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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3화 (3/195)

〈 3화 〉 [3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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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통역관은 안형의 말을 듣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한열 왕검에게 말했다.

“폐하. 제나라 사절단의 대표인 박사 안형이 폐하의 환대에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통역관인 연회장의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을 걱정해 박사 안형의 오만불손한 인사를 직역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열 왕검은 고조선과 오랜 세월 교류해온 제나라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제나라 사신이 자신을 일국의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있음을 눈치채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폐하가 아니라 전하라······. 아무리 대국의 신하라도 한 나라의 군주에게 어찌 이리 오만불손하게 군단 말인가? 당장 형틀에 묶어 곤장을 치고 싶지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이 정도 굴욕은 견뎌야만 한다.’

한열 왕검이 분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통역관에게 사절단을 자리로 안내하라고 지시하려는 순간, 한준이 안형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나라 사절단의 대표 박사 안형은 어서 왕검 폐하께 무례를 사죄하시오. 전하는 공작이나 자작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지 않소?”

안형은 고조선의 태자가 제나라의 억양으로 완벽한 고대 중국어를 구사하자 두 눈을 크게 뜨고 한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홉 살에서 열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조선 꼬맹이가 이토록 중원의 말을 능숙하게 하다니! 동이족 오랑캐치고는 상당히 총명한 녀석이군. 그렇다고는 해도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서 본데없이 자랐으니 식견은 부족할 게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조선의 왕에게 사과하는 대신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한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대공자 저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왕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강대국의 군주에게 어울리는 칭호입니다. 조선은 아직 연나라에게 빼앗긴 패수(沛水) 너머의 땅을 되찾지 못하였으니 조선의 군주를 왕으로 부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공손한 말씨와는 다르게 그 내용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답변.

고조선 왕실의 통역관은 안형의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준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주나라의 시조이신 무왕께서는 은나라를 멸하신 후 왕실의 인척들에게 작위와 하사하시면서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에게 사방 1백 리의 영지를 분봉하셨소. 비록 조선이 잠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고는 하나 왕검께서는 여전히 주의 공작보다 몇 배나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계시니 칭왕 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소.”

“주 무왕께서 처음으로 제후들에게 영지를 분봉하신 지 거의 8백 년이 지났습니다. 근래에는 그 시대에 비해 강성한 나라가 많아 사방 5백 리의 정도의 작은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가 왕을 자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박사의 말대로라면 제나라의 38대 군주이신 민왕께서도 왕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겠구려. 연나라를 비롯한 5국 연합군의 침략에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신 후 붕어하시기 직전까지도 겨우 두 개의 성만을 다스리셨단 분이니 말이오.”

“허허······.”

안형은 한준의 날카로운 답변을 듣고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열 살짜리 소년이 아니라 유가의 학자와 대화하는 기분이구나. 아직 수염도 안 난 오랑캐 꼬맹이가 주 왕실의 옛 법도를 논한단 말인가? 게다가 고작 십여 년 전에 죽은 암군 민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니······.’

박사 안형은 요동을 잃어 중원 사정에 어두워진 고조선이 아직도 제나라를 진나라와 견줄만한 강대국인 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점을 이용해 제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며 무역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예정이었지만, 고조선 태자의 날카로운 답변을 듣고 나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태자전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식견이 부족해 범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통역관은 조선왕 폐하께도 사과의 말씀을 전해주시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제나라인들은 박사 안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안형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형은 그런 아랫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연회에 참석한 고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에게 예를 갖추었고, 덕분에 그날의 연회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한열 왕검은 박사 안형과 몇 번 술잔을 나누다가 그에게 제나라 상인들이 사고자 하는 모피의 양을 듣고는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여우 가죽 1천 장에, 표범 가죽 오십 장, 그리고 호피 스무 장이라. 예전보다 모피가 많이 필요한가 보오.”

“조선의 모피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해 중원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연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무역로가 막혀서 조선산 모피를 아끼는 여러 나라의 왕족과 대부들 중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끝나자 한열 왕검은 내관들에게 제나라 사절단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했다.

안형이 자신의 침실에 들어간 다음 옷을 갈아입고 촛불을 끄려는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안형 박사님. 호위대장 손양입니다.”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인가?”

“실례인 줄은 알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들어오게.”

청동 미늘갑옷을 입은 제나라인 무사는 상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미닫이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안형에게 읍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박사님. 우리 일행 중 조금 전 연회장에서 제나라의 왕을 욕보인 조선의 대공자를 꾸짖지 않고 오히려 조선후에게 과분한 예를 갖추셨다며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대로 제나라에 귀국하시면 오랑캐에게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며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을까 봐 두려울 지경입니다.”

“자네 눈에도 내 태도가 비굴해 보이던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너무 저자세를 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흠······ 걱정이로군.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분별력이 부족해서야 원. 다들 조선의 대공자가 내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낀 점이 없나 보구먼.”

“음······ 오랑캐치고는 나이에 비해 놀랄 정도로 총명하고 당돌한 녀석이긴 했습니다.”

“열 살밖에 안 된 동이족 꼬맹이가 중원의 말을 능숙하게 하고 주 왕실의 역사를 논했어. 조선후가 후계자 교육에 온 힘을 쏟고 있고 그 노력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증거지. 조선후가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과연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국력을 길러서 요동을 빼앗은 연나라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아!”

“이제야 내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구먼. 사실 대왕께서 모피 가격 흥정이나 하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게 아닐세. 은밀히 조선이 연나라를 견제하는데 과연 쓸모가 있을지 알아 오라는 명을 내리셨지.”

“역시 그랬군요. 그렇지 않아도 대왕께서 모피 장사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 때문에 박사님을 조선에 보내신 걸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입바른 소리라도 듣기 싫지는 않구먼. 왕검성으로 오는 길에 보고 들은 바로는 조선이 아직 예전의 기세를 조금도 되찾은 것 같지 않아 보였네. 그래서 기왕 먼 길을 온 김에 으름장을 놓으면서 모피값이나 깎아보려 했는데, 그 당돌한 꼬맹이를 만난 거지. 아마도 조선후는 유능한 중원의 학자를 등용해 인재를 양성하고 있을 게야.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그랬던 거처럼 연나라에게 피의 복수를 하려고 말일세.”

“이런 궁벽한 곳까지 와서 관직을 구하는 중원 사람이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재능을 썩히면서 속을 태우던 인재가 관직을 찾아 천하를 떠돌다 보니 이 궁벽한 곳까지 발길이 닿은 모양이지. 아무튼, 조선의 대공자는 보통은 넘는 인물로 보였어. 장성하면 분명 가증스러운 연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게야. 조선을 잘 달래다 훗날 그 당돌한 녀석이 아비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면 제나라의 국익에 보탬이 되지 않겠나?”

“그렇게만 된다면 그 틈에 우리 제나라가 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겠군요. 벌써 10년 앞을 내다보고 계시다니······. 박사님의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한편, 두 제나라인이 밀담을 나누고 있을 때, 한준은 한열 왕검의 부름을 받고 등불은 든 내관과 함께 궁궐의 서재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재에 들어와서 인사하자, 한열 왕검은 등잔불과 죽간 여러 개가 놓여있는 탁자에 앉은 채로 내관에게 명령했다.

“내관은 그만 물러가라. 태자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검 폐하.”

내관이 물러가자 한열 왕검은 잠시 한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의 곁으로 다가오너라.”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한준이 다가오자 한열 왕검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죽간을 왼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건 제나라 문자로 적은 우리 조선의 역사서 열권이다. 요동의 왕검성이 불탈 때 간신히 이 열 권만은 챙겨올 수 있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그날부터 지금까지 태자에게 우리 역사를 알아야 훌륭한 왕검이 될 수 있으니 먼저 제나라와 문자를 익혀야 한다고 잔소리를 많이 했지.”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더욱 학업에 힘쓰겠습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 널 이곳으로 부른 게 아니다. 짐이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아들 부는 주나라의 법도는커녕 아직 조선의 역사서조차 완독한 적이 없다는 거다. 게다가 중원의 말은 더더욱 배운 적이 없지.”

“아바마마! 그건······!”

그 순간, 한열 왕검은 탁자 밑에 숨겨둔 세형동검을 꺼내더니 칼날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대면서 고함을 질렀다.

“네 정체가 뭐냐?! 귀신이냐?! 도깨비냐?!”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서! 소자 조선의 태자 한부입니다!”

“우리 아들 부는 마음이 여린 아이다! 목에 칼날이 닿으면 울음을 터뜨리면 터뜨렸지 너처럼 침착하게 대답하지 못해! 대체 우리 아들을 어떻게 한 거냐고!!”

청동검의 매끈한 날이 여린 살갗을 조금 베는 바람에 흘러나온 피 한방울이 도신을 타고 흘러내리다 바닥을 적셨다.

한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마음속으로 무모했던 행동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역시 빌드업도 없이 고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해댄 게 문제였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제나라 사신에게 얕보이면 앞으로의 무역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고! 그나저나 내일 날이 밝자마자 둘러대려고 했던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조선 태자 부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어 나가다 갑자기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들춰 이마의 흉터를 드러내더니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바마마······. 보십시오. 여섯 살 때 아바마마께 말 타는 법을 배우다가 낙마하면서 생긴 흉터입니다. 그날 소자는 지쳐서 잠들 때까지 구슬프게 울었었지요.”

“아아······!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럼 네가 정녕 우리 장남 부란 말이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제가 여덟 살이 되던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요.”

한준은 태자 부의 기억 속 일화를 연달아 말했고 한열 왕검은 마침내 세형동검을 내려놓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우리 장남 부가 맞구나! 부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왜 갑자기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게야?!”

“며칠 전 열병을 앓을 때, 꿈에서 검은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풍채가 당당한 귀인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10년 동안 여러 가지 신기한 지식과 중원의 말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 후에 꿈에서 깼더니 어마마마께서 겨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네 꿈속에서 나타나신 귀인께서는 아무래도 우리 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이신 모양이다! 그분께서 위기를 맞은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고 너를 도와주신 게 분명해!”

한열 왕검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아들을 꽉 끌어안더니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준은 왕검의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어깨를 적시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이렇게 대성통곡하실까. 연나라군에게 요동이 쓸려나가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셨으니 이러실 만도 하지. 남의 일이 아니다. 나도 그냥 넋 놓고 살면 굴욕과 후회 속에서 눈을 감게 될 테니까.’

한준은 자신이 훗날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 역사기록에 이름을 남긴 첫 번째 군주 부왕(否王)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전생에 읽었던 역사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부왕은 말년에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두려운 나머지 진나라에 복속하고 만다.

그렇게 굴욕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종묘사직을 지켜냈지만, 부왕의 아들 준왕(準王)은 원수였던 연나라의 난민 출신인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한반도 남부로 도망치게 된다.

‘중국이라는 개념은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생겼지. 전생에는 불법 중국어선 단속하다 통수맞고 죽었는데 이번 생에는 역사상 최초의 중국인한테 치욕을 당한 다음 죽을 팔자라······. 그리고 내 자식은 그런 짓까지 해가면서 지킨 나라를 또 중국인한테 나라를 뺏긴단 말이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그 꼴은 못 본다.’

그는 오열하는 한열 왕검의 등을 가만히 끌어안은 후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면서 굳게 다짐했다.

‘지금부터 난 고조선의 태자 한부다. 내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라도 진나라의 중원 통일을 반드시 막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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