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화] 돌발상황을 기회로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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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는 왕검의 집무실을 나온 후 궁궐 서재에 틀어박혀서 죽간을 읽으며 위생 관념을 개선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뭐 좋은 방법 없나? 역사적으로 정부가 국민의 생활습관을 바꾸려고 했던 적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는 전생에 쌓은 지식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고조선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예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까 현대의 중국 정부도 베이징 올림픽 앞두고 나랑 비슷한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잖아? <매일 머리 감기 캠페인>이었던가? 그거 법으로 강제하지는 않았더니 실패했다고 들었었는데. 그렇다고 무라트 4세처럼 공포정치를 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부는 17세기 오스만제국의 술탄 무라트 4세의 일화를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저 담배 냄새를 맡기 싫다는 이유로 흡연자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만 명을 참수해 ‘흡연자의 사신’이라는 별명을 역사에 남긴 희대의 폭군.
그는 무라트 4세처럼 목욕과 청소를 싫어하는 백성을 가혹하게 처벌하다가 후세에 ‘결벽대왕’ 따위의 시호를 남길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왕명을 내려도 기원전 3세기 부족연맹국가의 미약한 행정력으로 온 국민이 매일 씻고 자는지 확인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사람들이 스스로 잘 씻고 청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수밖에 없겠네. 일단 왕검성 근처의 백성들 생활상부터 관찰해보자.”
한부는 내관 참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조만간 왕검성 시내와 외곽지역을 순시할 생각이네. 박식한 사람하고 함께 다니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정 박사는 요즘 무슨 업무를 맡고 있나?”
“정 박사는 왕실 직할령의 외진 마을에 4윤작제를 전파하라는 왕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전국을 떠돌다 올해 초에 왕검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특별히 맡은 일이 없는 것으로 없습니다.”
“음? 박사가 원래 그런 일도 하는 관직이었나?”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은 여러 가지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으음······.”
한부는 내관의 말을 듣고 고조선 사회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또 하나 발견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현재의 고조선은 중국식 관직명을 따와서 왕실이나 제후가 부리는 관리들에게 붙여주었지만, 그에 어울리는 직업 전문화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었다.
‘하긴, 내 아들이 될 준왕이 연나라 난민인 위만에게 북쪽 국경 수비를 맡길 때 붙여준 관직명도 박사였었지. 아주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따로 없구나. 더 급한 문제를 다 해결하면 관료제도도 꼼꼼하게 손봐야겠어.’
그는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다시 내관 참에게 말했다.
“정 박사에게 최대한 빨리 입궁하라고 전하고 순시 준비를 해주게. 호위병은 네 명이면 충분하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 * *
오랜만에 집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던 박사 정은 왕실의 전령으로부터 태자의 명을 받은 후 옷을 갈아입으면서 중얼거렸다.
“태자께서는 재작년 전국 순시로는 모자라서 또 나를 여행길에 데려가실 생각이란 말인가······. 작년에 왕검 폐하와 함께 원정에 다녀오셔서 한동안 휴양하실 줄 알았건만. 십대의 체력이란 건 마치 마르지 않는 샘과 같구나.”
그는 비단으로 지은 관복을 몸에 걸친 다음 왜소한 말을 타고 궁궐로 향했다.
박사 정이 궁궐 근처에 도착하자 외출 준비를 마치고 막 대문을 나서던 한부가 그에게 인사했다.
“정 박사! 참으로 오랜만이구려!”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순시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대의 해박한 지식으로 본인에게 가르침을 주길 바라오. 그런데 그대의 말은 왜 그리 깡마른 거요?”
“작년에 소신과 함께 전국을 떠도는 바람에 이런 몰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경의 애마를 왕실 마구간에서 잠시 쉬게 하고 함께 걸어 다닙시다. 적당한 산보는 경의 건강에도 좋을 거요.”
“저······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신의 나이가 올해로 마흔아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국토가 늘었는데 걸어서 전국을 순시했다가는 머지않아 조상님을 뵙게 될 겁니다!”
“전국 순시? 전령이 본인의 뜻을 잘못 전했나 보구려. 그저 오늘 하루 왕검성 시내와 외곽을 돌아다닐 생각이오. 먼저 시내 곳곳을 봐두고 싶으니 길을 좀 안내해 주시오.”
“태자 전하의 명을 기쁜 마음으로 받들겠나이다!”
박사 정은 몇 개월 이상 걸릴 줄 알았던 출장이 한나절로 줄어들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태자를 시내로 안내했다.
한부는 박사 정, 그리고 호위병과 함께 궁궐을 떠나 시장 주변을 지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력 4월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조선의 백성들이 보릿고개를 견뎌내고 있을 힘겨운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 곳곳의 가게 가판대에는 가짓수는 적지만, 제법 신선한 채소와 곡물, 그리고 여러 가지 공산품이 넘쳐났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박사 정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보십시오. 왕검께서 은천에 광산을 개발하시고 전하께서 여러 새로운 농법을 고안해내신 덕에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풍요로워졌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구려. 그런데 박사,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 새로운 농법이 벌써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소?”
“아주 외진 곳을 제외하고는 4윤작법과 시비법은 대체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우경법은 소를 가진 농가가 적어서 아직 널리 시행되고 있지는 못합니다.”
“어떻게 벌써 전국에 새 농법을 전파할 수 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소. 박사 같은 고관도 직접 농법을 전파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관리의 수가 부족하지 않소?”
“우리 조선은 아직 북쪽과 바다 건너의 여러 나라보다 영토가 좁고 인구도 적습니다. 또한, 아직 개간되지 않은 습지와 숲이 많고 맹수가 자주 출몰해 살기 좋은 지역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 그렇게 된 거구려! 안 그래도 적은 인구가 몇몇 도시나 마을에 몰려 살다 보니 지식 전파 속도가 빨랐던 거였어!”
“그렇습니다. 전하. 비록 호랑이 밥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외진 지역에 작은 마을을 이룬 자들은 아직 새 농법을 알지 못합니다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부는 그저 고조선 발전의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열악한 환경이 기술 전파에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꼈다.
‘행정력이 형편없는 시대에 수상할 정도로 지식 전파 속도가 빠른 이유가 그거였구나. 그냥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그럼 지금이 고조선 최전성기였으면 오히려 지식 전파 속도가 훨씬 느렸겠네. 참 신기하구만.’
그러나 고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상 밖의 일 중에는 한부를 기겁하게 할만한 것도 있었다.
박사 정은 활기찬 시장의 모습을 보고 신이 났는지 한 가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보십시오 전하! 은천 광산에서 나는 풍부한 쇠붙이 덕에 백성들의 삶이 몰라보게 윤택해졌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리 부유하지 않은 평민 중에도 저렇게 훌륭한 조리도구와 식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지요.”
“하얀 금속으로 만든 냄비라. 잠깐만······ 평민들이 은 식기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저거 설마?!”
“이미 짐작하신 모양이군요. 모두 납으로 만든 물건입니다.”
한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시발! 광산 개발이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나비효과를 불러왔구나! 안 그래도 지옥불 난이도 시대인데 좋은 일만 생기면 어디 덧나냐?! 이거 가만히 내버려 두면 로마 제국 꼴 나겠네?!’
납은 매장량이 풍부한 편이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 데다 경도가 낮아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애용해온 금속 중 하나지만, 동시에 정신이상과 시력 저하, 그리고 불임증 등을 유발하는 위험한 중금속이다.
고대 로마인 중에는 납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원인은 대부분 납으로 만든 조리도구와 식기, 그리고 조미료였다.
한부는 박사 정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사! 왕검성에 납으로 만든 식기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소?!”
“저······ 전하. 소신이 은연중에 전하께 무례를 범했는지요?”
“그런 게 아니오! 급박한 일이니 어서 대답해주시오!”
“정확한 날짜를 알지는 못하오나 아직 한 달도 안 됐을 겁니다. 전하.”
“하······ 그 정도면 아직 괜찮으려나? 박사. 오늘은 이만 귀가해도 좋소. 본인이 불러놓고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오. 나중에 사정을 설명해주리다.”
박사 정과 호위병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한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고조선을 치명적인 나비효과에서 구하려면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부는 태자로서의 체통을 잊고 전력으로 달려서 궁궐로 돌아간 다음 가장 먼저 마주친 궁녀에게 소리쳤다.
“왕검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왕검께서는 현재 정원을 거닐고 계십니다. 전하.”
“당장 그리로 안내해라! 왕검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
궁녀는 급히 한부를 정원으로 안내했고, 한열 왕검은 땀에 흠뻑 젖은 태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말했다.
“태자! 대체 무슨 짓이냐?! 아무리 궁궐 안이라도 한 나라의 태자가 그렇게 누추한 몰골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시내에서 백성들이 납으로 만든 조리도구와 식기를 사고파는 모습을 보고 급히 궁으로 돌아오다 그런 이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납으로 만든 식기가 뭐 어때서 그러느냐?”
“납은 사람을 느리게 죽이는 독성을 지닌 위험한 물건입니다. 폐하. 부디 왕실의 보물창고에 쌓여있는 은을 풀어 왕검성의 시장에 팔고 있는 납으로 만든 조리도구와 식기를 전부 사들이고 납으로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물건을 만드는 걸 금하는 내용의 율법을 배포해 주십시오.”
“저번에는 목욕을 자주 안 하면 건강을 해친다더니, 이번에는 납으로 만든 물건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냐? 아무리 네 말이라도 쉽게 믿기 어렵다.”
“폐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소자는 꿈에서 만난 귀인께 납에서 은을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면서 납의 독성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저번에 연은분리법을 폐하께 보여 드리면서 납 증기를 마시지 않도록 주의를 드렸던 겁니다. 납으로 만든 식기는 납 증기만큼이나 위험하니 이대로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많은 백성이 큰 병을 앓게 될 겁니다.”
“음······. 대신 저번에 연은분리법 시범을 보였을 때처럼 백성들에게 납의 위험성을 직접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짐 한 사람만 설득해서 넘어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번에도 소자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얼른 가서 목욕부터 해라. 왕검성 안에서 파는 납 식기와 조리도구는 최대한 빨리 사들여서 궁궐의 창고에 쌓아두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한부는 왕검에게 인사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따듯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니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다. 고대인들한테 납의 위험성을 어떻게 증명하지? 납이 사극에 나오는 사약처럼 먹자마자 바로 쓰러져 죽는 독극물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또 선의의 사기를 쳐야겠구만. 그러는 김에 위생관념 개선도 노려보자.’
한부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은 후 궁중 약사의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중 약사 천은 태자가 사전에 연락도 없이 자기 작업실에 들어오자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 소인의 누추한 작업실에 어인 일이신지요?”
“천. 오랜만일세. 우리 두 사람 다 궁궐 안에 머무르면서도 신선차를 만들어낸 이후로는 처음 보는군.”
“소인도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가 생생합니다. 왕실을 위해 미천한 재주를 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자네의 그 재주를 한 번 더 조선을 위해 써주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아주 독한 독약을 준비해주게.”
“전하······. 설마 소인에게 독살을 지시하시려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죽이려는 건 사람이 아니라 닭 한 마리니까. 다만 닭이 모이를 먹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을 정도로 독한 약이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