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5화] 철기가 필요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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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태자가 된 후 늘 뭔가를 생각하느라 복잡했던 한부의 머릿속이 처음으로 새하얘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 동물원이 아닌 장소에서 호랑이를, 그것도 자신을 흘끗 바라보더니 군침을 흘리면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호랑이를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부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비왕 무가 급히 말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곁에 있던 병사가 들고 있는 창을 빼앗은 다음 호랑이의 미간을 노리고 힘껏 던졌다.
“흐읍!”
호랑이는 돌창이 미간에 명중하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틀었지만, 어깨에 창을 맞고 넘어지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 크르르르르릉!
그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몇몇 병사들이 창대를 꼬나쥐고 호랑이에게 덤비려 했지만, 비왕은 그런 부하들을 꾸짖었다.
“멈춰라! 녀석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다! 창대를 세워 태자전하를 보호하면서 일제히 함성을 질러라!”
“알겠습니다 비왕님!”
명령이 떨어지자 고조선의 병사 2백 명은 순식간에 태자의 주위로 몰려들어 고슴도치처럼 창으로 벽을 친 후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호랑이는 그제야 사냥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들을 한번 노려보더니 마을 뒷산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왕 무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태자전하.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제 호랑이는 물러갔으니 안심하십시오.”
한부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소 비왕. 그만 조선의 태자로써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 타고난 무골이라도 수염이 나기 전에 호랑이와 마주치면 기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설마 어촌에서 산군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산군? 처음 들어보는 단어로군요. 중원에서 호랑이를 뜻하는 단어인 모양입니다.”
“산군이란 말을 처음 듣는단 말이오? 산에 사는 군주라는 뜻이라오.”
“우리 조선에는 맞지 않는 말이군요. 이곳의 호랑이는 산보다는 습지나 숲에 더 많이 사니 말입니다. 산에는 주로 다른 호랑이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해서 세력다툼에 밀린 녀석들이 살고 있지요.”
“그게 정말이오?! 그럼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본 갈대밭에도 호랑이가 숨어 있었겠구려!”
“아마도 몇 마리 정도는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랑이는 영물이라 무장한 병사와 힘없는 농부를 구별할 줄 압니다. 또 우리 숫자가 워낙 많으니 어지간히 굶주리지 않고서야 이번처럼 전하께 덤벼드는 무모한 녀석은 거의 없을 겁니다.”
비왕의 말을 듣고 한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시대의 대동강 하류 지역은 온통 늪지대투성이잖아. 습지가 아니어도 개간이 안 된 지역은 죄다 원시림이고. 과장 좀 보태면 마을에서 몇 발짝만 나가도 한국에서 길냥이 만나는 확률로 호랑이랑 마주치게 된단 말이네. 하긴 조선 시대에도 그 난리였으니······.’
전근대의 한반도는 조선 시대에도 경복궁에 호랑이가 숨어들어와서 돌아다니고 동네 뒷산에서도 표범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맹수가 흔했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이 건국되기 1,600년도 전인 고조선 시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게 분명했다.
‘습지대나 원시림을 농지로 개간할 때는 맹수를 막아낼 호위병들도 꼭 같이 보내야겠네. 그런데 무기가 저렇게 부실해서야······.’
한부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비왕이 던졌던 돌창이 시야에 들어오자 한숨을 쉬었다.
화강암을 갈아서 만든 창날에 피가 별로 묻지 않은 것을 보니 그를 덮쳤던 호랑이는 그저 긁힌 상처만 난 게 분명했다.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호랑이를 상대하긴 힘들 텐데 석기라니······ 앞날이 막막하구만.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겁먹은 마을 사람들부터 돌봐야겠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비왕 무에게 말했다.
“비왕. 우선 이 마을이 입은 피해 정도를 확인하고 겁에 질린 백성들을 진정시키는 게 좋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비왕은 즉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피해 상황을 파악한 후 한부에게 보고했다.
“태자전하. 호랑이 발톱에 등을 긁힌 농부가 한 명 있고 상처 입고 도망치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개 세 마리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죽거나 실종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충직한 개들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사람이 살았구려. 불행 중 다행이오. 다친 농부에게 상처가 나을 동안 먹을 양식을 나눠주도록 하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한부는 비왕 무와의 대화를 마친 후 이번에는 박사 정에게 말했다.
“이제 주변이 잠잠해졌으니 박사도 왕검께서 내리신 명을 이행해주시오. 어서 이 마을의 인구수와 생산되는 물자의 종류를 조사합시다.”
“알겠습니다. 전하.”
박사 정은 하인에게 죽간과 문방구를 들고 따라오도록 지시한 다음 태자가 보는 앞에서 호구조사를 시행했다.
그는 해가 지기 전에 자료를 취합해 한부에게 보여주면서 보고했다.
“전하. 이 마을의 가구 수는 총 50호이고 전부 250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구려. 이 마을에서 나는 물자는 뭐가 있소?”
“연안에서 잡히는 물고기 외에는 뒷산 밑에 일군 밭에서 재배한 콩뿐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채소는 없었소?”
“다른 채소라 하시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 왜······ 어?!”
한부는 현대의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채소의 이름이 고조선의 말로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고 말았다.
‘감자나 고구마는 원산지가 중남미니까 없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설마 배추나 당근 같은 것도 없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까 내가 아는 채소는 대부분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들어온 거였지. 구황작물로 쓸만한 채소가 하나도 없으니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많이 저장해 놓는 게 최선인데······ 여기서도 아쉬운 건 역시 철기구나.’
그가 박사 정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본 농기구는 하나같이 돌과 나무로 만든 것들뿐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비싼 청동기를 농기구로 사용한 나라나 부족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고조선에는 아직도 철기가 별로 없을까? 중국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부터 철제 농기구를 써왔는데 말이지.’
한부는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박사 정과 눈을 마주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채소 얘기는 잠시 접어두고, 박사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전하.”
“왕검께 우리 조선은 제나라와 교역을 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들었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철로 만든 물건이 이리도 없는 것이오?”
“아시다시피 우리 조선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요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서쪽 국경선이 중원의 하북지역에 인접해 있었고 북서쪽의 국경선은 흉노족의 영역과 맞닿아 있었지요. 제나라는 조선과 흉노가 손을 잡고 연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염려해 철의 무역을 엄격히 제한해 왔습니다.”
“음······, 하긴 연나라와 제나라가 요즘처럼 심하게 적대하기 시작한 건 겨우 20년쯤 전 일이었지. 그때만 해도 연과 제의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던 모양이군.”
“그도 그렇지만, 제나라는 중원 북부의 연나라와 조나라를 흉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파제로 여기고 있다는 이유가 큽니다. 흉노인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 타고 기질이 사나워서 자주 중원의 나라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 흉노의 유목민들도 철을 잘 다룬다는데······. 천하의 나라 중 조선만 철기가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하구려. 아무튼, 지금은 조선과 흉노가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제나라가 우리에게 철을 팔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나라는 주변국과 전쟁을 자주 하는 나라라 늘 무기가 많이 필요하니 어지간히 좋은 값을 쳐주지 않는다면 우리 조선에 철을 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음······.”
박사의 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드리우던 한부의 마음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당장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고조선의 특산품은 짐승의 모피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만났던 제나라 사신의 말이 사실이면 고조선산 모피는 꽤 상급품인데······. 그래도 모피가 한반도에서만 나는 상품도 아닌데 제나라가 전략물자인 철을 주면서까지 사 가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일단 국토대장정을 계속 해볼까? 뜻밖에 신박한 특산품을 발견할지도 몰라.’
그후 태자 일행은 어촌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시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도 태자 일행의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언제나 비슷했다.
“산, 늪, 숲, 산, 늪, 숲. 마치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기분이군. 비왕. 왕검성에서는 조선 땅에 미개척지가 이렇게나 많은지 미처 몰랐소.”
“아직 왕실이 열수(대동강) 근처에 자리 잡은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꾸준히 시간과 공을 느리면 이 척박한 곳도 차차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 날이 빨리 았으면 좋겠구려. 어 저건 또 무슨 일이지?!”
한부는 한 마을 근처를 지나다가 일렬로 가지런히 흙바닥에 누워있는 젊은 남녀의 시신 열 구와 시신을 매장하고 있는 일꾼들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젊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벌써······. 아마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나 보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말을 몰던 박사 정이 태자에게 대답했다.
“전하. 전염병이 창궐한 게 아닙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럼 저 젊은이들은 왜 벌써 세상을 뜬 것이오?”
“시신이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 지역의 유력자가 세상을 떠나서 그가 생전에 부리던 하인들을 순장하는 모양입니다.”
“뭐?! 순장?!”
“그렇습니다. 헉?! 저······ 전하. 왜 그리 성난 표정을 지으십니까? 혹시 소신이 자각 없이 전하께 무례를 범했는지요?”
“됐소! 괘념치 마시오!”
박사 정은 그 대답을 듣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입을 닫아버린 태자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부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박사 정을 꾸짖지는 않았다.
‘아직 청동기 시대니까 아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열이 뻗치네! 대체 사람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자백가 사상이 출현으로 완벽한 제정 분리 사회가 된 중원 국가들과 달리 기원전 3세기의 한반도에는 아직 샤머니즘의 그늘이 짙었다.
그나마 고조선은 관료제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덕에 아직도 종교지도자가 군주인 한반도 남부의 부족 국가들에 비하면 발전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제사장을 필두로 한 샤머니즘 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까닭에 순장이나 희생제 등의 악습이 대동강 일대 곳곳에서 행해졌다.
‘미친 샤머니즘 탈레반 녀석들! 개척해야 할 땅은 넘쳐나고 사람은 귀한 시대에 순장이 웬 말이냐고! 이거 기술개발만큼이나 의식 수준 개선도 시급하네!’
굳이 현대인의 윤리기준을 들이대지 않아도 순장과 희생제 풍습은 고조선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유가 사상이 널리 퍼진 중원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수천 년 동안 뿌리내린 악습을 철폐하려면 내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져야 해. 그러려면 먼저 뭔가 공적을 세워야 하고······. 그 부분도 내가 철기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 뭔가 실마리가 보일 것 같은데! 역시 기승전 철기야! 기술자가 아닌 게 한스럽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부는 순장 당하는 시신이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거 혹시 삼베인가?”
태자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박사 정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맞습니다 전하. 평민들은 거친 삼베로 지은 옷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사. 혹시 조선 땅에 삼밭이 많이 있소? 아는 곳이 있으면 그리로 가봅시다.”
“마침 저 마을 근처에 삼밭이 보입니다 전하. 삼은 줄기로는 옷감과 활줄을 만들 수 있고 씨앗은 식량으로 쓰이며 잎사귀는 약재로 쓰이는 유용한 식물이지요.”
한부는 박사 정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꽃으로는 대마초를 만들 수 있지. 제나라에 대마초를 팔아서 철기를 사 와야겠다. 아예 제철법까지 배워올 수 있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