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6화] 그럼 약을 만들어 볼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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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거의 내 키의 두 배는 되겠구나. 이렇게 넓은 삼밭을 보고 있자니까 기분이 좀 그러네.”
한부는 키 2m가 훌쩍 넘는 푸른 삼이 가득한 밭 근처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찝찝한 마음을 다스렸다.
전생에는 범죄자와 싸우다 순직까지 했는데, 막상 대마초를 만들어 팔려니 마치 흉악범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조선 땅 어딘가에선 호랑이가 마을을 박살 내고 죄 없는 사람이 순장 당하고 있어. 이 나라의 국력을 기르고 의식을 개선하려면 이게 최선이야. 게다가 대마초는 이 시대에의 다른 약재하고 비교하면 그렇게 치명적인 것도 아니잖아.’
전 세계의 인류는 근대까지도 의학지식 부족으로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물질을 약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미래의 적인 진시황도 불로장생약이라며 수은이 들어간 탕약을 자주 마셨고 유럽과 미국에선 위험한 마약 헤로인을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기침약이라며 팔아댔다.
‘그에 비하면 대마의 독성은 귀여운 수준이지. 현대의 윤리기준을 들이대려면 당장 노비제도를 먼저 폐지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아직은 불가능해. 위선은 사치다. 지금은 부국강병에만 집중해도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말까야.’
한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을 정리했고, 박사 정은 또 뭔가가 어린 태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착각하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이 삼밭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별일 아니오. 그저 말을 너무 오래 탔더니 좀 지쳐서 그러오. 그보다 이 밭의 주인을 좀 만나고 싶소. 이렇게 넓은 밭을 가진 자라면 아마 대부(大夫)나 경(卿)일 것 같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 시종에게 삼밭 주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사 정의 시종은 주인의 지시를 듣고 종종걸음으로 마을로 향하더니 곧 가죽신을 신고 말끔한 흰옷과 여우 가죽을 몸에 걸친 중년 남자를 한 명 데려왔다.
언뜻 보기에도 귀족이 분명한 남자는 두 손을 모아 한부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대부 권이 태자전하를 뵙습니다. 이 궁벽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친히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경과 대부는 고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관료체계를 참고하면서 만든 관직인데, 한마디로 경은 대영주, 대부는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소영주였다.
한부는 예법에 따라 그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조선의 현황을 두 눈에 직접 새기고자 전국을 돌다가 정돈이 잘되어있는 삼밭이 보여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오. 조선의 삼밭이 모두 이곳처럼 작황이 좋으면 백성들이 옷이 없어 헐벗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소.”
“과부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마침 점심시간이 다되어 가니 잠시 저의 누추한 집에서 전하를 대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고맙소. 마침 시장기가 돌던 차이었다오.”
대부 권은 이제 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자의 의젓한 언행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 한부와 비왕 무, 그리고 박사 정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의 집은 현대인이었던 한부가 보기에는 저택이라고 부르기엔 규모가 작았지만, 그럭저럭 깨끗하고 넓은 방을 몇 개 갖추고 있었다.
한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VVIP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려고 일개미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군대에서 취사병 할 때 생각나서 좀 미안하네. 사단장이 갑자기 병사식당에서 점심 먹는다고 하는 바람에 메뉴를 계란국에 조기 튀김에서 함박스테이크로 바꾸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었는데.’
태자 일행 세 명이 응접실의 자리에 앉자, 곧 하인들이 흰 쌀밥과 대파를 곁들여 구운 꿩고기,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반찬과 국을 내왔다.
한부는 전국 순행에 나선 뒤로 병사들과 함께 야외에서 지어준 거친 잡곡밥을 먹어왔기에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태자는 밥공기를 싹 비운 후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대부 권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소 대부. 덕분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소.”
“경황없이 준비한 조촐한 음식이었을 뿐입니다. 곧 입가심하실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 후 한부는 대부 권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지역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하. 요즘은 패수 너머의 연나라군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덕분에 이 마을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강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구려.”
한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대부의 말을 듣고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가 패수 근처란 말이지. 왕검성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패수는 청천강이었던 모양이다. 압록강이 아니고.’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두 나라의 국경선이 된 패수가 어느 강인지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그는 반쯤은 가슴이 시키는 데로 국내 학설 중에서 압록강 설을 믿고 있었지만, 현재 고조선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청천강을 경계로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확실히 청천간 이북 지역에는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많이 발굴됐지. 고조선이 나중에 연나라와 무역을 해서 그랬던 거라 믿고 싶었는데, 안 좋은 예감은 항상 잘 맞는다니까.’
패수가 현대의 청천강이라면 현재 고조선은 고작 평안도와 황해도의 일부 지역만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연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던 곳 중에서도 그 지역의 유력자가 고조선 왕실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독립해버린 경우가 많아 고조선의 영토가 더욱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고조선의 판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대부 권에게 이 마을에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말했다.
“대부. 조선의 부흥과 안녕을 위해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
“소신에게 말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전하.”
“이 마을에서 재배한 삼을 사고 싶소. 물론 제값을 낼 테니 손해를 볼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삼을 말입니까······. 간신히 찾아온 평화로운 시대가 지나가고 곧 전쟁이 벌어질 모양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야 왕실이 삼을 사 모을 때는 전쟁에 쓸 활줄을 만들 때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그렇지 않소. 삼의 줄기가 아닌 꽃을 살 생각이니 말이오.”
“삼의 꽃을 말입니까?”
“그렇소. 간밤에 꿈을 꿨는데,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신선 두 명이 정자에 앉아서 삼의 꽃잎을 띄운 차를 마시고 있었소. 그 장면이 신기해 보여서 왕검성에 가면 한번 따라 해볼 생각이오.”
대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뭐야. 그런 거였구나. 태자전하께서 나이에 비해 언행이 의젓하시긴 하지만, 역시 열 살 소년답게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는 분이구먼.’
고조선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국력이 크게 약해졌지만, 역설적으로 고조선 왕실의 국내 영향력은 전쟁이 끝난 후 오히려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왕실을 견제하는 경이나 대부 등 제후세력이 전쟁 중에 많이 죽어버렸고 그들의 세력 기반인 영지를 연나라에게 많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 권은 태자의 어렵지 않은 부탁을 들어주고 왕실의 호감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 축복을 받으신 분답게 신령스러운 꿈을 꾸셨군요. 삼의 꽃이 피면 바로 따서 왕검성에 보내겠습니다. 얼마나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농사에 방해되지 않은 한에서 최대한 많이 보내주면 고맙겠소. 아! 그리고 수꽃은 필요 없으니 암꽃만 보내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삼은 암수가 나뉘어 있는 식물인데, 암꽃은 약효가 강하지만 수꽃은 약효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부는 자신의 그 지식을 얻게 된 배경을 떠올리면서 씨익 웃었다.
‘전생에 마약상이 주인공인 미드를 봐 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암꽃하고 수꽃을 섞어서 쓰다가 헛고생만 했을 거 아니야.’
고조선의 현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고 새로운 특산품 개발에 필요한 원료도 확보했으니 더는 고생스럽게 미개척지를 떠돌 이유가 없었다.
태자 일행은 청천강 인근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서둘러 왕검성으로 돌아왔다.
한열 왕검과 왕후 연은 봄에 순시 길에 올랐던 태자가 초여름이 돼서야 돌아오자 궁궐의 대문까지 나가서 장남을 맞이했다.
“태자! 무사히 돌아왔구나!”
“아바마마. 소자 순시를 마치고 다녀왔습니다.
“그래. 지난 몇 달간 견문을 많이 넓혔느냐?”
“조선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내 자식이지만 참으로 똑 부러지는 대답이다. 누가 너를 열 살짜리로 보겠느냐!”
왕검이 말을 마치자, 왕후는 한부의 몸 곳곳을 더듬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혹시 열이 있거나 피부에 종양이 나지는 않나요?”
“어마마마. 소자 불편한 곳 하나 없이 건강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여행 도중 위험한 일을 겪지는 않았지요?”
한부는 그 말에 얼마 전 호랑이의 저녁밥이 될 뻔했던 순간을 떠올리고는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때 있얼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 어쩔 수 없이 하얀 거짓말을 좀 해야겠네.’
그는 일부러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 손으로 비왕 무를 가리킨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있는 비왕 무가 철통같이 호위해준 덕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비왕? 순시 중에 마주친 건 농사짓는 백성들과 길고양이 정도뿐이지 않았습니까?”
비왕 무는 자신에게 덤볐던 호랑이를 고양이 취급하는 태자의 능청스러움에 하마터면 너털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왕검과 왕후가 바로 눈앞에 있기에 간신히 참아냈다.
‘왕후마마께 거짓을 고하면서 나하고 박사 정의 입까지 막으시려는 게구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저러시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되실 걸 걱정해서 능청을 부리시는 걸까? 어느 쪽이든 참으로 영민한 분이시다.’
그는 곧 한부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연기 실력을 보이면 태자에게 대답했다.
“전하. 소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순시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천상에 계신 단군왕검께서 전하를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한열 왕검은 아들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내심 기뻐하면서 비왕에게 말했다.
“그동안 태자의 곁을 지키느라 수고했소 비왕. 그대와 박사 정에게 각각 쇠고기 열 근과 좋은 술을 세 병을 하사하겠소. 태자를 호위한 병사들에게는 백미를 다섯 되씩 하사할 테니 그대가 공평하게 나눠주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화기애애한 환영식이 끝난 후, 한부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여독을 풀고 다음 날 점심을 먹은 후 신약 개발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한열 왕검을 찾아가서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요청했다.
“아바마마. 소자 꼭 한번 실험해 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실력 있는 약사와 다 큰 돼지 몇 마리를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약사와 돼지를? 이번엔 뭘 해볼 생각인 게냐?”
“새로운 약을 만들어서 제나라에 팔아서 그 대가로 철제 무기와 도구를 사오고 싶습니다.”
“네가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조선의 부흥을 위해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음······ 어린애가 일런 말을 하면 공부나 하라고 꾸짖는 게 보통이겠지. 하지만 넌 아무리 봐도 보통 애가 아니다. 좋다. 약사 한 명에 돼지 다섯 마리 정도면 되겠느냐?”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
한부는 왕검의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기쁜 나머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됐다! 돼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실험도 안 해본 약을 사람한테 팔 수는 없잖아? 꼭 성공시켜서 철기시대를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