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4화] 극한의 자연환경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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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열 왕검은 갑자기 총명해진 태자가 자신의 친자식이라고 확신한 후 크게 기뻐하며 한부가 꿨다는 꿈의 내용을 신하들에게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단군왕검께서 태자에게 신통한 능력과 해박한 지식을 내려주셨다. 장차 태자가 장성해 왕검이 되면 분명 연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고조선의 귀족들은 처음에는 그저 그의 말을 팔불출 아버지의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한부가 진나라의 중원 통일을 막겠다고 결심한 후 밤낮으로 왕실 서재의 죽간을 읽으며 쌓은 지식을 활용해 왕실 고문격인 박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점차 왕검의 말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태자께서는 이미 어지간한 박사보다도 지식이 해박하신 것 같군요. 정말로 단군왕검께서 태자전하께 축복을 내려주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 대부. 총명하신 태자전하께서 우리 조선의 앞날을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칭찬에 기뻐할 새도 없이 말년에 예정된 굴욕을 피할 생각에 밤낮으로 진시황의 중원 통일을 막을 방법을 궁리했다.
“작년에 왕실이 세금으로 걷은 곡식 양을 기록한 내용을 분석하면 지금 고조선 인구는 22만 명에서 25만 명 사이겠네. 이 시대의 진나라 인구는 대략 천만 명 정도였나? 후······ 역시 중원의 다른 나라와 연합해서 진나라를 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문제는 그러려면 고조선도 국경을 맞댄 연나라 정도는 잡아먹고 전국칠웅에 껴야 한다는 말이지.”
현재 연나라는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드넓은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국력을 크게 불린 상태였다.
한부는 앞으로 20여 년 뒤에 연나라가 국경을 맞댄 조나라를 침략할 때 전차 2천 대와 6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기록을 읽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진저리쳤다.
“하······ 분명 병사 수를 부풀린 기록이겠지만, 실제 연나라 병력이 기록보다 절반 수준이라고 해도 지금의 고조선 인구보다 더 많잖아.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 쥐어짜 봐야 답이 없다. 먼저 현장을 직접 보고 파악해야겠어.”
한부는 마음을 먹자마자 서재를 나온 다음 내관을 불러서 물었다.
“지금 왕검께서는 어디 계신가?”
“정원의 궁술 연습장에서 시위를 당기시는 중입니다. 왕후마마께서도 왕검께서 활을 쏘시는 모습을 구경하고 계십니다.”
“왕검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네. 당장 그쪽으로 가세.”
내관은 한부의 명에 따라 그를 궁술 연습장으로 안내했다.
한열 왕검은 식사 시간 외에는 늘 서재에 틀어박혀 있던 장남이 찾아오자 시위에 화살을 걸다 말고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태자. 늘 죽간을 손에서 놓지 않더니 어쩐 일로 궁술 연습장을 찾았느냐? 슬슬 무술을 익힐 마음이 든 모양이구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뜻대로 앞으로는 몸을 단련하는 데도 힘쓸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어서 말해보아라.”
“조선 전역을 돌면서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한부가 말을 마치는 순간, 왕후 연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들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쥐면서 소리쳤다.
“안됩니다 태자! 왕검성의 성벽 밖은 열 살짜리 소년이 돌아다니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에요!”
“어마마마. 소자가 장차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훌륭한 왕검이 되려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아세요! 왕검성 밖을 나서는 건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도 늦지 않습니다!”
한열 왕검은 의젓하게 대답하는 태자의 얼굴을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다보다가 활을 내관에게 건네주면서 입을 열었다.
“부인. 태자의 말이 옳소. 수도를 열수(洌水) 근처로 옮긴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선의 백성이 몇 명인지 알지 못한다오. 이 기회에 박사 정을 함께 보내서 인구조사를 시행하면 태자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이오.”
“왕검 폐하! 봄이 오긴 했지만, 아직 날이 찹니다. 게다가 도성 바깥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짐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소? 비왕(裨王) 무가 지휘하는 호위병 2백 명을 딸려 보낼 생각이오. 이 정도면 안심하시겠소?”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면 더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태자. 혹시 순시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마마마.”
한부는 왕후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허리를 숙여 부모에게 인사한 다음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조금 전 한열 왕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비왕이면 고조선에서 대통령 경호실장 역할을 하는 지위가 높은 무관이잖아. 거기에 호위병을 2백이나 붙여주시다니. 아직 치안이 많이 안 좋은 편인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 안에서 몇 시간쯤 기다리자 왕검의 명을 받고 찾아온 키는 작아도 건장한 체격의 무장이 한부에게 읍을 하면서 보고했다.
“비왕 무, 태자전하께 보고드립니다. 박사 정과 호위병 2백 명, 그리고 물자를 나를 수송대 4백 명이 순시를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고했소. 더 지체할 것 없이 지금 출발합시다.”
한부는 비왕 무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서자 박사 정과 6백 명의 병사가 고조선의 태자를 바라보면서 읍했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군기가 잡혀있었지만, 한부는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후······ 예상은 했지만, 일반 병사들 무기는 아직 돌창에 석검이구나. 환장하겠네.’
기원전 3세기의 고조선은 상당히 뛰어난 청동 가공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반도에는 청동 제조에 꼭 필요한 재료인 구리 매장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의 청동을 생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고조선에 철기가 널리 전파되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일반 병사들은 여전히 석기로 무장했다.
그나마 장수나 일부 왕실 근위병은 세형동검을 갖추었지만, 그들도 가죽이나 두꺼운 천으로 만든 옷에 청동단추를 여러 개 달아놓은 부실한 갑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연나라군은 잡졸도 전부 철제무기를 갖추고 있을 텐데. 이러니까 요동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
한부가 낙심한 기색을 애써 숨기고 병사들의 인사를 받아주자 하급장교 한 명이 한부에게 작은 말 한 마리를 끌고 오더니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보고했다.
“태자전하. 본래 쌍두마차를 준비하려 했으나, 가는 길에 지형이 험한 곳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마차 대신 말을 준비했습니다.”
“음······ 알겠네. 아바마마께 미리 승마를 배워두길 잘했구먼.”
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능숙한 솜씨로 말 등위에 올라탔다. 비왕 무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말에 오르면서 병사들에게 행군 명령을 내렸다.
“자! 모두 열수를 따라서 서쪽으로 걸어라! 오늘 안에 해안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한부는 비왕의 외침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열수(洌水)는 분명 고조선 시대에 대동강 부를 때 쓰는 이름일 텐데?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해안가도 최소 40km 정도는 떨어져 있지 않나?’
그는 자기 옆에서 말을 몰아가는 비왕 무에게 물었다.
“비왕. 첫날부터 너무 무리한 행군을 시키는 거 아니오? 조선 땅을 전부 돌아보려면 꽤 오랜 시일이 걸릴 테니 병사들의 체력을 온존하는 게 좋지 않겠소?”
“태자 전하. 왕검성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마을은 이곳에서 30리 밖에 있습니다. 왕검성의 병사 중 가장 체력이 좋은 자들을 골라서 데려왔으니 별 문제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0리?! 왕검성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마을까지이 겨우 30리 밖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태자전하.”
한부는 비왕 무의 대답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전국시대의 1리는 조선 시대 보다 긴 576m 정도였어. 그렇다고 해도 30리면 겨우 17km가 조금 넘는 정도잖아. 아! 해안선! 고대 한반도는 현대하고 해안선이 완전히 다르지!’
고대에는 현대와 기후가 다르고 간척 사업이 진행되지 않은 곳이 많아서 현대에는 육지인 지역이 바다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전생에 전공자료에서 봤었던 고대 한반도의 지도를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후······ 지금의 평양 평야는 20세기의 절반 넓이도 안 되겠네. 무엇보다 한반도의 큰 강 하구 지역은 땅에 염분기가 많고 장마철마다 물난리가 나서 이 시대에는 농사지을 꿈도 못 꿔. 벌레가 파먹은 것 같은 해안선하고 한반도의 정신 나간 하상계수가 고조선 부흥의 제일 큰 걸림돌이겠구만.’
그러나 한부는 왕검성을 나선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머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수행원들과 함께 대동강을 따라서 난 길을 지나다가 먼발치에 강변에서 흙을 퍼서 바구니에 담는 일꾼 수십 명을 보고 비왕 무에게 물었다.
“비왕. 저 일꾼들은 왜 저렇게 강변에서 흙을 파고 있는 거요? 토기를 만드는 도공인가요?”
“아마 농부들이 수로를 내는 데 쓸 점토를 파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로를 파는데 왜 점토가 필요한 거요?”
“요동과 달리 패수와 열수 일대는 그냥 땅을 파서 수로를 내면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수로를 판 다음 그 위에 점토를 깔아 물이 빠져나가는 걸 막아야 비로소 농경지에 물을 댈 수 있습니다.”
중원의 여러 지역은 점토질 토양이 많아서 땅을 파기만 하면 수로를 만들 수 있지만, 화강암 기반의 한반도 토양은 수로 위에 점토를 깔아야만 관개시설을 정비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강변에 관개시설을 만들려면 중국의 양쯔 강이나 황하 일대에 같은 시설을 지을 때보다 훨씬 많은 노동력과 자금이 필요한 것이다.
‘쌀이 주식인 나라에서 관개시설 만들기가 이렇게 힘들면 뭐 어쩌라는 거야. 아무리 치트 능력이 있어도 너무 지옥불 난이도잖아.’
한부는 지난 석 달 동안 자신이 고조선의 한국 조어와 고대 중국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한 번이라도 들은 적 있는 언어와 본 적이 있는 문자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능력도 고대 한반도의 극한의 자연환경을 극복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일행은 목적지인 서해안의 어촌에 도착했다.
그러나 고조선의 태자가 탄 말이 마을 입구에서 50보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다가왔는데도 마중을 나온 마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부의 왼편에서 말을 몰던 박사 정은 의아한 목소리로 비왕 무에게 마랬다.
“비왕님. 이 마을의 촌장이 태자께서 당도하셨음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박사님. 분명 태자께서 왕검성을 떠나시기 전에 파발꾼 두 명을 날쌘 말에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의 불경한 자들에게 평민이 조선의 태자를 업신여기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알려줘야겠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태자 일행이 마침내 마을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옷에 피가 흥건하게 묻은 마을 사람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비왕 무의 곁으로 달려왔다.
“꺄아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저희 마을을 구해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이냐! 도적 떼가 마을을 습격한 게냐?!”
“호랑이입니다 나으리! 뒷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왔습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뭣들 하느냐! 어서 태자전하를 후위로 모셔라!”
비왕 무가 긴박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소리치는 순간, 전방에 앞발에 피가 묻은 호랑이가 나타나더니 사납게 울부짖었다.
- 어흥!
한부가 탄 말은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앞발을 허공에 들고 날뛰기 시작했다.
- 히히히히힝!
그는 고삐를 잡고 안간힘을 썼지만, 열 살 소년이 있는 힘껏 날뛰는 말 위에서 버텨낼 순 없었다.
“으악!”
한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손쉬운 먹잇감을 찾고 있던 호랑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