본인도 태자가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소.”
“제 말을 들으시는 것보다는 이 서신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소신이 몇 년 전 왕검성에 심어둔 자가 왕실의 무관이 되어 태자 밑에서 일하고 있사온데, 그자가 조금 전에 제 숙소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음······.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대제사장은 상이 건네준 죽간을 받아서 펼쳐서 읽어보더니 곧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노성을 질렀다.
“이런 고얀 것들을 봤나!! 불교란 것은 그저 다른 나라의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었구려!!”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님. 노비라도 수행을 쌓으면 누구나 신령스러운 성인이 될 수 있다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따위 교리를 지닌 종교를 조선 땅에 퍼뜨리려 하다니! 게다가 이 서신에 의하면 왕실은 불탑이라는 해괴한 상징물을 왕검성 한복판에 세울 계획이라고 하오. 이는 전능하신 천신과 그분의 입인 본인에 대한 모욕이오!”
“분명 간악한 태자가 천신께서 직접 선택하신 대제사장님의 권위를 빼앗기 위해서 꾸민 일일 겁니다.”
“내일 열릴 운동 경기를 구경할 생각이나 하면서 잠을 청할 때가 아니었구려! 상! 내일 해가 뜨자마자 왕검성에 모인 호랑이 부족과 곰부족 제후 전원을 데리고 궁궐로 가서 왕검에게 항의합시다! 왕실로부터 다시는 조선 땅에 불교를 퍼뜨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물러나선 아니 될 것이오!”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님. 그럼 바로 경과 대부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사람을 보내 대제사장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부탁하오. 상. 오랜 세월 동안 이어온 신앙과 전통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대제사장님. 그럼 다른 제후들과 함께 동이 트자마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상 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에 달군 쇠처럼 얼굴이 빨개진 대 제사장에게 다시 인사를 한 다음 숙소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먼. 대제사장이 왕검에게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면 기세등등하던 왕실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겠지. 내일 아침에 왕검 녀석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 * *
계가 상 완에게 서신을 전한 다음 날 새벽, 대제사장과 천신 제전을 구경하러 왕검성을 찾은 고조선의 제후 28명이 수백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왕검성의 궁궐로 몰려갔다.
궁궐의 입구를 지키던 왕실 근위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제후 무리의 선두에 서 있는 대제사장에게 물었다.
“대제사장님. 이렇게 이른 새벽에 어인 일로 궁궐을 찾으셨는지요?”
그러자 대제사장은 도끼눈을 뜨면서 근위병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왕검과 태자께서 삿된 이민족의 종교에 빠지셨다는 통탄할만한 소식을 듣고 왔다. 당장 길을 비키지 않으면 너와 네 가족에게 천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
“그런······! 제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사람을 보내 왕검께 입궁 허가를 받아오겠습니다!”
“어허! 이놈이 말귀를 못 알아 먹는구나! 어서 비키래도!”
대제사장은 호통을 치면서 무작정 궁궐의 대문으로 다가왔고 근위병들은 그의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근위병의 보고를 듣자마자 서둘러 궁궐 대문으로 달려온 비왕 무가 대제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한 다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제사장님께서는 왕검 폐하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니 어명을 기다리실 필요가 없지만, 다른 제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장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 많은 인원이 입궁 허가 없이 궁 안으로 들이닥치면 반역으로 간주 될 수 있으니 일단 대제사장님만 왕검께 모시겠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상.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어명이 떨어지는 동안 내 먼저 왕검을 뵙고 천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겠소.”
상은 그 말을 듣고 대제사장에게 대답했다.
“부디 대제사장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비왕 무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급히 근위병 한 명을 왕검의 침실로 보냈다.
바왕의 명을 받은 병사는 헐레벌떡 문 앞에 서서 한열 왕검에게 보고했다.
“왕검 폐하! 대제사장님께서 허락 없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 폐하를 찾고 계십니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한열 왕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침실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내관에게 물었다.
“뭐라?! 설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대제사장님께서 갑자기 왜 그러신다더냐?”
“아직 자세한 사정은 전달받지 못했으나 서른 명에 가까운 제후들도 몰려온 것으로 봐서는 덕담을 나누러 찾아오시지는 않은 듯합니다.”
“어제 천신께 드리는 제사를 마칠 때만 해도 분명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한열 왕검은 지난밤에 대제사장과 상 완의 숙소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부는 내관 참에게 대제사장이 궁궐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가 일을 잘해줬만! 드디어 제일 골치 아픈 자를 처리할 때가 왔구나!’
그는 자신의 계획을 모르는 내관 참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대제사장님께서 궁궐에 찾아오셨단 말이지. 알겠네. 곧 예복을 입고 나갈 테니 그만 물러가 있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내관이 문을 닫으며 침실 밖으로 나가자 한부는 이부자리 옆의 탁자 위에 올려둔 나무상자에서 짐독이 들어있는 작은 인도산 유리병을 꺼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대제사장과 제후들을 달래려고 연회를 여시겠지. 그럼 미리 주방에 가서 주안상을 준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