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7화] 긴장하는 제후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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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63년 10월 중순의 어느 날, 제9회 천신 제전을 구경하러 고조선 전역에서 몰려온 수많은 인파가 왕검성으로 몰려들었다.
왕검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구름떼같이 몰려오는 수천 명의 백성을 보고 기함을 할 듯이 놀라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이구······. 이 시기엔 늘 왕검성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올해는 유난히 심하구나. 제전이 열리려면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벌써 저렇게 개떼처럼 몰려오다니······.”
“그러게 말일세. 오늘은 종일 정신 없을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구먼. 올해부터 천신 제전에 새 경기 종목이 추가됐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꾼이 늘어난 모양일세.”
“작년에 활쏘기가 추가됐는데 올해 또 새 종목이 생겼단 말인가?”
“정 박사댁에서 일하는 노비를 시장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올해부터는 창 던지기하고 씨름하고 검술 경기도 한다는구먼.”
“그거 볼만하긴 하겠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저렇게 모여드는구먼.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 3층 건물 소문이 조선 땅 구석구석까지 퍼진 모양이야. 그걸 보러온 사람도 적지는 않겠지.”
“매일 그걸 보는 우리도 아직 신기한데 외지인들은 그걸 보면 눈이 뒤집힐 걸세.”
두 병사가 수다를 떠는 어느새 성문 앞에 도착한 고조선인들은 성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긴 줄을 섰다.
그러자 성문의 경비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여행자들이 지닌 왕실이나 각 지역의 제후들이 발행한 통행증을 확인하는 한편 위험한 물건의 반입을 막기 위해 통행인의 짐을 꼼꼼히 검사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장마철의 강줄기처럼 굵고 긴 줄이 맨 뒤에서부터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경비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귀빈을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줄의 맨 앞부분에 서 있던 백성들이 자리를 비키자, 그 사이를 지나온 화려한 쌍두마차 열다섯 대가 성문을 앞에 멈추더니 맨 앞의 마차를 모는 마부가 경비병들을 내려다보면서 소리쳤다.
“상을 비롯한 제후 열다섯 분께서 행차하셨다! 어서 왕검께 귀한 손님이 도착하셨음을 알리거라!”
“알겠습니다. 나리. 성문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내인이 제후님들을 숙소로 안내할 겁니다.”
경비병들은 절도있게 경례하면서 성문을 활짝 열었고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들을 태운 마차가 차례로 왕검성의 시내에 들어섰다.
일렬로 늘어선 화려한 쌍두마차의 행렬은 기세가 등등해 보였지만, 마차에 타고 있는 제후들의 표정은 태어나서 처음 대도시에 와보고 놀란 촌부의 얼굴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상은 먼발치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3층 아파트 열 채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태자가 망둥이인지 뭔지 하는 요상한 나라에서 데려온 외인들이 대단한 건물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설마 저 정도였을 줄이야······. 대체 어디다 쓰려고 저런 기묘한 건물을 지었단 말인가?”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들이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돌려가며 인술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에도 그들을 태운 마차는 쉴새 없이 달려서 왕검성의 궁궐에 도착했다.
상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마차에서 내리자 미리 마중을 나온 내관이 두 손을 모으며 그에게 읍했다.
“어서 오십시오. 상이시여. 왕검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왕검께서는 어디 계신가?”
“알현실에서 궁궐을 찾으신 제후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어서 앞장서게.”
내관은 상의 짧은 대답을 듣고 다시 읍을 한 다음 호랑이 부족의 제후들을 알현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앞서가던 내관이 발걸음을 멈추고 미닫이문을 열자, 상이 알현실 안으로 들어가 옥좌에 앉아있는 한열 왕검에게 인사했다.
“상 완이 왕검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상. 참으로 오랜만에 그대의 얼굴을 보는구려.”
“폐하께서 한동안 옥좌 대신 말 안장에 즐겨 앉으셨기에 용안을 뵐 일정을 잡기 어려웠나이다.”
“부족회의를 거치지 않고 왕실의 병력으로만 북벌을 감행한 건 연나라군이 반도 밖으로 물러난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소. 시간을 지체했으면 동쪽의 옥저인들이 빈 땅을 집어삼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오.”
“심려치 마시옵소서. 폐하. 소신을 비롯한 모든 경과 대부는 불만을 품기는커녕 폐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몸소 전장에 나서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열 왕검은 상 완의 가식적인 대답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노회한 호랑이가 발톱을 숨기는구나. 네놈이 짐을 칭찬하려고 먼 왕검성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 왕실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해졌는지를 확인하려고 온 거겠지. 딱히 숨기지 않을 테니 그 옹이구멍 같은 두 눈에 똑똑히 담아가거라.’
왕검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상이 짐의 뜻을 이해해 줬다니 참으로 기쁘구려. 짐도 왕실에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주는 그대에게 귀한 선물로 보답하고 싶소. 여봐라! 왕실의 창고에서 준비해둔 보검과 철검을 가져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왕검이 명하자 옥좌 곁에 대기하고 있던 내관은 알현실 밖으로 나가서 한 손에 검을 든 병사 두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상 완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왕검에게 물었다.
“폐하. 소신에게 검을 두 자루나 주시려는지요?”
“보검은 몰라도 잡졸이나 쓸법한 투박한 철검을 상에게 하사할 리가 있겠소? 저 철검은 지금부터 흥미로운 장면을 제후들에게 보여주려고 가져왔소.”
한열 왕검은 상에게 대답한 다음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둘 다 검을 뽑아서 상에게 도신을 보여주어라.”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두 병사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자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들은 손잡이에 은도금이 된 보검의 도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감탄했다.
“오오! 칼날에 저토록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검은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마치 잔물결처럼 보이는 무늬로군요! 혹시 저 검에는 강의 신 하백의 기운이 서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열 왕검은 제후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병사가 들고 있는 검은 한부가 마우리아 제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중세 아랍의 명검인 다마스쿠스 검을 만든 것과 같은 재료로 만든 강철검이었다.
인도 아대륙의 남부에서 생산된 철광석은 다양한 물질이 섞여 있는데 이 철광석을 제련해서 만든 우츠 강철을 이용해 단조공법으로 검을 만들면 칼날에 물결 모양 무늬가 나타난다.
상 완은 속으로 고대 인도에서 수입한 강철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왕검에게 말했다.
“이렇게 귀한 검을 소신에게 하사하시다니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섬세한 무늬도 무늬지만, 마치 비단처럼 얇은 도신이 참으로 인상적이군요.”
“짐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구려. 그런데 이 검의 진가는 아름다운 외관에 있지 않소.”
“혹시 도신의 무늬에 영험한 주술이라도 걸려있는지요?”
“잠시 후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왕검은 상에게 짧게 대답한 다음 다시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여봐라.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서 두 검의 칼날을 부딪쳐보아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어명을 받은 두 병사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두르자 곧 날카로운 금속음이 알현실 안에 울려 퍼졌다.
- 카앙!
얇은 강철검의 칼날과 부딪친 철검의 도신이 유리처럼 깨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고 상을 비롯한 제후들은 그 모습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 천신이시여!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 얇은 검이 오히려 두꺼운 철검을 박살 내다니! 서쪽 대륙에서 명검 월왕구천검보다도 뛰어난 검임이 분명합니다!”
왕검은 그런 제후들을 보고 웃으면서 상에게 강철검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참으로 놀랍지 않소? 이 검은 태자가 서쪽 대륙의 마우리아라는 나라에서 다녀오면서 가져온 물건이라오.”
“폐······ 폐하. 역시 그 검에는 강력한 주술이 걸려있는 게로군요······. 설마 소지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종류의 흉물을 소신에게 하사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하하하하! 짐이 그럴 리가 있겠소?! 이 검은 철광석을 미지의 기술로 제련한 강철로 만들어져서 이토록 가볍고 튼튼한 것뿐이오. 아직 서쪽 대륙의 일곱 나라 중에서 가장 부강하다는 진나라나 조나라에도 없는 물건이라오.”
“그럼 태자가 강철의 제련법도 알아 왔겠군요······.”
“강철 제련법은 우리 조선의 자연환경에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소. 대신 앞으로는 마우리아와 활발하게 무역을 할 수 있으니 앞으로 강철제 무기를 많이 수입할 수 있을 것이오.”
왕검은 호랑이 부족 제후들에게 도가지 제철법이 유출될 것을 걱정해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조만간 고조선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하는 왕실의 모든 병사가 강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상 완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제야 내 영지에도 철 제련시설을 갖추어 놨더니 태자 그 망할 것이 또 이런 엄청난 무기를 들여왔구나! 이제 무력으로 왕실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완전히 접는 게 좋겠구나. 분명 왕검도 협박의 의미로 이 검을 나한테 주는 것이겠지.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다!’
한열 왕검은 상 완의 표정을 보고 그의 속내를 짐작하면서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상! 말을 잊을 정도로 이 검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오? 원한다면 그대의 장남이 쓸 강철 보검을 한 자루 더 선물하겠소.”
“마······ 말씀은 감사하오나 사양하겠습니다. 폐하. 지난 2년 동안의 전장에서 아무 공적도 세우지 못한 소신이 폐하께 값진 검을 두 자루나 하사받으면 백성들의 빈축을 살지도 모르옵니다.”
“역시 조선의 상답게 생각이 깊으시구려. 그럼 슬슬 저녁 식사 시간도 다가오고 하니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이미 그대와 다른 제후들에게 대접할 주안상을 마련해 두었소.”
“소신과 제후들을 이처럼 후하게 대접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폐하.”
한열 왕검과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들은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궁궐의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여섯 명의 군주와 제후가 직사각형 모양 식탁 주변에 둘러앉자 궁녀들이 호화로운 은접시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과 제후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재료로 만든 여러 요리를 맛보고는 다시 한번 놀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 멧돼지고기 수육 위에 뿌려진 양념의 알싸한 맛이 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는군요! 폐하. 이 양념을 만드는 데 쓰인 채소의 이름을 여쭤봐도 될는지요?”
“서역에서 들여온 생강이라는 채소라오. 그 외에도 태자가 다양한 작물의 종자를 들여왔는데 대부분 조선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 것 같소. 내년부터는 백성들이 새로운 작물 덕에 더 풍족한 삶을 즐길 테니 참으로 기쁜 일이오.”
한열 왕검은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지만, 상 완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왕실 직할령의 백성들이 새 작물을 길러서 배고픔을 모르고 산다는 소문이 나면 또 우리 호랑이 부족의 영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왕검성 주변으로 몰려갈 게 아닌가? 병사들에게 영지 전역의 경계선을 지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주 발등에 불이 떨어졌구먼······.’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식탁에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밥이나 먹고 운동 경기나 구경할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민 없는 제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어서 대제사장을 만나서 대책을 논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