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10화 (210/210)

210화

편지를 보낸 이는 특이하게도 답장을 바라지 않았다. 사는 곳도, 이름도 알리지 않는다. 근처에 사는 아이가 글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에둘러 그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글 연습이 끝나기라도 한 건가. 간만에 얻은 설렘이 휘발되는 것 같아 나디사는 웃지 못했다.

“그래. 고맙다고 전해.”

“대신에.”

“응?”

“모세스 가문에서 열리는 가장무도회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요. 이 근방에 숲이 있으시다고.”

모세스 가문. 나디사는 그제야 이 아이가 모세스 가문의 하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면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 라드와 별을 사랑하던 소년일 것이었다.

배달부 소년은 할 말을 다 전한 것인지 인사를 마치고 그녀의 작은 집을 떠나갔다. 발랄하게 뛰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디사는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세스 가문이 소유한 숲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그곳엔 쓰린 기억이 웅크리고 있었다. 쉽게 갈 수 없는 이유였다.

“나디사! 뭐 해!”

하도 올라오지 않는 그녀를 찾아 마벤이 내려왔다. 나디사는 뜯지 못한 편지를 가슴에 품고서 웃었다.

“모세스 가문에서 초대가 와서.”

“뭐어? 모세스? 어디서 들어 봤는데.”

얼마 안 가 모세스 가문을 기억해 낸 마벤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 비명을 질렀다. 가장무도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마벤에게 전부 동조하는 듯했지만 나디사는 그들과 동떨어진 표정을 지었다.

“나디사, 너도 갈 거지? 응? 이게 얼마만의 파티야. 그것도 예전에 우리가 같이 지냈던 모세스 가문의 숲이라니.”

와중에 모세스 가문의 어린 아들이 보낸 편지를 뜯어본 나디사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 여긴 하늘이 칙칙해서 묻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이제 몸이 다 나았어요. 이곳의 숲은 겨울에도 아름답지만 아무리 봐도 여름이 더 아름다웠네요. 그곳에 귀하가 있었으니까요. 보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잠 못 들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나디사는 희미하게 웃고선 그 편지를 입가 끝에 댔다.

내가 너 없이 그곳에 가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히아신.

오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하늘에 보내 보았다.

***

사냥꾼과 요정으로 분장하는 파티를 개최했던 모세스 가문의 아들의 취향은 어디로 가지 않았나 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 않겠다던 나디사를 강제로 끌고 온 마벤은 파티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화가 풀린 얼굴을 했다.

모세스 가문에서 준비한 동물 가면을 쓰고 나타난 이들은 나디사 일행에게도 가면을 주었다. 마지못해 참석한 그녀는 라드 가면을 받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지.”

웃음이 마르지 않는 모세스 가주 부부를 보고선 마벤이 귀엣말을 했다. 그러나 나디사의 눈길은 나무와 하늘에 있었다. 편지에 쓰인 것처럼 겨울에도 아름다운 숲을 구경한 나디사는 챙겨 온 편지를 들고서 잠시 일행을 벗어났다.

“나, 잠시 저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녀올게.”

“아, 아는 사람?”

당황해하는 마벤의 손을 두고서 나디사는 겨울이 와 휴업한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히아신과 입맞춤을 나눈 그 날처럼 달이 밝았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춤을 췄다. 건강해진 모세스 가문의 도련님에게 찬사를 보내는 일행 사이에 껴서 그녀만이 웃을 수 없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혼잡한 길을 뚫고서 겨울 정원에 도착한 그녀는 비로소 참고 있던 감정을 풀었다.

그때 본 나무가 저 나무일까. 그녀의 마음이 묶인 기억을 저 나무들이 간직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웃어 보려고 해도 그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만 더해갔다. 자신은 행복할 자격이 없었다. 더 빨리 날아갔으면 의사를 찾았을 거고, 히아신을 살렸을 텐데. 쇠창살 같은 장벽을 나와 맞이한 초라한 들판에서 그녀 없이 죽은 것이다. 그 마지막 심정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면 그녀는 목이 까끌거려 물 한 모금조차 넘길 수 없었다.

“라드를 모는 그 분이 아니세요?”

정원 입구에서 주저앉아 있던 나디사는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는 저를 황당하게 바라보는 그림자는 모세스 가문의 소년의 것이었다. 그새 살이 통통하게 올라 못 알아볼 뻔했다. 나디사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다급히 인사를 했다.

“네, 그간 잘…….”

“아! 그, 그, 나디사 경이죠? 네? 라드의 날개가 하나 더 있다던!”

동경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소년의 짤막한 감탄이 순진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나디사는 애써 밝게 웃었다.

“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와 주실 줄 몰랐어요. 그리고 저번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듯이 모세스 가문에는 언제든 오셔서 신세 지셔도 되고요.”

“모세스 가문에는 잊지 못할 추억이 많죠. 따듯한 마음씨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디사는 소년을 만나면 돌려주려고 했던 편지 뭉텅이를 꺼내 보였다. 당연히 알은체할 줄 알았던 소년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질 때까지 나디사는 그 편지 뭉텅이를 놓지 못했다.

“이게 무엇인가요?”

“…… 저한테 보내신.”

“제가요?”

그때 파티의 주인공을 찾는 목소리에 소년이 돌아보았다. 잠시 실례하겠다는 듯이 무릎을 굽힌 소년이 웃는 얼굴로 달려갔다. 돌려주지 못한 편지에게 시선을 돌린 나디사는 허무함에 빠졌다. 소년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아까부터 봤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재정비 중인 정원에서 등장한 남자는 그녀의 죽은 연인 만큼이나 체격이 좋았다. 달그림자와 하얀 여우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시선이 가는 건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 누구신지.”

“전장에서 뵀었습니다. 기억 안 나세요? 경의 목숨도 살려 드렸는데.”

그 말에 퍼뜩 떠오른 남자의 인상착의가 있었다. 파르난의 자객으로부터 저를 구한, 얼추 히아신의 느낌을 풍기는 남자였다. 남자의 정체를 알고서 경계를 늦춘 나디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초대를 받았군요.”

“아뇨. 저는 여기 살고 있어서.”

“…… 산다고요?”

모세스 가문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정보에 당황해 주춤거리는 찰나 남자가 춤을 청해왔다.

“저랑 한 곡 추실래요?”

“…… 싫습니다.”

“왜요. 나 연습했는데, 나디사 경이랑 추고 싶어서.”

“저는 춤을 안 춥니다.”

“옛날엔 췄잖아요. 추는 것도 좋아하고.”

나디사가 갈수록 이상해지는 그의 말에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간질간질한 분위기로 이끄는 남자가 싫어 손을 치우려는 차에 그는 거절하지 못할 제의를 꺼내 들었다.

“나랑 춤춰주면, 편지를 보낸 이유도 알려 줄게요.”

“…… 그 편지, 당신이 보낸 겁니까?”

“네.”

그 수상쩍은 행동에 불쾌해진 나디사의 손은 어느새 그에게 잡혔다. 그는 동의 없이 춤을 시작하듯 잡아끌기 시작했다. 금색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에서 손이 잡힌 나디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표정을 구기는 나디사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저랑 이러고 있는 게 싫으신가요?”

“…… 편지는 그만 보내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꽤 재밌더군요, 편지를 보내는 게.”

가벼운 행동에 말장난을 섞는 그가 싫어 나디사는 대충 몸을 흔들었다. 그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빙글 돌았다.

“그런데 영웅이고, 대단한 공을 세운 사람이 왜 그런 작은 텃밭 앞에서 사는 거죠? 예쁘고 작은 집을 짓고서.”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말해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편지를 하루에 열 통씩 보낼 거예요. 나 이제 꽤 잘 쓰거든요. 춤도 좋아하고.”

“…… 놓으세요.”

그와 나누는 말장난에 지쳐 나디사는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웃고 있는 하얀 여우 가면이 불길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나디사는 무정한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행동만큼이나 태도 또한 가벼운 남자는 붙잡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한 시계를 꺼낼 뿐이었다.

모세스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니 예의를 끝까지 갖추려 했던 나디사는 슬쩍 본 그 시계가 낯익어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그 시계.”

“아! 이거요?”

급하게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는 그 행동까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가슴이 뛴 나디사는 표정을 굳히고 그의 앞에 섰다.

“어디서 났습니까.”

히아신은 옷 한 자락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의 유품이 될만한 것을 아무리 뒤져도 나온 게 없었단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거예요. 왜요, 탐나요?”

“어디서 났냐고.”

그의 장난을 더 받아 줄 정신은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 파티를 끝장내는 한이 있더라도 뒤집어엎을 것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날이 선 눈빛을 보고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그 대담함에 그녀가 더 밀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내가 잘 아는 시계와 똑같아서 그러니까, 보여 줘요.”

“그 남자에게 선물한 거겠죠? 당신이 잊고 못 사는 그 남자.”

“…… 장난하지 말고.”

“그 남자를 사랑하나요? 아직도? 몇 개월이 지났잖아요.”

무언가 이상했다. 나디사는 분노하던 시선을 서서히 거두어들였다. 미심쩍은 눈길로 그의 전신을 훑었다. 남자의 손에 자리한 흉터. 화상이 있다가 나은 듯한 그 흉터가 찔린 듯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 손, 흉터.”

“아, 흉하죠. 이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이제 혼인도 못 하고 큰일 났죠.”

그렇게 담담히 말하면서도 나디사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숨는 손이었다. 고개를 저은 나디사는 뒤로 도망가는 그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이 느낌, 이 향기. 손에 난 흉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나디사는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가면에 뚫린 구멍으로 연둣빛 시선이 느껴졌다. 가면 끈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눈물을 달고서 나디사는 그의 가면 끈을 당겼다. 흐느끼는 것이 저인지 손인지 모르겠다.

“안녕.”

툭, 떨어지는 하얀 여우 가면 뒤로 나타난 건 그녀가 애타게 찾던 그 남자였다. 바람이 싱그럽던 들판에서 잃어버린 그녀의 연인이었다.

“어떻게 여기 있어?”

“모세스 가문의 가주가 준 증표를 기억해? 그걸 내가 가지고 있었거든. 그걸로 몇 달 간 여기서 신세를 좀 지냈지.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라. 흉터도 그렇고. 온몸 곳곳이 흉터야. 너한테 보이기 부끄럽게.”

그를 다시 만난다면, 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살펴 준 신이 파르난의 남자를 돌려줄 리가 없을 텐데.

“몸도 흉터도 가득하고. 파르난의 사람이라는 과거도 있고. 살아서 너를 지켜만 보려고 했는데 말이지, 나디사.”

“…….”

“만약에 말이야. 아주 만약에. 나를 아직도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만약, 그 가정조차 가슴 쓰라린 나디사는 그의 허리를 안았다. 살아 있는 증거인 그의 심장, 목소리, 그거면 됐다. 그거면 그녀는 히아신 없이 보낸 지난 몇 달을 용서할 수 있었다. 떨리는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안아 왔다.

“나도 그 집에 가도 될까? 한 번만, 가 보고 싶어서.”

“아니야.”

“…… 안돼?”

히아신은 한 번 죽었다 살아났음에도 어리석었다. 그 집을 지은 것도, 그 집을 지키고 있는 것도 너라는 사람 때문인데. 편지 배달부 소년의 말로 전해 들은 그녀의 집을 상상하며 또 어떤 외로움을 쌓아 갔을까.

이건 꿈이 분명했다. 아니면 신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만들어 준 환상이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디사는 거리낌 없이 그 꿈과 환상을 안을 것이었다.

“집으로 가자, 히아신.”

“나는…….”

“우리 집이야.”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을 꺼낸 나디사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서 와, 히아신.”

이번엔 히아신이 울 차례였다. 신이 선사한 기적 같은 달밤에 다시 만난 연인은 경쟁하듯이 울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그 말은 두 사람의 집에서 자주 들리게 될 말이었다. 하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달빛은 이 만남을 안아 주듯 포근하게 웃고 있었다.

[귀하의 하늘은 안녕하신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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