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10화] 내부의 적 (일부내용 수정)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참으로 답답하구나! 우리 태자에게서 왜 아직도 아무 기별이 없단 말이냐!”
한열 왕검은 고조선의 태자가 출항했던 항구마을에 다녀온 관리의 보고를 듣고 깊이 탄식했다.
한부가 제나라의 문물을 배워 오겠다면서 서해를 건넌지 벌써 한 달하고 보름째, 예정대로라면 그가 왕검을 떠나고 한 달 정도 후에는 태자 일행이 궁궐에 도착했어야 했다.
왕검은 머릿속에 거친 서해의 풍랑이 아들이 탄 배를 집어삼키는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여봐라! 어서 궁으로 대제사장님을 모셔라! 태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굿판을 벌여야겠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내관이 왕검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면서 말했다.
“폐하! 조금 전 궁에 도착한 파발꾼이 전하기를 태자가 탄 배가 서해안의 항구마을에 입항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우리 태자가 돌아왔구나! 그래. 태자는 건강하다더냐?!”
“태자는 무탈하다고 합니다. 폐하. 이틀 후에는 왕검성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틀? 여기서 항구마을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 텐데.”
“태자 일행이 가지고 돌아온 짐이 워낙 많아서 하역작업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대체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가져왔다는 말이냐?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구나. 어서 마차를 대령하라. 부인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직접 태자의 안위를 확인할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내관은 왕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가서 궁의 하인들에게 나무와 청동으로 만든 쌍두마차와 호위부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한열 왕검은 왕후 연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장남이 있는 곳을 향해 출발했다.
왕검 일행이 항구마을에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한부가 함께 온 비왕 무와 함께 말에서 내리면서 왕검과 왕후에게 인사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자 다녀왔습니다!”
한 달 반 만에 만난 장남이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왕검 부부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더니 차례로 한부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태자야! 건강한 모습을 보니 무척 마음이 놓이는구나!”
“태자! 제나라에서 자주 끼니를 거른건 아니지요? 조금 야윈 것 같습니다.”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니 두 분 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저기 부둣가를 좀 보십시오 아바마마! 제나라에서 기술자와 물자를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제나라에서 학문을 배워 오겠다더니 웬 기술자를 데려왔느냐?”
“모두 철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익힌 자들입니다.”
“제나라가 아무 대가도 없이 우리에게 선의를 베풀었다는 말이냐?”
“그 대신 앞으로 제나라 상인에게는 신선차를 시세의 반값만 받고 팔기로 약조했습니다. 허락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은 점 용서해주십시오.”
“좋은 조건이긴 하다만, 마냥 칭찬하기는 어렵구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조선은 우리 하늘 부족과 호랑이 부족, 그리고 곰 부족이 힘을 합쳐 이끌어가고 있는 나라다. 분명 적지 않은 다른 부족 출신 제후들이 네 독단적인 행동을 좋지 않게 볼 게다. 특히 상(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완은 크게 반발할 테지. ”
한열 왕검의 대답에 들떠있던 한부의 마음 한구석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상(相), 고조선이 전국시대 중원 국가의 재상에 해당하는 관직인 상방(相妨)을 모방하여 만든 최고위 관직.
그러나 상방은 국왕이 임면권을 가졌던 반면, 고조선의 상은 왕검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과 넓은 영지를 가진 대영주에 더 가까웠다.
두 관직은 서로 이름만 비슷할 뿐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자리였던 것이다.
고조선에서 왕검 다음가는 권력을 가진 상이 다른 제후들의 세력까지 규합해 개혁을 방해하면 한부가 구상 중인 고조선의 발전 계획에는 애로사항이 꽃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원 역사의 몇십 년 뒤인 위만조선 시대에는 상이 왕검하고 말다툼하다가 2천 호나 되는 주민을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버린 일도 있었다고 했지. 지금은 왕검의 권력이 그 시대보다 약하니까 그 완이라는 놈의 위세는 더 만만치않을 거야.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구만.’
한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결연한 목소리로 왕검에게 말했다.
“아바마마. 왕검성으로 돌아가면 바로 부족회의를 소집해 주십시오. 제가 그 자리에 참석해 이번 일의 필요성을 설명하겠습니다.”
“음······ 아직 어린 네가 부족회의에 참석하면 고깝게 생각하는 제후들도 분명 있을 거다. 잘 할 수 있겠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나라 왕 앞에서도 제 할 말은 다 하고 왔습니다.”
“좋다. 한번 해보아라. 짐도 그 자리에서 네 말에 힘을 실어주마.”
“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 * *
한열 왕검은 아내와 장남과 함께 왕검성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모든 제후에게 전령을 보내 부족회의를 소집했다.
아직 고조선의 영토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소집령이 떨어진 지 열흘 만에 전국의 제후 수십 명이 왕검성으로 모였다.
키가 크고 몸집이 비대한 상 완은 다른 제후들의 맨 앞에 서서 궁궐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옥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한열 왕검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어서 오시오. 완 경. 경의 얼굴을 거의 3년 만에 보는 것 같구려.”
“소신이 공사다망하여 매년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경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괘념치 말고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상 완은 왕검의 말을 듣고 짧게 읍을 하더니 옥좌 반대편의 있는 자기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더니 허리를 꽂꽂히 세웠다.
한부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직감했다.
‘말투만 공손하지 표정이나 행동은 당당함을 넘어서서 오만하구나. 분명 왕검이나 자기나 한 끝 차이 밖에 안 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모든 상 완을 시작으로 모든 경과 대부가 직사각형 테이블 주변에 앉자 한열 왕검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그대들을 이 자리에 부른 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오. 제나라가 우리 조선에 철광산 개발 기술과 철기 제조법을 알려주기로 약속했소.”
그 말에 수많은 제후가 활짝 웃으면서 들뜬 목소리로 왕검에게 대답했다.
“나라의 경사로군요! 폐하! 이제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고 있던 숲이나 습지를 더 쉽게 개간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석기를 들고 싸우던 병사들에게 철제 무기를 들려주면 조선에 반기를 든 인근의 부족들이 밤잠을 설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때, 상 완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구기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제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철기 제조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습니까?”
“아니오. 태자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제왕을 만나서 약조를 얻어냈소.”
“그렇다면 태자께서는 사실상 사신으로서 조약을 맺기 위해 제나라에 가신 게 아닙니까?! 그토록 중요한 사안은 전통에 따라 부족회의에서 결정해야 마땅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태자에게 자세히 듣도록 하시오. 내관. 태자를 안으로 들여라.”
내관은 왕검의 명에 따라 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부를 집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한부는 옥좌 옆으로 걸어온 다음 당당한 목소리로 고조선의 제후들에게 인사했다.
“경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조선의 태자 한부요.”
상 완은 그 상황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이제는 언성까지 조금 높여가면서 왕검에게 따졌다.
“아직 상투도 틀지 않으신 태자께서 부족회의에 참석하시다니요! 폐하! 조선의 전통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단 말입니까?!”
“경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면 이러는 편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겠소? 성인이 아닌 자가 부족회의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법률이 있는 것도 아니니 더는 따지지 마시오, 조선의 왕검은 짐이지 그대가 아니오.”
한열 왕검이 강하게 나오자 상 완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부는 아버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제후들에게 말했다.
“조선의 제후 여러분. 왕검께서 말씀하신 대로 본인은 제나라의 문물을 배우러 갔을 뿐 사신 자격으로 간 게 아니오. 다만 예의상 제나라의 궁궐에 인사를 하러 갔다가 우리나라에는 철기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고맙게도 제왕께서 자발적으로 조선에 철기 제조법을 알려주기로 한 것이오.”
그러자 상 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신선차의 가격을 깎아주는 문제는 어떻게 된 겁니까?”
“신선차는 왕실의 영지와 방계 왕족인 하늘 부족 출신 제후들의 영지에서 나는 재료로만 만들고 그 수익금도 전부 왕실의 국고에 들어가오. 굳이 왕실의 재산을 외국에 싸게 파는 일을 부족회의에 부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소. 경이 남쪽의 진번국과 무역하는 일에 왕실이 관여하지 않으니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겠소? 상대방의 호의에 왕실 재산으로 작은 답례를 했을 뿐이니 경은 관여치 마시오.”
“그······ 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철을 다루는 법을 배우려면 적지 않은 수의 제나라인이 국내에 장기간 머물러야 하겠지요. 이는 부족회의에서 결정해야 하는 사항임이 분명합니다!”
상 완은 그렇게 말 한 다음 다른 제후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의 경과 대부 여러분! 부족회의를 거치지 않고 많은 외국인을 조선에 들이는 왕실의 결정은 무효입니다! 당장 태자 전하를 따라온 제나라인들을 추방하여 조선의 오랜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한부는 상 완의 외침을 듣고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을 삭였다.
‘왕족인 내가 공을 세우는 게 그렇게 아니꼬운 거냐? 자기 가문의 권력을 지키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구만.’
고조선의 이인자인 상 완은 갑자기 총명해진 한부의 존재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탁자 밑에 숨긴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안 그래도 신선차 무역 때문에 왕실은 우리 가문보다 나날이 부유해지고 있다. 게다가 태자를 칭찬하는 괘씸한 제후들도 독버섯처럼 늘고 있어. 아직 우리 가문 출신의 후궁이 아들도 낳지 못했단 말이다! 더는 저 애늙은이가 명성을 얻도록 내버려 두면 안 돼.’
하지만, 한부는 이미 다른 제후들을 설득할 대책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경의 뜻이 정 그렇다면 지금 이 문제를 표결에 부치면 되겠군요. 그전에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내관. 밖에 준비해둔 물건을 들여오게.”
내관은 태장의 지시에 따라 자주색 알뿌리에 긴 이파리가 돋아나 있는 채소가 담긴 바구니를 가지고 들어왔다.
한열 왕검은 놀란 눈으로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태자. 이건 대체 뭐라고 부르는 작물이냐?”
“순무라고 부르는 중원의 채소입니다. 폐하. 씨를 뿌린지 넉 달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다 지력도 별로 소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채소를 기르면 흉년이 들어도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는 날이 줄어들 겁니다.”
그 말에 상 완을 제외한 다른 제후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순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나라인들을 쫓아내면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자기 나라에 가져가려 할 거요. 제나라와 국교를 끊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리가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소. 그럼 철기와 함께 이 유용한 작물을 조선에서 기를 기회도 잃게 될 것이오.”
이미 그 자리의 분위기는 한부에게로 기울었지만, 상 완은 끈질기게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 보잘것없는 채소가 나라 살림에 도움이 돼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본인이 고안한 새로운 농법에는 순무가 반드시 필요하오. 일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휴경지를 둘 필요 없이 매년 모든 농지에 작물을 심을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