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화] 고조선의 오디세우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선장님! 저기 보십시오! 누군가 해변에서 횃불을 흔들고 있습니다!”
젊은 선원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자 계와 석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육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은 좌우로 붉은 석양이 깔린 백사장에서 횃불을 흔드는 한부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벌써 태자 전하께서 원주민들을 설득하셨구나!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그러나 계는 먼발치에서 흔들리는 횃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기뻐 날뛰는 석에게 말했다.
“석아.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이 거리에서는 횃불을 휘두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어려워. 일단 주변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해변으로 접근하는 게 좋겠어.”
“어?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전하께서 해안가에 상륙하신 지 아직 한 시진 정도밖에 안 되긴 했네.”
선장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서 계에게 대답했다.
“소인의 귀에도 석 님의 말씀이 타당하게 들립니다. 그럼 배를 천천히 해안가 쪽으로 몰면서 주변을 경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나는 활을 다룰 줄 아는 선원들에게 시위에 화살을 걸어두라고 지시하겠소.”
계는 선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른 선원 열 명과 함께 박달나무로 만든 단궁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렇게 고조선의 선원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범선을 두 해안 절벽 사이에 조성된 백사장 근처로 몰고 가자 그들의 눈에 횃불을 흔들며 소리치는 태자의 모습이 비쳤다.
“어이! 나다! 조선의 태자 한부다! 다들 그만 무기를 내려놓거라!”
계와 석은 한부의 외침을 듣고 무기를 갑판에 내려놓은 다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휴······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전하! 원주민에게 해를 입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래. 대화가 잘 풀려서 파도 부족이 우리를 손님으로서 대접하기로 했다. 그러니 우리도 손님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처럼 무기를 내려놓고 마을로 들어가는게 좋겠다..”
“이들은 스스로를 파도 부족이라고 부르는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고조선인 스물아홉 명이 태자의 지시대로 무기를 원주민들에게 넘긴 다음 배에서 내리자 나무 파도 부족의 전사들도 경계를 풀면서 손님을 마을로 안내했다.
그리고 태자 일행이 어지간한 성인 남자 키보다 훨씬 높은 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서 마을 중심부로 걸어갈 때, 계가 놀란 표정으로 마을 안을 둘러보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파도 부족이 그저 배만 잘 모는 야만인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정교한 목조 건물을 지을 줄 아는군요.”
“모든 나라나 부족이 특출난 점이 하나씩은 있는 법이지. 이 마을의 중심부를 봐라. 윗부분이 평평한 언덕 위에 또 높은 나무 울타리를 둘러 마을의 주요시설을 지키고 있지. 자네가 보기에 이 마을을 점령하려면 어떤 방법이 최선일 것 같은가?”
“이 마을은 삼면이 해안 절벽에 둘러싸여 있고 튼튼한 통나무로 만들어 성벽이나 다름없는 울타리가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천연 항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배가 바로 마을로 바로 들어올 수는 없지요. 정면에서 공격하면 분명 아군의 피해가 클 겁니다.”
“잘 봤구먼. 그래.”
“그러니 제가 이 마을을 공격한다면 마을 정면에 촘촘한 포위망을 친 다음 파도 부족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저들의 항복을 받아낼 겁니다.”
“수비군보다 병력이 훨씬 많고 적의 원군이 오지 않을 상황이면 그 전략이 딱 공성(攻城)의 정석이지. 그리고 딱 그런 방법으로 이 마을을 공격하려 하는 산악 부족의 군대가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하더군. 앞으로 사흘 정도면 마을 부근에 도착한다고 하는구나.”
“전하! 그럼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싸움에 휘말리기 전에 이 마을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파도 부족의 부족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번 전투에서는 파도 부족의 편에서 싸우는 게 우리에게 득이 될 것 같다.”
“네?! 전하! 이 섬은 한 번에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큽니다. 파도 부족이 아니라도 우릴 도와줄 부족을 다시 찾으면 될 일입니다.”
“과연 다음에도 그렇게 일이 잘 풀릴까? 나는 아까 배 위에서 이 마을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거짓말을 했다. 덕분에 지금 파도 부족의 사람들은 조선의 왕족과 자기 부족의 오랜 조상이 같다고 믿고 있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런 황당한 말을 이들이 순순히 믿어주었단 말입니까?! 참으로 순박한 자들이군요.”
“파도 부족민들이 어리석어서 내 거짓말에 속은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전하의 지략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분명 제가 상상도 못 할 교묘한 계책으로 이들을 농락하셨겠지요.”
“그런 게 아니다. 파도 부족민은 전혀 다른 외모와 옷차림을 한 외국인이 능숙하게 자기들의 언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함과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값진 은제 잔무늬거울을 선물하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니까 존망이 걸린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신에 내려주신 길한 징조로 여기고 싶어진 거겠지. 사람은 믿고 싶은 걸 쉽게 믿고 마니까 말이다.”
“그럴 수가······. 파도 부족민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건 여러 우연이 겹쳐진 행운이군요.”
“그렇겠지. 그러니 다른 부족을 찾아내도 협력을 받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부족을 찾아낸다고 해도 이 파도 부족처럼 항해술에 정통한 자들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럼 결국 파도 부족민과 함께 산악 부족의 원주민과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단 말씀이군요······. 과연 우리 서른 명이 이 마을을 포위할 정도로 많은 병사를 쫓아버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의 중심부에는 집 여러 채에 둘러싸인 공터가 있다. 그곳으로 적을 유인해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면 승산이 있을 거야.”
“음······ 그 많은 적군을 어떻게 유인할지가 관건이겠군요.”
“그 방법도 생각해둔 작전이 하나 있긴 한데······ 그 방법을 쓰려면 네가 나하고 석을 검으로 베어주어야겠구나.”
계와 석은 태자의 말을 듣자마자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 * *
한부는 일행과 함께 파도 부족의 마을 중심부에 있는 부족장의 집에 도착한 후 파도 부족의 원로들에게 자신의 계책을 설명해주었다.
강인한 인상의 부족장도 한부의 계책을 듣고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우리 부족의 안위를 위해서 그대의 피를 흘리겠다는 말이오? 오래전의 선조가 같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산악 부족도 그대와 선조가 같을 수도 있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부족을 위해 그대가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는 것 같소만?”
“우리 조선인은 오래전 조상님께서 파도를 가르며 먼바다에서 항해하시던 전통을 늘 흠모해왔지요. 산악 부족은 산짐승의 고기와 나무 열매에 정신이 팔려서 바다로 나가는 법을 완전히 잊은 자들이니 동포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나 우리 부족에는 크게 다치지 않을 만큼만 살가죽을 베는 묘기를 부릴 수 있는 전사가 없소. 우리 부족의 무술은 전부 일격필살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졌으니 말이오.”
“걱정 마십시오. 여기 있는 제 부하가 철검을 능숙하게 다룹니다.”
“그대들이 가져온 반짝이는 검 말이구먼. 확실히 그렇게 예리한 물건을 고수가 휘두르면 상처의 깊이를 조절할 수도 있겠지. 좋소. 한번 해봅시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우리 부족은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돌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럼 저는 바로 그럴싸한 상처를 만들겠습니다.”
한부는 파도 부족의 부족장과 장도들을 설득하고 부족의 전사들이 거둬갔던 무기를 돌려받은 다음 계에게 지시했다.
“자, 계야. 이제 내 등가죽과 석의 팔뚝을 살짝 베어다오. 근육이 상하면 안 되지만, 피가 옷을 어느 정도는 옷을 적실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전하······ 정녕 이 방법밖에 없겠습니까?”
“우리 중 한 명도 죽지 않고 파도 부족의 협력을 얻어낼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뿐이다.”
“후······ 어쩔 수 없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갑자기 움직이시면 크게 다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알았다. 석상처럼 꼼짝도 안 하고 있으마. 그럼 다들 마을의 공터로 나가볼까?”
계와 석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태자, 그리고 파도 부족의 원로들과 함께 부족장의 집을 나선 다음 어느덧 해가 지가 달빛이 비치는 마을 한가운데의 공터에 섰다.
그리고 한부가 먼저 등을 보이자 계는 부족장을 비롯한 여러 부족민이 보는 앞에서 검을 뽑아 번개 같은 속도로 태자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 휘익!
달빛을 머금은 철검이 공중에 대각선을 그리자 한부가 입은 옷의 등 부분에 붉은 얼룩이 번져 나갔다.
“큭!”
석은 신음을 내뱉으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태자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 외쳤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계의 검술 실력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느냐? 그저 등가죽이 조금 화끈거릴 뿐이다. 계야. 이제 석에게 칼침을 놓아줘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계가 검날에 묻은 태자의 피를 헝겊으로 잘 닦아내고 자신에게 철검을 겨누자, 석은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사정했다.
“계야! 나 아직 여자 손도 못 잡아봤다! 제발 실수로 네 친구 총각 귀신 만들지 마라!”
“걱정하지 마. 태자 전하께서 네 상처는 작게 만들라고 하셨으니까. 얼른 왼쪽으로 돌아.”
“오! 천신이시여!”
계가 이번엔 친구의 팔뚝 윗부분을 향해 검을 가로로 휘두르자 석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허어어어어억!”
“누가 들으면 올가미에 걸린 멧돼지 숨통 끊는 줄 알겠네. 네 상처는 정말 살가죽만 살짝 벤 정도니까 너무 엄살피우지 마라. 이거 중간에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가고.”
계는 그렇게 말하면서 석에게 피가 조금 묻은 검을 넘겨주었다.
파도 부족의 부족장은 계의 작업이 끝난 것을 보고 하인에게 상처에 바르는 약을 가져오게 한 다음 한부에게 말했다.
“상처가 크지는 않지만, 먼 길을 걸어가야 하니 약을 발라 피를 멈추는 게 좋겠소.”
“아닙니다. 부족장님. 이 정도 상처면 자연히 피가 멎을 테니 괜찮습니다.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은 파도 부족의 전사에게 습격당한 후에 간신히 마을에서 도망친 대륙인을 연기해야 하니 더더욱 약을 바를 순 없지요. 상처에 파도 부족의 약이 발려있으면 산악 부족 놈들이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 정도 상처면 움직이는 데야 지장이 없겠지만, 제법 쓰라릴 텐데······. 이번 작전의 결과와 관계없이 우리 부족은 그대가 베푼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소.”
“하늘이 항해에 서툰 우리를 이 섬까지 인도해 주셨으니 이번 작전도 분명 잘 풀릴 겁니다. 그럼 며칠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꼭 다시 만납시다. 부디 바다의 신께서 두 사람을 지켜주시길.”
그 후 한부와 석은 머리를 풀어헤쳐 패잔병 같은 몰골을 한 다음 철검 한 자루와 파도 부족의 나무 몽둥이 한 개, 그리고 가죽 물통 하나만 가지고 마을에서 나와 파도 부족의 정찰병이 가르쳐준 산악 부족의 진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작은 물통에 든 물만 마시며 꼬박 이틀 동안 열심히 초원을 걷자 한부와 석의 눈에 먼발치에 수십 개의 모닥불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석아! 드디어 산악 부족의 진지 근처에 도착했나 보다!”
“정찰병 말로는 사흘 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놈들도 파도 부족의 마을 쪽으로 행군했나 봅니다.”
“자, 그럼 내가 알려줬던 계획 잘 기억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전하.”
“그래. 그럼 어서 가자.”
한부는 석과 함께 온 힘을 다해 달려가면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기와 잡곡을 요리해서 먹고 있는 산악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파도 부족의 언어로 외쳤다.
“도와주시오! 파도 부족 놈들에게 습격당해서 동료를 잃고 상처를 입었소! 제발 도와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