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22화] 내친 김에 인재육성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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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은 자신과 상 완의 뜻대로 일이 풀리자 흡족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한열 왕검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폐하. 본인의 조언을 귀담아들어 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럼 본인은 이만 천신의 거처로 돌아가겠습니다.”
“태자에게 닥친 위험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제사장님.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한열 왕검은 대제사장에게 인사한 후 알현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비왕 무에게 지시했다.
“비왕, 이제 그대도 퇴궐하시오. 한동안 외출을 삼가면서 근신하길 바라오.”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모훈 연은 두 손으로 한부의 어깨를 잡더니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들을 훈계했다.
“태자! 호랑이에게 물려갈 뻔했다니요?! 어찌 그토록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바로 왕검성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그 일을 부모에게 숨기기까지 하다니요!”
“소자의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머니.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태자! 죄송하다는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님의 말씀대로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무예를 익히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궁궐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모후가 훈계를 마치자 이번에는 한열 왕검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인. 이제 짐이 태자를 타이르겠소.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침실로 돌아가 계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태자가 다시는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도록 따끔하게 혼찌검을 내주세요.”
“그리하리다.”
모후 연이 남편의 대답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알현실에는 왕검과 태자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한부는 마음속으로 종아리에 불이 나도록 회초리를 맞을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만, 한열 왕검은 의외로 아들에게 역정을 내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야. 호랑이가 너에게 덤볐을 때 두렵지 않았느냐?”
“너무 두려워서 눈도 뜨지 못했었습니다. 아버지.”
“그런데도 여행을 중단하지 않고 전국을 돌며 백성들의 삶을 눈에 담았구나. 정말 장하다.”
“어······ 분명 크게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칭찬을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물론 너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허나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로서는 모범적인 행동을 한 셈이지. 어린 나이에 이토록 담대하고 속이 깊다니······. 너라면 분명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단군왕검이 될 수 있을 거다!”
“그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혹시 소자가 장차 왕관을 쓴 채로 대제사장의 예복을 입기를 바라시는지요?”
“그렇단다. 우리 조선을 건국하신 단군왕검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동시에 천신의 대변자셨다. 조선의 모든 백성이 단군왕검의 신령스러움에 탄복했고 그 어떤 제후도 그분의 뜻을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허나 이미 지금의 조선에는 천신의 대변자이신 대제사장님이 계시질 않습니까?”
“지금의 대제사장은 종교인보다 정치인에 더 가까운 자다. 네가 장성해 천신의 신임과 백성의 마음을 함께 얻는다면 연나라에게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고 조선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태자야! 내 아들 부야! 꼭 단군왕검이 되어 이 아비의 한을 풀어다오!”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한부는 한열 왕검이 여전히 자기를 신뢰하고 있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군주가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길 원하는 그의 꿈에 공감할 수 없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현대로 치면 북한하고 비슷한 나라를 만들고 싶으신 거구나. 물론 목표를 요동의 고토회복 정도로만 잡으면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지. 하지만 전국칠웅의 나라들은 제정일치 국가를 야만인의 나라라고 생각할 거야.’
현재 중원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일곱 나라는 유가나 법가 등의 현실적인 정치사상을 도입하고 관료제가 발달해 종교세력이 정치에 관여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점차 관료제를 토대로 한 제정 분리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던 고조선이 갑자기 부족국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개인숭배가 만연한 나라가 되면 전국칠웅 중 고조선을 문명국으로 여길 나라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고조선의 국력을 길러서 대륙으로 진출한다고 해도 문화적으로 피정복민들을 감화시키지 못하면 원역사에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꼴이 나고 만다. 전쟁에서 이겨도 고조선이 전통문화를 잊고 또 하나의 중국이 돼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어. 역시 언젠가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나······.’
한부는 고조선의 태자가 된 후 거의 3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고조선 전역에서 샤머니즘의 잔재를 뿌리 뽑고 기술과 과학, 그리고 문화를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하지만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수단이란 혼자의 힘만으로는 실행조차 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는 대제사장의 견제를 오히려 발전의 계기로 삼아 자신의 실력을 기르는 한편 신라의 화랑도와 비슷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소자가 아버지와 백성들의 바람대로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신하가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옥좌에 앉으면 여러 명가의 자제들이 새 왕검의 측근이 되고 싶어서 물밀 듯이 왕검성으로 몰려올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정말로 유능하고 충직한 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그러니 총명하고 건강한 소년들을 궁궐로 불러서 소자와 함께 학문과 무예를 익히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궁궐 안에 교육 기관을 짓자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아버지. 비슷한 또래의 소년들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한솥밥을 먹으면 혼자 공부할 때보다 학문과 무예가 더 빨리 늘고 서로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져서 장차 한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힘쓰게 될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제후와 대신들에게 전령을 보내 당장 아들 중에서 총명한 녀석들을 궁으로 보내라고 해야겠구나!”
“그 전에 저희의 스승이 될 분들을 왕검성으로 모시고 궁궐을 확장해 교육 시설을 준비하시는 게 어떨지요? 또한, 강제로 자식을 궁궐로 보내라는 왕명을 내리면 여러 제후가 왕실에 볼모를 보내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아들을 궁궐에 보낼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제후 중에서 누가 진심으로 왕실에 충성하는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겠어.”
“소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당장 교육 시설과 아이들이 묵을 숙소부터 지어야겠구나. 그때까지는 외로워도 궁궐에서 혼자 공부하고 몸을 단련하거라. 아마 내년 봄쯤이면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게다.”
“아버지! 소자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한열 왕검은 한부와의 대화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오자마자 관리들을 불러 궁궐 확장 공사를 명령했다.
궁궐의 담 일부를 허물고 새로 확보한 부지에 건물이 올라가는 동안 한부는 정을 비롯한 여러 박사와 함께 왕립 교육 시설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논의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교육 시설의 이름과 방침을 정하는 것.
한부는 서도(書刀: 죽간에 글을 새길 때 쓰는 칼)로 죽간에 제나라식 한자로 이룡도(螭龍徒) 세 글자를 적어서 박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박사 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태자에게 물었다.
“전하. 이룡도는 우리말로 이무기와 같은 무리라는 뜻이 아닙니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지 몹시 궁금합니다.”
“모두 잘 알겠지만, 이무기는 차가운 물속에서 1천 년 동안 견디면 용이 된다는 전설의 동물이오. 이 이룡도라는 말은 우리 조선도 꾸준히 힘을 길러 언젠가는 용처럼 날아올라 범처럼 잔악한 연나라에게 빼앗긴 고토를 되찾자는 의미를 담고 있소.”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전하와 함께 강한 무사로 자라난 여러 조선의 아들들이 패수를 넘어 말을 달리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합니다.”
“무예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검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육성하기를 원하시니 학문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오. 그러니 경들이 순서를 정해 돌아가면서 우리 조선의 역사와 함께 제나라의 글을 본인과 귀족 가문의 아들들에게 가르쳐주길 바라오.”
“왕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온 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겠나이다.”
“그리고 무예 단련장에 추가하고 싶은 물건이 있소. 이 죽간에 목록을 적어놨으니 박사가 비품을 준비해 담당해주시오.”
한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죽간 몇 개를 건네주자 박사 정이 그것을 받아 펼쳐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이것들이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림까지 그려주셨음에도 그 용도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 체력 단련을 위해 필요한 물건이오. 보기보다 효과가 대단할 터이니 기대해 보시오.”
* * *
어느덧 해가 지나 기원전 268년의 봄이 시작되자 고조선 최초의 왕립 교육 기관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한부는 이룡도 창립일 아침에 한열 왕검과 함께 왕검성의 궁궐 한쪽에 마련된 학생 2백 명이 묵을 수 있는 기숙사 건물과 무예 수련장, 그리고 학당을 보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보십시오! 드디어 조선에서 가장 총명한 명가의 자제들이 지낼 시설이 완성됐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건물을 둘러보는 한열 왕검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흠······ 참으로 훌륭한 시설이구나. 그런데 이룡도에 가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 수에 비하면 시설이 좀 작아 보이지 않느냐? 오늘까지 거의 5백 명이나 되는 제후와 대신의 자제들이 왕검성으로 몰려왔다고 하던데 말이다.”
“지망자를 전부 받아주면 이룡도의 일원으로써 느끼는 자부심이나 소속감이 옅어질 겁니다. 여러 박사와 논의한 끝에 지원자 중에서 근성이 강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근성이 강한 자라······. 어떤 선발시험을 준비해뒀는지 궁금하구나.”
“바로 저기 보이는 무예 수련장에서 소자를 포함한 지망자의 근성을 시험할 예정입니다.”
“뭐라고? 태자도 시험에 참가한단 말이냐?!”
“저만 가혹한 입단 시험을 보지 않고 이룡도에 가입한다면 이곳에 모인 명가의 자제 중 진심으로 소자를 따르는 자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그나저나 무예 훈련장은 다양한 장소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은데, 저 중에 어디서 입단 시험을 치를 생각이냐?”
“바로 저기입니다.”
한부는 왕검에게 대답하면서 단순하지만 현대적인 운동설비가 갖추어진 공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준비된 물건은 모두 현대의 크로스핏 체육관에서 사용하는 체육용품과 시설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쇠말뚝에 튼튼한 밧줄을 묶어서 만든 배틀로프, 인조가죽에 솜이나 스펀지를 넣는 대신 쇠가죽에 쌀겨를 잔뜩 넣어서 만든 월볼, 비바람을 맞아도 잘 녹슬지 않는 청동제 철봉, 그리고 역시 청동으로 만든 케틀벨 등등.
한부는 우수한 무관을 육성하려면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트레이닝 보다는 최대근력, 협응력, 민첩성, 유연성, 심폐지구력, 균형감각, 정확성, 파워, 속도, 스테미너를 동시에 육성할 수 있는 크로스핏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에 중국어선 잡으러 출동할 때 UDT 출신 해경특공대 동료들 발목 잡지 않으려고 크로스핏 짐을 꽤 열심히 다녔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에 신체능력을 종합적으로 기르려면 크로스핏이 제일 효과적이야. 문제는 초심자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거지. 오늘 지원자 중 몇 명이나 끝까지 남으려나? 너무 궁금하다 진짜.’
한부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알 리 없는 10대 소년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