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화] 아버지는 북으로, 아들은 남으로.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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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부가 결국 가버렸구나······.”
한열 왕검은 말을 탄 아들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비왕 무는 주군의 푸념이 귓가를 스치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호랑이도 맨손으로 생포한 태자가 아닙니까? 잠시 초나라에 유학을 다녀오는 정도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고맙소. 비왕. 부디 그대의 말대로 됐으면 좋겠구려.”
현재 한부와 함께 배를 탈 예정인 사람을 제외하면 태자가 머나먼 서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열 왕검뿐이었다.
그는 18세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업적을 이룬 장남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 속의 걱정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의 눈을 속이느라 큰 배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 배로는 파도가 드센 먼바다를 항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런데 그때, 왕검성의 성문에서 한 병사가 숨이 넘어가도록 헐떡이면서 뛰어나오더니 한열 왕검의 옆에 멈춘 후 보고했다.
“헉! 헉! 왕검 폐하! 방금 패수 강변의 영지를 다스리는 성 대부가 보낸 전령이 궁궐에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말하길 연나라군이······!”
“뭐라?! 연나라군이 어쨌다는 말이냐?!”
“연나라군이 서쪽 대륙 출신 백성 무리를 데리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성 대부는 연나라가 서쪽 대륙에서 발생한 변고를 막기 위해 반도에서 군대를 물리는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오!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태자의 예견이 맞았구나! 정말로 연나라가 반도 밖으로 물러나려는 모양이야!”
왕검이 소리치자 그의 주변에 있던 제후와 대신도 입을 모아 한부를 칭찬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2천 리 밖에서도 적국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군요! 참으로 대단한 분입니다!”
“폐하! 태자는 천신의 총애를 받는 게 분명하니 언젠가 왕실에 큰 영광을 안겨줄 겁니다!”
사실 연나라군이 스스로 한반도의 영토를 포기하고 물러난 이유는 남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조나라는 북쪽 흉노족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서쪽에서 몰려오는 진나라의 대군을 막아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있었다.
원역사의 조나라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전국시대 4대 명장 염파의 활약 덕에 진나라의 공격을 잘 막아내지만, 염파가 진나라 재상 범수의 모략 때문에 병권을 잃고 전장에서 물러나자 기원전 260년에 진나라군에게 대패하며 궤멸적인 손실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연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온 나라의 병력을 끌어모아 대대적으로 조나라를 침략에 나선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선진문물과 첨단기술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한열 왕검은 장남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혔다.
‘태자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한 다음에 서역으로 떠난 게로구나. 아들이 조선의 부흥을 위해 저토록 애쓰는 데 아비로서나 군주로서나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는 서둘러 궁궐로 돌아온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비왕 무를 은밀히 다시 알현실로 불러서 물었다.
“비왕. 앞으로 두 달 안에 왕실 직할령의 백성과 하늘 부족 출신 제후들이 거느린 병사만으로 원정군을 꾸린다면 그 수가 얼마나 되겠소?”
“아마 보병 5천 명에 기병 3백 기 정도는 동원할 수 있을 듯합니다. 폐하.”
“그렇게나 많이?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않소?.”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들이 왕실과 대적하다가 태자가 고안한 새 농법과 철제 농기구를 두세 해쯤 늦게 도입하는 바람에 한동안 호랑이 부족의 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식량 생산량이 적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아하! 잠시 잊고 있었구먼. 그 시기에 호랑이 부족 출신 백성들이 왕실 직할령으로 많이 도망쳐 왔었지.”
“그렇습니다. 폐하.”
“조만간 연나라가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면 북쪽 지역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권력의 공백 상태가 계속될 것이오. 그때를 놓치지 말고 북으로 진격해 태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반도의 북부를 모조리 정복합시다.”
“폐하. 다른 부족 출신 제후에게는 병사나 물자를 요구하시지 않으실 생각이신지요?”
“그렇소. 이번에 정복한 지역에서 얻은 전리품은 대부분 북벌에 참가한 제후에게 나눠주되 점령한 영토는 모두 왕실 직할령으로 삼을 생각이오. 다른 부족은 그런 조건에 동의할 리 없으니 우리끼리만 전장에 나섭시다.”
“참으로 대담한 계획입니다. 요 몇 년 사이 왕실의 권위가 강해지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이번 원정의 결과를 기정사실로 만들면 더더욱 다른 부족 출신 제후들이 왕실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 거요. 그러니 서둘러 북벌 준비를 시작하는 게 좋겠소. ”
“그럼 소신은 최대한 빨리 왕실 직할령의 병력과 물자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소. 그동안 짐은 왕실에 전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제후들에게 전령을 보내 북벌에 대비하도록 지시하겠소.”
* * *
한열 왕검이 북벌을 결심한 지 정확히 한 달하고 보름째 되던 날, 고조선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와 장수들은 연나라군이 떠난 평안남도 북부와 평안북도 지역으로 진군할 채를 마쳤다.
왕검은 현재 패수라고 불리는 청천강 근처에 집결한 수십 명의 장수와 5,300명의 병사 앞에 백마를 타고 나오더니 청동검을 뽑아 강 건너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조선의 아들들이여! 보라!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숙적 연나라군에게 빼앗긴 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 연나라는 서쪽 대륙의 사정에 정신이 팔려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 언제 다시 선조의 혼이 서린 영토를 노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그 전에 반도의 고토를 회복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자! 앞으로 조선은 어떤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 되어갈 것이다!”
장수와 병사들은 왕검이 열변을 마치자마자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반도의 고토를 되찾고 요동으로 나가자!”
그리고 잠시 후 이룡도의 수료생 46명을 포함한 고조선 왕실의 장수들은 병사들을 지휘해 뗏목에 태웠다.
한편 고조선 왕실의 병사들이 거침없이 청천강을 넘기 시작할 때, 한부는 서른 명의 일행과 함께 현대에 동중국해라 불리는 근해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있었다.
초나라 최남단의 대도시인 무석 근처의 항구마을에서 마지막 보급을 할 때까지는 항해가 순조로웠지만, 그 뒤로는 악천후 때문에 항구마을에 한동안 발이 묶여 시간을 보름이나 허비했고 출항 후에도 낯선 바다에 겁먹은 선원들이 천천히 배를 모는 바람에 여전히 대만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력으로 4월 중순의 한낮, 한부는 두 동문과 함께 갑판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장강 이남 지역은 해변에서 조금만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온통 밀림이구나. 온갖 열대지역의 맹수가 득실거릴 게 분명하니까 이 정도 인원으로는 저기서 보급품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겠네.’
계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한부에게 물었다.
“전하. 이제 남은 식량과 물은 고작 닷새 치가 전부입니다. 그만 초나라의 항구마을에 돌아가 보급을 마친 후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는지요?”
“초나라 항구마을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딱 하루만 더 남서쪽으로 항해해보고 그래도 대만을 찾지 못하면 조선으로 돌아가자.”
“소신은 전하의 깊은 심중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사상이 없어도 전하께서 왕실의 세력을 강화하시다 대제사장의 권위까지 취하시면 충분히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왕실을 섬기도록 하실 수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계야. 물론 내가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단군왕검이 되면 반도 북부와 요동에 사는 동포인 예맥족을 통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반도 남쪽의 부족이나 연나라의 백성들도 단군왕검을 자처하는 군주를 나라의 주인으로 인정하겠느냐?”
“한족과 연나라의 백성 말입니까? 설마······! 전하께서는 장차 반도 남부와 연나라까지 정복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난 우리 대에 조선을 단군왕검 이래 가장 넓은 영토 차지한 최강대국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 넓은 나라가 천년을 이어가려면 만민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지. 이 꿈을 이룰 때까지 내게 너희의 힘을 보태 다오.”
“소신이 한 치 앞만 보고 있을 때 전하께서는 지평선 너머를 보고 계셨군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현재 한반도 남부에 난립해 있는 수많은 소국과 부족은 요동과 만주, 한반도 북부 등에 사는 고조선의 주류인 예맥족과는 다른 한반도 남부의 토착민 한(韓)족이 살고 있었다.
원역사에서는 기원전 2세기 초반에 반역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 토착 왕계의 마지막 왕 준왕을 따르는 피난민이 한반도 남부로 도망치면서 예맥족과 한족이 융화되면서 서서히 하나의 민족이 되어갔다.
그러나 현재의 한반도 남부의 부족은 고조선과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단군왕검을 시조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니 통일 한반도를 원활하게 유지하려면 선민사상을 부정하고 인종과 부족 간의 평등을 중시하는 불교 같은 새로운 사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계에게는 잘난 듯이 말했지만, 그것도 일단 인도에 갈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불경이랑 온갖 최첨단 기술을 가져온 다음 이게 바로 부처님의 은총이라면서 뻥을 좀 쳐야 불교가 확 퍼질 거 아냐. 계속 항해에 애먹으면 이번 탐험은 중지하는 게 맞겠다. 내일까지 대만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냥 집에 가야지.’
한부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서역행의 손절선을 긋는 순간, 남쪽 바다를 보고 있던 석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우와! 섬이다! 전하! 드디어 남쪽에 섬이 보입니다!”
“어디! 정말이네?! 드디어 대만에 도착했다!”
태자와 석의 외침을 듣고 선원들이 사각형 돛을 활짝 펼치자 순풍을 등에 업은 배가 큰 섬의 해변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했다.
잠시 후 태자 일행이 탄 배가 섬의 해안 근처에 다다르자 선원들의 눈에 삼각형 돛을 단 배 몇 척에 탄 갈색 피부의 원주민이 그물과 낚싯대로 고기로 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부는 전생에 서적에서 읽었던 지식을 머릿속에 떠올린 덕에 이국적인 배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 저게 바로 그 유명한 고대의 아우트리거 카누구나! 확실히 저런 배라면 고대에도 태평양을 건너다닐 수 있었겠어! 항해술에 능력치를 몰빵한 폴리네시아인답네!’
폴리네시아 전통의 아우트리거 카누는 돛과 함께 선체 측면에 ‘아우트리거’라는 길고 넓적한 널빤지를 달아서 선체를 안정시키는 선박이다.
이 배는 자전거의 보조 바퀴 역할을 하는 아우트리거 덕분에 심한 풍랑을 만나도 쉽게 뒤집히지 않았고 삼각형 돛이 있어 역풍이 불어도 전진할 수 있었다.
또한 동시대의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갤리선이나 고대 중국의 누선보다 무게가 가벼워서 속도가 월등히 빠르고 긴 카누 두 대를 연결해 그 위에 상갑판과 선실을 설치한 원양항해용 선박으로 개조할 수도 있었다.
대만이 고향인 폴리네시아인들은 이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배를 타고 기원전 1,500년 경에 피지 섬에 도착했으며 고대의 항해기술만으로 하와이와 대만에서 직선거리로 8,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 한복판의 마르키즈 제도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인도까지의 바닷길은 대만에서 마르키즈 제도까지의 거리에 비하면 반도 안 되니까 문제없이 갈 수 있겠지. 그동안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술이 더 발전하기도 했을 거고. 가지고 온 은거울을 다 줘서라도 꼭 배하고 선원을 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