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9화] 돌발상황을 기회로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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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약사 천은 태자의 요청을 받은 후 약재를 보관해둔 서랍을 뒤져보면서 중얼거렸다.
“삼키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을 만큼 독한 독약이라.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건은 짐독(鴆毒)이구먼. 조선에선 아마 구경하기도 힘들겠지.”
한부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천에게 물었다.
“뭐?! 짐독?! 그 전설의 맹독이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소인도 몇 년 전에 제나라인 약재상에게 초나라에 그런 물건이 있다고 들었을 뿐이라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죄송하지만 짐독은 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태자 전하.”
“죄송하긴. 아마 그 물건은 소문으로만 떠돌 뿐 실존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닭 한 마리 잡는 데 쓸 다른 독약이 없지는 않을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특히 요즘은 낭림산맥 너머에 큰 은광과 납광산이 개발되면서 비석(砒石)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천은 그렇게 말하며 약재 서랍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달걀만 한 돌을 꺼내더니 태자에게 보여주었다.
지질학이나 한의학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그였지만, 비석이라는 이름은 자료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비석이면 비상(砒霜)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돌인 걸로 알고 있네. 그게 은광에서 생산되는 물건인지는 몰랐지만 말일세.”
“보통 은광이나 납광산에서 은과 납을 캘 때 함께 나오는 약재입니다.”
“그런데 비상이 위험한 독약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네만, 정말 약재로도 쓰이고 있나?”
“같은 칼이라도 강도가 들면 흉기고 민가의 아낙네가 들면 조리도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상은 자객의 손에 들어가면 치명적인 독이 되지만, 약사가 쓰면 학질을 다스리는 약이 되지요.”
“아······ 이거 또 골치가 아파오는구만.”
한부는 궁중 약사 천의 대답을 듣고 나니 납으로 만든 냄비를 봤을 때만큼이나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비상은 일단 한약재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강한 독성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약재보다는 죄인에게 먹일 사약의 재료나 농약 대용품으로 더 자주 사용됐다.
그러나 고조선의 거의 모든 백성이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납으로 만든 조리도구에 비하면 극히 일부의 환자가 복용하는 비상의 위험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고대 시대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집어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다. 일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가장 큰 문제부터 빠르게 쳐나가는 수밖에 없어.’
그는 그렇게 마음먹고 다시 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상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나?”
“한 시진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한시가 급하니 어서 작업을 시작해주게.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숯불에 비석을 태울 때 고약한 냄새가 나니 잠시만 소인의 작업장 바깥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한 시진 후에 돌아오겠네.”
* * *
궁중 약사 천은 잠시 후 반 되나 되는 비상을 만들어 태자에게 바쳤다.
이제 재료가 전부 갖춰졌으니, 계책을 다듬을 차례.
한부는 비상이 든 주머니를 가지고 자기 침실로 돌아간 다음 백성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납의 위험성을 전국에 알릴 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미리 준비한 음식에 비상을 뿌린 다음 납 냄비로 요리한 거라고 하면 사람들이 순순히 믿을까? 아니겠지. 고대인은 지식이 부족할 뿐이지 지혜가 부족하지는 않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납 냄비로 요리한 음식을 닭이 먹고 죽는 모습을 연출해야 해. 그래.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다.’
그는 머릿속에 계획을 정리한 다음 내관 참을 불러서 물었다.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납붙이가 궁궐에 도착했나?”
“조금 전부터 속속 궁궐의 창고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전하.”
“직접 그 물건들을 보고 싶으니 어서 창고로 안내하게. 아, 그 전에 두꺼운 천 장갑 하나를 준비해야겠군.”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내관 참이 장갑을 가져오자 한부는 비상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곧바로 궁궐의 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창고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안에 잔뜩 쌓여있는 납으로 만든 여러 가지 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부는 그중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뚜껑이 있는 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관에게 지시했다.
“이걸 가지고 시내로 나갈 생각이니 어서 솥을 옮길 인부와 호위대를 준비해주게.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내관 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밖으로 나가자 한부는 곧바로 천 장갑을 손에 끼더니 솥뚜껑을 열고 솥 안에 비상을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비상 가루를 장갑을 낀 손으로 문질러서 얇게 펴니 얼핏 보기에는 흰 가루가 잘 보이지 않도록 했다.
“솥 안이 깊고 비상도 납도 흰색이라 그런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안 띄는구나. 이 정도면 다들 속아 넘어가겠어.”
그가 막 다시 솥뚜껑을 닫았을 때 내관 참이 인부와 호위병 몇 명을 데리고 다시 창고로 돌아왔다.
“전하. 분부하신 대로 외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럼 어서 나가세. 백성들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네.”
한부는 인부들에게 솥을 들게 한 후 도보로 왕검성 안에 하나밖에 없는 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장의 행인들은 갑자기 태자가 대로 한복판에 나타나자 길옆으로 물러나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어린 태자는 고개를 돌려 백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너희도 알다시피 왕실은 납으로 식기와 조리도구를 만드는 걸 금지했다! 왕검께서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백성이 많을 것이라고 여기시고 본인에게 백성들 앞에 서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지금부터 납이 얼마나 강한 독성을 지닌 물건인지 너희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거라!”
한부는 연설을 마치고 다시 내관 참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이 솥으로 백미죽을 끓여서 닭에게 먹일 걸세. 대금은 나중에 왕실에서 내어줄 거라고 말하고 필요한 물건을 주변 상인들에게 사오도록 하게.”
“귀한 백미를 닭에게······ 알겠습니다. 전하.”
내관 참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태자의 명에 따라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쌀죽을 끓이는 데 필요한 준비물이 하나둘 갖춰지자 그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이기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이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이면 소문도 금방 퍼지겠지. 시장에서 구한 식재료로 만든 쌀죽을 먹고 닭이 죽으면 다들 납으로 만든 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고. 비상 가루도 흰색이고 쌀도 흰색이니까 죽에 독이 들어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잠시 후 인부들이 준비해온 숯과 물, 쌀로 납 냄비 죽을 끓이자 한부는 직접 나무 접시에 죽을 떠서 수탉 앞에 내려놓았다.
닭은 고소한 냄새가 나는 쌀죽을 보자 곧 허겁지겁 쪼아먹다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면서 구슬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꼬끼오오오오옥!!!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마음속으로 닭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 도저히 못 보겠구나······. 인간이 미안해.’
마침내 닭이 부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숨이 끊어지자,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행인들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면서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납으로 만든 솥이 저렇게 위험한 물건이었어? 혹시 쌀에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닐까?”
“이 인간이 누구 장사 말아먹으려고 그딴 소리를 해? 내가 파는 쌀이 독약이라는 거야? 뭐야?! 자 봐라! 내가 죽나 안 죽나!”
쌀을 팔던 상인은 가판대에 놓여있는 백미를 거칠게 한 움큼 움켜쥐고 생쌀을 입에 털어 넣은 다음 씹어 삼켰다.
쌀을 먹은 상인이 아무렇지도 않자, 이미 납으로 만든 조리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부가 그런 행인들에게 다시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채소를 팔던 한 여인이 갑자기 한부의 앞으로 뛰쳐나와 엎드리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태자 전하! 소인은 오늘 아침에도 제 남편과 자식들에게 납 솥으로 지은 밥을 먹이고 시장에 나왔습니다! 제발 제 식구들이 죽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전하!”
그러자 호위병들이 도끼눈을 뜨고 여인의 양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소리쳤다.
“무엄하다! 어찌 천한 것이 감히 먼저 태자 전하께 말을 거느냐!”
한부는 그런 호위병들을 말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짐승도 자기 자식을 아끼는데 사람의 마음이 오죽하겠느냐?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할 터이니 그 여인을 놓아주거라.”
호위병이 여인을 놓아주자 그는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행인들에게 외쳤다.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납은 분명 위험한 물건이지만, 사람을 일순간에 죽일 정도로 강한 독성은 없다! 이 닭은 워낙 큰 솥에 끓여서 납이 많이 우러나온 죽을 먹은 데다, 사람보다 덩치가 작아서 순식간에 죽은 것이다! 앞으로 납으로 만든 물건을 쓰지 않고 꾸준히 몸에서 납의 독기를 뽑아내면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거다!”
그 말을 들은 행인들이 감히 태자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웅성거렸다.
“몸에서 납의 독기를 뽑아내라고? 자네 혹시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납에 독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한부는 호위병들에게 지시를 내려 주변의 행인들을 조용하게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납의 독기를 몸에서 지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주 몸을 씻고 자주 청소해라!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 그게 어려우면 최소한 이틀에 한 번은 깨끗한 물로 몸을 씻어야 한다! 흐르는 물에서 목욕하면 더욱 효과가 좋을 거다! 그리고 방안에 쌓인 먼지와 벽에 묻은 얼룩은 몸 안의 독기를 강하게 만드니 자주 환기를 하고 걸레질을 해서 지워야 한다! 모두 이 사실을 가족과 이웃에게 알려 건강을 지키도록 해라!”
행인들은 태자의 말을 듣고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 * *
태자가 직접 기획한 충격적인 연출 덕에 납에 독성이 있다는 소식은 왕검성을 넘어 고조선 전역에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왕검성의 백성들은 납으로 만든 식기와 조리도구를 궁궐로 가져와서 헐값에 팔거나 땅에 파묻어버렸고 예전보다 훨씬 자주 냇가에서 멱을 감고 집 안을 청소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계절이 초가을에 들어서자 처음에는 그저 납의 독기가 무서워서 몸을 씻고 청소하던 백성들도 위생의 유용함을 경험을 통해 깨닫기 시작했다.
“여보. 참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 말이오?”
“방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던 먼지를 치우고 애들을 자주 씻겼더니 우리 애들이 기침을 덜 해요. 제사장님께 보리를 한 말이나 바치고 부적을 만들어와도 별로 효험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음······ 요즘 몸과 집안이 더러우면 잡귀가 쉽게 꼬인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돌던데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옆집 할머니도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요. 그 할머니가 산파 노릇을 자주 하는데, 흐르는 물하고 쌀겨로 몸을 씻은 다음 애를 받기 시작하니까 태어난 지 며칠 안에 죽는 애들이 많이 줄어들었데요. 글쎄.”
“거참 신기하구먼. 내일 시장에 나가면 쌀겨를 좀 사오겠소.”
한열 왕검은 왕검성의 관리들에게 질병을 앓는 백성의 수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태자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 크게 칭찬했다.
“태자야! 이번에도 네 말이 맞았구나! 정말로 위생상태와 건강에는 깊은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짐처럼 의심이 많은 사람도 이제 네 말이라면 콩 심은 데 팥이 난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부끄럽습니다 아버지. 그저 우연한 기회에 쌓은 지식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너무 겸손을 부릴 것 없다. 네가 왕족이 아니라 귀족이었으면 아마 조선 역사상 최연소 박사가 됐을 게야. 앞으로도 네 지식과 지혜를 조선의 부흥을 위해 마음껏 발휘하거라.”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나저나 네 충고 덕에 납으로 만든 물건을 거둬들인 것 까지는 좋은데 저 많은 납덩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구나. 독성이 강한 물건이라는 말을 들으니 외국에 팔기도 꺼림칙하고.”
한부는 한열 왕검의 푸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아버지. 소자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납덩이를 조금만 가공하면 훌륭한 무기로 쓸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