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6화] 은 말고도 다른 자원이?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태자가 궁궐 정원의 공터에 들어서자 고조선인 중년 남자와 제나라인 청년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미천한 대장장이 강이 태자 전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공인(工人) 자······장연이 태자 즈언하를 뵈······뵙습니다.”
한부는 제나라인 기술자가 서투르게나마 한국조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내관 참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내관은 태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뜻을 짐작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 장연이라는 자는 실력 있는 화로 장인으로 조선 땅을 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농가의 처자와 눈이 맞아 몇 달 전에 혼인했습니다. 아내와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우리 말을 빨리 배운 모양입니다.”
“말도 잘 안 통했을 텐데 눈이 맞아서 혼인식까지 올렸단 말인가?”
“남녀 간의 감정은 말 이외의 방법으로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전하.”
“그 얘기는 거기까지 하게. 열한 살 먹은 소년에게 할만한 얘기는 아니잖나. 그건 그렇고 제나라에서 온 공인들은 내년에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 아니었나?”
“제나라인 공인들은 대부분 내년 가을까지 기술 전수를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지만, 그중 우리 조선의 처자와 혼인한 세 명은 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 이 자는 이웃들 사이에서 애처가로 유명하며 평소에 꼭 조선 땅에 남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를 버리고 조선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군.”
한부는 원역사의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연은분리법이 한반도 밖으로 유출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세계역사를 적지 않게 바꿀지도 모르는 첨단기술이 전국칠웅,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의 적국 연나라와 미래의 숙적 진나라에 유출되면 고조선 부흥의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열 왕검의 지시대로 단기간에 연은분리법 개발에 성공하려면 마침 고조선에 들어와 있는 제나라인 기술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튼튼한 무쇠 화로와 냄비가 꼭 필요하단 말이지. 우리나라 대장장이들은 철 다루는 법을 익히는 중이니까 제나라인 기술자를 안 쓸 수가 없단 말이야. 일단 무슨 생각으로 이 나라에 정착했는지부터 알아볼까?’
한부는 화로 장인 장연의 인상을 살피다가 고대 중국어로 물었다.
“이름이 장연이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전하.”
“네가 제나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 궁금하구나.”
“소인은 조선 땅을 밟기 전까지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너도 잘 알겠지만, 난 임치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 사람이든 물자든 없는 것이 없는 곳이었어.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네가 굳이 조선땅에 정착하고 싶은 이유가 궁금하구나.”
“소인은 본래 임치에서 여덟 명의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10여 년 전 연나라군이 임치를 함락할 때 다른 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임치의 튼튼한 성벽 안에서 살면 평생 안전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아······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구나······.”
“조선은 사람이 적고 천하의 패권을 다투기에는 다른 나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나라보다 적군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올 위험은 훨씬 적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와 몇 달 뒤에 태어날 자식은 소인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고향을 떠나 조선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잃었던 땅은 되찾을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지. 네 사정은 이해했다. 그럼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이라니요! 뭐든 명령만 하십시오 전하!”
“아니. 강요는 하지 않을 테니 네가 직접 듣고 고민한 다음 결정해라. 나는 지금부터 아직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기술의 존재가 외국은 물론이고 왕실 직할령 밖의 조선 땅에 전해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절대 아무에게도 궁궐 안에서 보고 들은 일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해 보이나? 네가 내 뜻에 따라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앞으로 조선의 왕실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하면 큰 상을 내릴 것이고 거절하면 바로 널 제나라로 추방하겠다. 물론 그렇게 되면 조선의 백성인 네 아내와는 이별할 수밖에 없겠지”
“네?! 전하! 아내는 이미 제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 내 뜻에 따르면 왕검께 말씀드려서 너희 가족에게 왕검성의 성벽 안에 좋은 집을 줄 생각이다. 거기에 왕검성 근처의 밭 열 마지기와 그 밭을 경작할 노비 열 명도 하사하지.”
“허······ 참으로 관대한 보상입니다. 전하.”
“끝까지 들어봐라.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넌 두 번 다시 제나라 땅을 밟을 수 없고 왕실의 병사들이 늘 너희 집 주변을 지킬 거다. 또 왕검성의 성벽 밖으로 나갈 때도 왕실의 병사가 널 호위할 것이다. 네가 고민할 시간을 그리 오래 기다려줄 수 없으니 이 자리에서 대답해라.”
“음······.”
장연은 제안의 탈을 쓴 협박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태자의 말에 거스르면 아이를 가진 아내와 평생 생이별을 해야만 한다.
게다가 자신을 지킨다는 병사들은 감시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동향 사람과 잡담을 하다가도 자칫 오해를 사면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대신 태자의 명에 충실히 따르면 평생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고 아내와 곧 태어날 자식들은 성벽과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간신히 얻은 가족과 생이별하고 싶지는 않다. 얻는 것도 많으니 조선 왕실의 뜻을 거스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장연은 결국 한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천한 공인이 어찌 한 나라의 주인이 되실 분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태자 전하와 조선의 왕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바로 일을 시작해볼까? 지금부터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겠다. 잘 보고 튼튼한 무쇠 화로를 만들도록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한부가 제나라인 장인과의 협의를 원만하게 마친 후 드디어 연은분리법 개발 작업이 시작했다.
대장장이 강과 화로 장인 장연은 먼저 궁궐 정원 구석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무쇠 화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흘 만에 화로가 완성되고 대장장이가 화로에 넣을 납광석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 모습을 본 한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안돼! 당장 멈춰라!”
“어이쿠 깜짝이야! 전하. 소인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요?”
“대체 무슨 짓이냐? 납광석은 절대 맨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 궁녀들에게 장갑과 두건을 가져오게 할 테니 잠깐 기다려라.”
“전하. 소인이 벌써 스무 해 동안 대장장이 노릇을 해왔습니다만, 그런 말씀은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된다! 장갑하고 두건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작업 중지다.”
두 고대의 기술자는 납의 위험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에 태자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잠시후 궁녀들이 천으로 만든 장갑과 두건을 가져오자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대장장이 강이 무쇠 화로 안에 재를 잔뜩 깔아둔 다움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납광석을 집어서 재 위에 올려두었다.
그다음 장연이 화로의 사방을 깨진 질그릇으로 꼼꼼하게 덮자 다시 대장장이가 화로의 아래와 위에 질 좋은 숯을 놓고 불을 피웠다.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장장이 강에게 말했다.
“강. 숯을 피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납이 녹는지는 감을 잡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전하. 이렇게 화로의 아래위로 숯을 피운 적은 없긴 하지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좋다. 그럼 납이 완전히 녹았을 때쯤에 불을 끄고 화로 안을 살펴보자.”
“전하. 녹은 납이 스며든 재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납과 재가 아니라 재 위에 남은 물건을 쓸 생각이다.”
“소인의 경험으로는 재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듯 하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한참 후 대장장이 강이 화로 위와 아래에의 숯불을 끄고 화로가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재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지깽이로 화로 안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어디 보자. 어라? 이상한 일이구먼. 이럴 리가 없는데······.태자 전하. 전하의 예상대로 아직 녹다 만 납 조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한번 꺼내서 자세히 살펴봐라. 아마 깜짝 놀랄 거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대장장이가 작은 삽으로 화로 안의 재를 조금씩 떠서 나무 접시 위에 놓으니 회색빛 재 속에서 햇빛을 반사하면서 빛나는 흰색 금속 조각 몇 개가 보였다.
강은 곧 그 금속 조각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이건 납의 광택이 아닌데?! 서······ 설마 이건 은인가?!”
“이제야 알아보는구먼. 자네 말이 맞아. 그건 은 조각이야.”
“오 이런 세상에 천지신명이시여! 태자 전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장연도 은 조각을 손으로 집어서 자세히 살펴보더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한부에게 물었다.
“아직 조선말이 서툴러서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더니 정말로 은이구나! 혹시 전하께서는 곤륜산의 신선께 도술을 배우셨습니까?!”
“그런 게 아니야. 지금부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
한부는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연은분리법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납은 은보다 훨씬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 강. 내 말이 맞지?”
“그렇습니다. 전하. 경험상 납은 은을 녹일 때보다 반도 안 되는 숯을 써도 잘 녹았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납은 워낙 무거운 금속이라 녹으면 밑으로 가라앉으려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불에 녹이자마자 재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거지.”
“거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만, 갑자기 은 조각이 나타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모르겠나?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이번 원정에서 가져온 납광석에는 원래 은도 많이 섞여 있던 거야. 그걸 은과 납의 성질이 다른 점을 이용해서 분리한 것 뿐이지.”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대장장이 강은 의문이 해결되자 해맑은 표정으로 기뻐했지만, 장연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태자가 고대 중국어로 같은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놀란 얼굴로 한부를 바라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쇠를 오래 만진 소인이나 저 대장장이도 납광석에 은이 들어있다는 경우도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하의 해박한 지식에 깊이 감탄했습니다!”
“쑥스러우니까 너무 아부하지 마라. 다행히 왕검께 보여 드리기로 했던 기술은 잘 완성됐군.”
“축하 드립니다. 전하!”
“다 자네들이 애써 준 덕분이지. 그런데 장연. 자네 혹시 철을 제련할 때 쓰는 벽돌 화로도 만들 줄 아나?”
“물론입니다. 전하. 소인은 화로에 쓰는 벽돌도 제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 사용합니다.”
“그럼 저기 구석에 쌓여있는 흰색 돌멩이의 가루로 벽돌을 만드는 방법도 한번 연구해보거라.”
“처음 보는 암석이로군요. 저 물건의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부는 장연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 마그네사이트를 고대 중국어로 뭐라고 부르지?! 생각나는 단어가 없네?!’
그는 잠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직접 마그네사이트의 고대식 이름을 지어버렸다.
“뭐긴 뭐겠나? 하얀 돌이니까 백석(白石)이지. 저 돌의 가루를 청동을 제련할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구우면 농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성질을 갖게 되고, 그렇게 만든 가루를 다시 철을 제련할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구우면 불에 강한 벽돌을 만드는데 쓸 수 있는 재료가 된다고 알고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차근차근 연구해서 좋은 성과를 보여다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