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3화] 철기가 부른 인식의 변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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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열 왕검은 전방에 복병이 숨어있다는 비왕 무의 보고를 받고도 크게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
“흠······ 조금 귀찮게 됐구나. 반역자 부족장이 벌써 숲에 복병을 심어놨단 말이지. 비왕, 자네 생각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지금의 우리 병사들에게는 대단치 않은 상대입니다. 복병의 방해를 정면으로 돌파하면 인근의 다른 부족들이 겁을 먹고 감히 폐하께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런! 두 사람 다 철기를 얻었다고 너무 방심하고 있어! 역사엔 더 강한 군대를 가지고도 방심하다가 참패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고!’
보급에 대한 대비책 없이 무작정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나라와 신세를 망친 수양제.
충분한 대비 없이 게르마니아의 토이토부르크 숲 속을 행군하다가 야만족 게르만인에게 전멸했던 로마의 2만 대군.
수많은 비극적인 사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한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아버지를 말리기 시작했다.
“폐하! 돌창이나 뼈 화살촉을 단 화살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한 무기입니다! 아무리 우리 병사들이 철기를 갖추었어도 살의를 가진 무리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으면 참패를 면치 못할 겁니다!”
“태자가 겁을 많이 먹었구나. 적의 복병이 대강 어디쯤 있는지 알았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적군이 비탈길에서 우리 병사들에게 통나무나 커다란 바위를 굴려대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철로 만든 갑옷을 입어도 그건 커다란 물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허허! 제나라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워왔구나! 하지만 넌 중요한 점을 하나 놓치고 있다.”
“네?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무기를 손에 쥐든지 간에 전쟁의 주체는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폐하의 말씀이 너무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잠시 후에 전투가 벌어지면 알게될 거다. 비왕.”
“네. 폐하.”
“몸놀림이 날쌔고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숲을 지나 멀리 돌아서 은밀히 적 복병의 배후를 잡으시오.”
“하지만 적들도 숲 속에 정찰병을 풀어놨을 겁니다. 아무리 은밀히 움직여도 5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발각되지 않고 이동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짐은 본대와 수송대 병사들을 이끌고 길을 따라 천천히 행군하겠소. 보란 듯이 일부러 소란을 피우면서 행군하면 적 정찰병의 시선도 그쪽으로 쏠릴 거요.”
“아! 이제야 폐하의 깊은 뜻을 짐작하겠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먼저 군대를 움직이시면 뒤따라 출발해서 본대를 앞지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병사들에게 작전내용을 설명했다.
한부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쟁의 주체는 무기가 아닌 사람이라······. 우리 병사들이 적병보다 더 강하다는 말인가? 신병도 많아서 평균적으로 보면 딱히 그렇진 않을 텐데. 그건 그렇고 별동대가 도착하기 전에 본대가 궤멸적인 피해를 보면 말짱 꽝이잖아! 제발 별일 없었으면!’
* * *
“자! 모두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행군하라! 맹수를 쫓아야 하니 큰소리로 노래 부르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거다!”
왕검의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두 줄로 길게 늘어선 고조선의 병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발맞추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곧 햇볕도 거의 들지 않는 음침한 숲속에 힘찬 곡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동의 벌판을 달리던 날들! 조상의 얼이 서린 갈망의 땅이여!”
한부는 뱀처럼 긴 행렬의 후방에서 말을 몰며 왕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마 아버지는 적의 숫자가 워낙 적어서 복병을 숨겨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셨겠지. 그런데 아무리 수에서 차이가 나도 별동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렇게 진형이 불리한데?’
그렇게 고조선군 본대의 소란스러운 행군을 계속하며 원시림 한가운데에 다다르자, 갑자기 오솔길 오른편의 가파른 경사로에 자란 수풀 속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한부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주먹만 한 돌멩이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아아! 이런 제기랄! 결국 이렇게 돼버렸잖아!”
그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곁에 있던 호위병이 네 명이 급히 태자를 말에서 끌어내린 다음 커다란 방패로 벽을 쳤다.
- 쾅! 쾅! 콰광! 쾅!
한부는 방패에 돌이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져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역시 후방에서 왕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젊은 하급장교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폐······ 폐하! 고지대에 숨은 적에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당황할 것 없다. 쏟아지는 돌과 화살의 양을 보건대 적은 우리보다 숫자가 적어. 그리고 공격이 집중되고 있는 중간 부분에 배치한 병사들은 대부분 짐과 함께 요동에서 탈출한 정예병들이다.”
“하······ 하지만!”
“그만 떠들고 잘 봐라. 중심부의 정예병 중에서 당황한 자가 한 명이라도 보이느냐?”
왕검의 말대로 정예병들은 재빨리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커다란 원형 나무 방패를 치켜들어 침착하게 돌과 화살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도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젠장! 원거리 무기로 적의 진형을 흩트린 다음에 행렬의 중간 부분을 덮쳐서 각개격파하려는 모양이다! 아무리 베테랑 병사들이라도 화살을 막다가 갑자기 적이 돌진해 오면 대응하기 힘들 텐데!’
그의 걱정대로 갑자기 돌과 화살 비가 멈춘 순간, 어두침침한 풀숲에서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병사 수천 명이 튀어나오더니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사로잡아라!”
한열 왕검은 그 모습을 보고 허리춤에서 철검을 뽑아 적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모두 일어나서 방패를 들어라! 이번 돌격만 막아내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고조선의 병사들은 왕검의 명령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패를 들었지만, 반박자 빠르게 움직인 적군이 내지른 돌창과 석검이 방패 위나 아래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복병 무리의 공격은 대부분 철제 찰갑에 부딪히면서 튕겨 나갔다.
- 채앵!
그 순간, 한부는 적군의 움직임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느꼈다.
‘어?! 왜 적군은 하나같이 어깨나 허벅지를 노린 거지?! 목이나 얼굴을 노리고 죽일 생각으로 덤볐으면 우리 쪽 진형은 완전히 박살 났을 텐데?!’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뜬 순간, 복병의 돌진을 막아낸 고조선의 병사들이 반격을 시작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증오와 분노가 묻어나는 함성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로 얼룩져가는 평화로웠던 숲속.
한부는 그 피로 물든 전장 한복판에서 호위병의 방패 너머로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으아아아아! 이 악귀 같은 놈들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젊은 적군 한 명이 갈빗대 사이로 철검이 박혀 쓰러지는 전우를 보자마자 공포와 분노에 몸을 맡기고 마구잡이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다른 고조선군 병사가 망설임 없이 그 병사의 목울대를 노리고 철검을 내질러 적의 숨통을 끊었다.
‘아······ 너무 끔찍해서 보고 있기 힘들구만······. 그런데 나야 현대인의 감성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먼저 우리를 습격한 놈들이 왜 이렇게 투지가 약하지? 전근대의 병사들은 피 튀기는 살벌한 전투에 익숙할 텐데. 으악! 저 피 좀 봐!’
한부가 잔혹한 전장의 광경과 풀리지 않는 의문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있을 때, 드디어 비왕 무가 지휘하는 별동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돌격하라! 왕검 폐하와 태자 전하를 위협하는 적을 섬멸하라!”
지휘관의 추상같은 명령에 날쌘 병사들이 적군의 배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 않아도 고조선 본대 병사들의 분투에 조금씩 밀리고 있던 복병 무리는 등 뒤까지 공격당하자 무기를 바닥에 내던지면서 숲 속으로 도망치거나 항복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도망쳐!”
“항복입니다! 그 칼 좀 치워주세요!”
그렇게 의문투성이였던 전투가 마침내 끝나자 한열 왕검이 아들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태자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끔찍한 광경에 조금 긴장한 것 빼고는 무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무사하신지요?”
“짐도 호위병들이 애써준 덕분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설마 적의 화살이 후방에까지 닿을 줄은 몰랐구나. 이 애비의 불찰이다.”
두 부자가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비왕 무가 다가와 왕검에게 말했다.
“왕검 폐하.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소장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폐하를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소리요? 정말 잘 싸워줬소 비왕. 복병의 숫자가 짐의 예상보다 더 많아서 내심 긴장했었는데, 경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뒀소.”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한부는 친분이 깊은 비왕 무까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조금 전 전장에서 느꼈던 궁금증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폐하. 그런데 이번 전투를 지켜보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적군은 기세등등하게 우리를 습격한 것치고는 투지와 살기가 약해 보였습니다. 원래 나약한 자가 많이 사는 부족이었던 걸까요?”
“그런 게 아니다. 우리를 습격한 자들은 반도에서만 살아오다 보니 ‘적을 죽이기 위한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부족의 출신이었을 뿐이다.”
“폐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쟁이란 당연히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선왕께서 지하에서 그 말씀을 들으시면 기겁하시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과거의 전쟁, 과거라고 해봐야 네 할아버지 되시는 선대 왕검께서 막 옥좌에 앉으셨을 때 만해도 전쟁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전쟁은 적을 죽여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잡기 위해 벌이는 거였어. 그도 그럴 게, 포로를 살려 둬야 노비로 삼든 몸값을 받고 풀어주든 할 게 아니냐? 적 부족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면 나중에 또 포로를 잡으러 갈 수 없고.”
“음······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그런데 중원의 나라들이 철제 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전쟁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어. 전보다 훨씬 많은 병사가 강력한 무장을 갖추게 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
“예전에는 적군에게 경상을 입혀서 포로로 잡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전쟁의 양상이 한 나라나 부족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쪽으로 변해버린 거네요.”
“그렇지. 우리 조선은 아직 그 광기로 가득한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을 때 연나라군에게 침략당했단다. 무기의 질도 떨어졌지만,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거의 멸망할 뻔했지.”
“아······ 이제야 폐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우리 병사들이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할 때 저들은 우리 병사들을 붙잡을 생각을 하면서 덤볐군요. 평소에도 적을 일격에 죽이는 대신 경상을 입혀서 제압하는 훈련을 받았겠지요. 폐하의 가르침 덕에 인식의 차이란 무기의 차이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한부는 흐릿한 옛 기억 속에서 전생의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수업의 내용을 끄집어냈다.
‘그래. 아직 석기가 주 무기였던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는 전쟁의 양상과 전쟁에 관한 인식이 완전히 달랐었다는 교수님 말씀이 기억나네. 도구의 발전이 이렇게나 사람의 의식을 바꿔버릴 수도 있구나.’
한열 왕검은 생각에 빠진 태자의 얼굴을 보고 잠시 미소 짓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조선인들은 연나라에게 겪은 굴욕 때문에 전쟁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가던 참이었단다. 그러던 중에 네가 제나라에서 거리낌 없이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는 모습을 보고 짐도 간신히 새로운 전쟁관에 대한 혐오감을 완전히 떨쳐버렸지. 그 덕에 새로운 결심을 세울 수 있었단다.”
“폐하께서는 앞으로 ‘죽이는 전쟁’을 통해 조선을 부흥시키시려는 거군요.”
“역시 금방 알아듣는구나. 대화는 이 정도로 줄이고. 호위병들과 함께 잠시 이곳에서 떨어져 있거라.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았지만, 아이가 볼만한 것은 아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한부가 왕검의 명에 따라 호위병과 함께 참혹한 전투의 현장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발밑에는 원 역사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피가 비 온 뒤에 생긴 웅덩이처럼 곳곳에 고여있었다.
‘이제 와서 내가 한 일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이번 생의 업이 깊어질 거라는 점은 각오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