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24화] 교육과 발명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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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에 걸친 입단 시험이 끝나자 시험을 감독하던 병사들이 최종 합격자 49명을 기숙사로 쓰게 될 건물로 데려갔다.
한열 왕검은 5백 명이 넘던 지원자 중 10분의 1 정도의 소년만이 남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비왕 무에게 말했다.
“비왕. 이룡도의 숙소가 비좁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오. 조선의 아들들이 이다지도 나약해졌다는 말인가······.”
“지난 십여 년 동안은 외적이 국경을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검날에 녹이 눌어붙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폐하.”
“태자의 제안 덕에 이제라도 강한 장수를 육성할 계기를 마련했으니 다행이구먼. 그래서 부족별 합격자 수는 어떻게 되오?”
“왕실과 같은 하늘 부족의 출신 소년이 스물일곱 명으로 가장 많이 합격했고 곰 부족의 소년은 오늘 시험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석을 포함해 전부 스물한 명 합격했습니다.”
“가만······ 그러면 호랑이 부족 출신 중에서는 상의 아들만 합격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호랑이 부족 출신 지원자는 전원 아비의 사랑을 덜 받고 자란 서자나 양자이다 보니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부족할 겁니다. 그러니 호랑이 부족의 소년 중에는 스스로 원해서 이룡도 입단 시험에 참가한 자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데도 저 왜소한 아이는 죽을 힘을 다해 움직여서 합격했단 말이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그는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한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태자야. 네게 할 말이 있으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서재로 오너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
한부는 즉시 궁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내관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한열 왕검이 태자의 등 뒤에 있는 내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태자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내관은 잠시 물러가 있으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문을 닫고 서재 밖으로 나간 내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한부가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간 다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안에 그늘이 보이는 듯합니다. 혹시 마음속에 근심을 품고 계시는지요?”
“그래 보이느냐? 사실 오늘 입단 시험에 합격한 상의 양자 계가 영 마음에 걸리는구나.”
“소자도 계를 눈여겨봤습니다. 체격이나 체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힘든 시험을 마치고도 눈빛에 날카로운 총기가 서려 있는 게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상이 요즘처럼 왕실의 권위가 드높은 시기에 궁궐에 자객을 보낼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녀석을 네 곁에 두기가 영 꺼림칙하구나.”
“분명 상에게 뭔가 명을 받기는 했을 겁니다. 허나 이룡도 단원이 대신들과 접촉하거나 기밀문서를 읽을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왜소한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소자의 행실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는 얼핏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풍문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그 녀석이 네 평판을 떨어트릴 목적으로 궁궐에 스며든 거라면 당장 쫓아내는 게 옳다. 허나 겉으로나마 배움을 청하러 궁궐에 찾아와서 입단 시험에 합격한 명가의 자제를 명분 없이 문전박대하면 왕실의 체면이 크게 상하겠지······.”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나, 오히려 계를 소자의 곁에 가까이 두는 게 조선과 왕실의 부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활한 새끼 호랑이가 왕실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한 번 설명해보아라.”
“계는 본래 평민이었던 지원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룡도 입단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자가 앞으로 훌륭한 무관으로 성장한다면 평민 중에도 유능한 인재를 뽑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길 수 있습니다.”
“평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두잔 말이냐?”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은 아직 귀천을 따져가면서 인재를 뽑을 처지가 못 됩니다. 매년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으나 여전히 전국의 백성을 다 합쳐도 30만 명을 넘지 못합니다.”
“음······ 그렇긴 하지. 그러나 짐이 귀족이 양자로 삼지 않은 평민을 관리로 임명하면 호랑이 부족의 제후들이 크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효율적인 관리선발제도를 만들기 전까지는 유능한 평민을 은밀히 발굴해 우리 왕족과 같은 하늘 부족 출신의 제후나 대신에게 양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하는 편법을 쓰면 될 듯합니다.”
“그렇구나! 이번에 호랑이 부족의 제후 중에도 왕실에 친자식을 볼모로 보내기 싫어서 평민을 양자로 들여서 궁궐에 보낸 자가 적지 않다. 그러니 왕실이 같은 편법을 써서 평민을 관리로 임명해도 대놓고 불만을 늘어놓을 호랑이 부족 출신 제후는 없을 거다. 무관을 뽑기 위해 만든 교육 시설에 평민 출신 소년을 먼저 보낸 건 바로 자기들이니까.”
“소자의 생각도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자가 계의 마음을 살 수 있으면 오히려 계를 통해 상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쉽진 않겠지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구나. 상의 성격에 계를 진심으로 아껴서 양자로 삼았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궁궐 담장 안에 있는 아이를 항상 감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좋다. 그럼 계에 관한 일은 너에게 일임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녀석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즉시 짐에게 알려야 한다.”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 * *
이룡도에서의 수업은 입단 시험이 끝난 다음 날에 바로 시작되었다.
지금껏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던 10대 소년들은 새벽에 수탉이 울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전 중에는 역사와 제나라식 한자, 그리고 예의범절을 배웠고 오후에는 체력을 단련하면서 병법과 여러 가지 고조선의 무술을 익혔다.
그리고 한부는 고조선 최고의 어린 인재들과 한솥밥을 먹고 학업에 힘쓰면서 자연스럽게 이룡도의 학생들 사이에서 리더가 되어갔다.
이룡도가 문을 연 지 딱 한 달째 되던 날 저녁,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던 소년들은 여느 때처럼 태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넓은 기숙사 침실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한부는 주변의 소년 중 유독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석과 눈을 마주치면서 물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강한 적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임전무퇴의 정신입니다!”
“석아. 너는 병사나 하급장교가 되기 위해서 이룡도에 입단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장차 훌륭한 장수이자 대신이 되고 싶어서 매일 어려운 제나라의 글을 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과 전략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게 좋겠다. 진정한 명장은 자국의 군대보다 강한 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전장에 서지 않고 적을 이길 방법을 먼저 찾는 법이니 말이다.”
“전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장에서 싸우지 않으면 적을 이길 수 없지 않습니까?”
“네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마. 만약 우리 조선이 수년에 걸쳐 사투를 벌인 끝에 연나라의 영토를 모두 빼앗았다고 치자. 그럼 그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 하느냐?”
“우리나라의 영토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늘어날 겁니다!”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우리 조선은 한 해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패수 이남으로 쫓겨나게 될 거다.”
“이미 숙적 연나라가 없는 데도 말입니까?”
“서쪽 대륙에는 연나라 이외에도 여섯 개나 되는 대국이 웅크리고 있다. 조선이 국력이 쇠한 상태로 연나라의 영토를 차지해봐야 주변의 조나라나 위나라, 그리고 제나라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야. 그러니 우리 조선은 가만히 힘을 기르다가 되도록 전투를 피하면서 연나라를 멸해야 한다.”
“음······ 저에겐 아직 너무 어려운 말씀입니다. 전하.”
“그냥 지금은 전쟁을 벌이면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국력을 소모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만 기억해 둬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차근차근 공부하면 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계가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그렇다면 때로는 싸우지 않고 패하는 쪽을 택하는 게 오랜 세월 전쟁을 벌여 간신히 이길 때보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도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몇몇 소년이 도끼눈을 뜨더니 큰소리로 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뭐?! 계 이 자식아! 넌 어떻게 무관을 목표로 하다는 녀석이 적하고 싸우기도 전에 질 생각부터 하냐?!”
“누가 천한 평민 출신 아니랄까 봐! 이룡도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라고!”
하지만 한부는 주변의 소년들과 달리 계의 대답에 감탄한 나머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단한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딱 한 번 듣고 정확히 이해했어. 나처럼 전생에 손자병법을 열 번쯤 읽은 빙의자도 아닐 텐데 말이지. 역시 저 녀석은 꼭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
한부는 동료들의 비난에 고개를 숙인 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했다.
“내 말을 정확히 이해했구나. 상대가 강할 때는 살을 내주고 안심시킨 다음 상대가 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뼈를 취하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훌륭한 전략이다.”
태자가 자신을 칭찬하니 계는 고개를 들고 놀란 표정으로 한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소란을 피우던 소년들은 난동을 멈추는 대신 입을 삐죽 내밀고 계를 노려보았다.
한부는 그런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중에 몇 놈은 계가 평민 출신이라고 차별하는구나. 벌써 상이 계를 별로 아끼지 않는다는 게 알려진 모양이지? 이 녀석들을 여기서 윽박지르면 역효과만 날 테니까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한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에게 지시했다.
“석아. 저기 구석에 있는 죽간과 서도를 좀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전하.”
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지인 죽간과 서도를 가져오자 한부가 그것을 받으면서 말했다.
“석아. 심각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걸로 재밌는 놀이를 해보자.”
“전하. 어떤 놀이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이룡도의 일원만 읽고 쓸 수 있는 비밀 문자를 가르쳐주마.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문자를 말이지!”
“전하! 저는 제나라 글자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만든 비밀 문자는 제나라 글자보다 훨씬 배우기 쉬울 거다.”
한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죽간에 한국조어의 발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조금 변형한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새겼다.
그러자 석이 죽간 하나를 꽉 채운 글자를 바라보면서 한부에게 물었다.
“전하! 겨우 백 개도 안 되는 글자로 정말 문장을 적을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 이 비밀문자는 뜻이 아니라 소리를 적는 거라 제나라 글처럼 몇천 개나 외울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이 글을 읽고 쓰는 법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그 후 태자가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의 원리를 설명하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소년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자와 글자가 합쳐져서 새로운 글자가 되다니! 너무 신기하옵니다! 전하!”
“제나라 글자도 이렇게 쉽고 재밌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방 배워서 우리끼리 나무토막에 적은 쪽지를 주고받으면 너무 재밌겠어!”
한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죽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소년들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고조선 최고의 인재답게 다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구만. 우리 중 가장 머리가 둔한 석도 평균보다는 똑똑한 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이 녀석들이 한글하고 숫자를 모두 익히면 미래에 첩보전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어.’
원역사의 진나라는 중원 대륙을 통일할 때 첩보전과 외교전을 적극 활용해 큰 이득을 얻었다.
당시의 진시황은 중원 전체에 첩자를 심어 적국 군대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었으며 여러 나라의 재상을 재물로 매수해서 다른 여섯 나라가 서로 싸우며 국력을 소모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고조선의 기밀문서를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로 작성하면 만에 하나 진나라 첩자가 그것을 입수하더라도 당장 해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글을 첩보전에만 활용하다가 진나라가 정리되고 나면 전국에 널리 퍼트리는 게 좋겠다. 그때쯤이면 이 녀석들이 먼저 편한 글로 갈아타자고 난리 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슬슬 이 시대에도 만들 수 있는 쓸만한 물건을 개발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